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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저널

[기획] 사설의 기명화 문제

필자 : 남찬순 동아일보 논설위원

발행 : 2002년 봄호(통권 82호)

 

기획


사설의 기명화 문제


南贊淳(동아일보 논설위원)


글은 창작품으로 쓴 사람의 모든 것이 그 속에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문학작품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신문기사나 해설, 칼럼 역시 필자의 창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어떤 소재를 ‘요리’해서 기사나 해설, 칼럼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놓기 때문이다. 문학작품과는 현실이냐 가공이냐, 사실이냐 허구냐 등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설은 어떤가. 사설 역시 하나의 창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창작품인 만큼 만든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사설도 일반 기명기사처럼 집필자의 이름을 꼭 밝혀야 하는가. 사설에 이름을 넣자는 주장은 일반 기명기사처럼 쓴 사람의 객관성, 공정성, 사실성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일반기사에 기자 이름을 넣지 않다가 얼마 전부터 모든 기사에 기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이유와 배경이 사설에도 그대로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설은 일반기사나 해설, 칼럼과는 또다른 독특한 영역을 갖고 있다.

사설은 일반기사나 해설, 칼럼과는 ‘문패’뿐만 아니라 작성과정과 내용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바로 사설에 집필자 이름을 넣을 필요가 없는, 또는 넣을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설의 독특한 영역과 특징을 먼저 논의함으로써 기명화가 부적절함을 지적하려고 한다.

 

사설이란

사설이란 무엇인가. 사설은 한마디로 신문사의 목소리다. 사설은 어떤 사안에 대해 신문사가 갖고 있는 의견이나 주장이다. 따라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일반기사나, 그 사실을 기자가 해석하고 분석하는 해설과는 다른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개인이 어떤 현상이나 사실을 보고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담는 칼럼과도 다른 영역이다. 사설은 발행인이나 사주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지만 그렇다고 발행인이나 사주 개인의 목소리만도 아니다. 신문사라는 한 조직의 목소리다.

사설은 신문사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논지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항상 찬반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설은 많은 뉴스 중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독자들에게 제시해주고, 해설 평가하며, 독자에게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그 신문의 의견과 견해를 밝히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 표명은 강력한 지위를 가진 신문사가 뒷받침하기 때문에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남시욱, 「인터넷시대의 취재와 보도」, 2001, p. 268). 따라서 사설은 가능한 한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고 그것을 토대로 진실을 밝히는 일반기사와는 다른 속성이 있는 것이다.

해설 역시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밝히기 위한 기자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칼럼은 의견기사인 동시에 주관적 보도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는 사설과 같다. 그러나 사설은 어떤 특정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신문사라는 조직의 목소리라는 점에서 칼럼과 구분된다.

사설은 주관적인 견해나 의견을 밝히는 글이기 때문에 객관성, 공정성 등 일반 취재기사의 척도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치 않다. 사설을 읽는 독자는 뉴스를 찾기보다는 어떤 현상에 대한 신문사의 주장이나 의사표명에 더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정책 입안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사설의 주장이나 방향에 특별히 유의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설의 내용 자체도 일반기사처럼 사실의 ‘뼈 조각’을 모아 전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실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더 강조한다. 따라서 강력한 주장을 내세워 읽는 사람의 감동을 자아내는 사설도 있을 수 있고, 객관적인 사실의 명암을 따지는 사설도 있다. 앞으로의 사태진전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지를 펴는 사설도 있을 수 있고, 어떤 기사의 내용이나 주체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는 사설도 있을 수 있다. 주관성이나 비판성이 없는 사설은 사설이 아닌 것이다.

이같은 사설의 역할이나 특성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설의 역할과 기능은 첫째 사회의 기본 윤리관과 가치관에 입각하여 공공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 문제들의 성질과 배경을 밝힌 다음 문제해결의 방안을 제시하는 것, 둘째 사회의 부정과 부조리 그리고 공공적 이슈에 관한 그릇된 견해와 조치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 셋째 사회정의를 내세우면서 여론을 리드하고 사회의 지적 풍토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김호준, 「사설이란?」, 1998, p. 11)

사설의 주관성 때문에 미국, 영국 등에서는 사설을 오피니언 페이지에 게재한다. 여러 독자나 전문가들의 견해처럼 사설이 신문사의 견해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같은 날짜 신문이라 해도 사설이 기명기사나 해설, 칼럼과는 다른 시각을 갖거나 사실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신문이 일관성이 없다든가 앞뒤가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설의 특성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설이 신문사의 목소리라면 사시와 어떤 연관이 있으며, 사시를 어떻게 반영하는가. 사시란 말 그대로 그 회사의 가장 큰 이념이자 목표다. 그 회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자 선(善)이다. 신문사의 주관적인 목소리인 사설은 당연히 이같은 사시를 바탕으로 한다. 사시에 반대되는 사설은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주창하는 신문사의 사설이 사회주의와 통제경제를 편드는 논지를 펼 수는 없다. 문화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사가 어느 특정 종교를 지지하며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신문사가 독재체제의 언론탄압과 부당한 인권유린을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설은 어떻게 작성되는가

한국 신문들을 보면 사설의 작성 과정이 대체로 비슷하다. 필자가 속해 있는 동아일보의 예를 들겠다.

동아일보 논설위원들은 각 분야별로 맡은 바가 다르다. 예를 들어 정치·문화·사회 등 각 분야별로 ‘전공’이 나뉘어 있다. 이들 위원들은 대부분 편집국에서 그 분야의 데스크를 거친 사람들이다.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논설위원은 모든 뉴스를 추적하면서도 자기 분야에 대한 뉴스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어 정치담당 논설위원은 국회의 움직임을 놓칠 수 없고, 사회담당 논설위원은 검찰이나 법원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한다.

논설위원들은 그날그날 뉴스의 흐름을 추적하면서 주장할 바와 강조할 바를 생각해야 한다. 주장할 바와 강조할 바, 즉 논지가 분명치 않으면 일단 사설로서는 큰 가치가 없다. 따라서 일상의 뉴스를 추적하면서도 논지를 찾고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논지를 세울 수 없는 뉴스는 사실상 사설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가끔 수필이나 해설식 사설도 눈에 띄지만 그런 사설은 특별한 사회적 분위기나 외신에 기초를 두고 그 나름대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동아일보 논설위원들은 매일 오전 10시 30분 첫 회의를 한다. 이 회의에서는 각 논설위원이 그날 사설에 담아야 할 주제를 발제한다. 자기 분야는 물론이고 다른 분야에 관한 것도 함께 발제한다. 이는 특정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시각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한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견해도 듣기 위한 것이다. 흔히 전문적인 시각에 집착하다 보면 일반적인 견해를 놓칠 수 있다. 논설위원은 오전회의 때 각각 3∼4개의 주제를 발제한다.

회의는 각 논설위원이 자신이 발제한 주제를 설명하고 논지를 세우는 순으로 진행된다. 일단 논설위원들의 얘기가 끝나면 자연히 그날의 공통주제가 등장하고 논지가 형성된다.

논설위원들의 주제에 대한 토론은 어느 회의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물론 각 논설위원들은 주로 자기가 맡은 분야의 주제에 대해 사안의 내용을 설명하고 논지를 세운다. 여기에 다른 논설위원의 견해가 투입된다. 가끔 격렬한 토론이 벌어질 수도 있고, 논설위원 상호간에 이견이 생기고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격론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논의를 진행하다 보면 특정사안에 대한 주장과 논지가 자연히 정립되고 논지가 세워지는 것이 보통이다. 해당 논설위원은 그 논지를 정리하고 종합한다. 만약 해당 논설위원의 견해가 전반적으로 논의된 방향이나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또는 자신은 그런 방향과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할 경우는 다른 논설위원이 집필을 대신할 때도 있다.

이렇게 결정된 주제와 논지는 일단 발행인과 다시 상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우선 그날 채택된 사설의 주제와 논지를 다시 논의하고, 특별히 고려해야 할 신문사 자체의 입장이나 주장이 있으면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사설란은 사주(社主)와 발행인의 ‘마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신문사 내의 많은 의견들 가운데서도 사주나 발행인 측의 견해·방침·주장 등을 내보이는 고정란이 사설이기 때문이다(김호준, 같은책, p. 44). 이처럼 사설이 사주나 발행인의 견해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공익성, 보편성보다는 회사의 이익이라든지 사적인 이해관계에 치우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는 논설회의에서 결정된 주제와 논지는 거의 대부분 그대로 ‘논설화’된다. 가끔 발행인의 견해가 피력되는 수도 있으나 이는 공익성을 강조한다든지 회사 전체의 목소리를 일관되게 내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사설의 주제와 논지는 해당 논설위원이 대표집필을 하는 형식으로 정리된다. 사설은 그 신문사의 공식 견해이므로 집필하는 논설위원은 사설을 ‘초(草)한다’ 또는 ‘기초(起草)한다’고 한다(남시욱, 같은책, p. 268). 해당 논설위원은 보통 그날 오후 4시까지 사설을 만들어 데스크 격인 논설실장에게 넘기지만, 어디까지나 논설위원들이 논의한 내용 그리고 발행인이나 사주의 견해를 중심으로 작성해야 한다. 집필자는 사설의 논지나 주장이 아무리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 해도 일단 집필을 맡은 이상 본인의 주관이나 신념에 따라 사설을 구성해서는 안된다. 사설은 그 논설위원의 주관적 견해나 입장을 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설의 기명이 적절치 못한 이유

지금까지 사설의 특성과 작성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바로 그런 특성과 작성과정 때문에 사설의 기명화가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다.

첫째, 사설은 집필자의 의견이나 목소리가 아닌 신문사 전체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집필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 일반기사에 기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그 기사의 공정성, 정확성, 책임성 등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농산물에도 재배자의 이름을 밝히는 경우가 많다. 소비자에게 제품의 질에 대한 믿음을 줌으로써 더 많이 사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일반기사에 기자의 이름을 넣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같은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고, 내용에 책임을 진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해설이나 칼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설은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사설은 집필자의 작품이 아니다. 사설의 방향이나 내용은 이미 합작품으로 만들어져 있고, 집필자는 그것을 꿰매는 사람 또는 포장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어느 마을이나 단체에서 공동으로 생산한 제품에 마지막으로 포장한 사람의 이름을 넣고 마치 그 사람이 생산자인 것처럼 하는 것은 부적절하지 않은가. 물론 포장을 잘하면 그 상품이 더욱 빛나듯 사설도 대표집필을 잘하면 한층 돋보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사설 내용의 공정성이라든가 방향문제 등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 신문사에 귀속되기 때문에 집필자의 이름을 넣는 것은 부적절하다. 일반기사나 해설, 칼럼 등 필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는 그 필자가 자신의 글에 모든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내용이 정확치 않거나 공정치 않을 경우 필자는 그에 대해 해명을 하고 어느 때는 법적 책임까지도 져야 한다. 이처럼 이름을 밝히는 것은 그가 바로 책임의 주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설은 이미 설명한 대로 논설위원 한 사람이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일반기사나 해설, 칼럼이 필자를 밝혀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사설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언론중재위 같은 곳에서 사설 집필자를 상대로 책임을 따지는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셋째, 사설의 작성과정을 봐도 집필한 논설위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옳지 않다. 일반기사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작성하는 경우가 있다. 대개 2∼3명이 공동으로 만든 기사라면 그 기자들의 이름을 모두 밝힌다. 그러나 선거라든지 대형사고가 발생해 정치부 기자나 사회부 기자가 모두 동원되다시피 했을 경우, 또는 여러 부서가 공동취재했을 경우는 특별취재팀 또는 공동취재팀 등으로 기명을 대신한다.

사설도 논설위원 한 사람이 아닌 논설위원 전체의 합동작품이기 때문에 집필자의 이름만 밝히는 것은 적절히 않다. 아침부터 논설위원 개개인이 발제를 하고 그 발제에 대해 종합적으로 토론을 한 뒤 논지나 주장의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에 구태여 기명을 한다면 ‘논설위원실’이라고 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설은 논설위원실에서 만든다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굳이 ‘논설위원실’에서 작성한 것이라고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결 론

일반기사나 해설, 칼럼에 기자의 이름을 명기하는 것은 여러 가지 합목적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사설은 다르다. 사설은 그 신문사가 사설의 공정성이나 정당성에 책임을 지고 담보한다. 일반기사에 대한 모든 책임이 기자에게 귀속되는 것처럼 사설에 대한 모든 책임이 신문사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사설 말미에 집필자의 이름을 넣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남찬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 시라큐스대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정치부·국제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 기획특집부장

■동아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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