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훈토론회

‘벽을 허물자’ 3차 토론회-언론계 갈등 극복 대안 찾기

초청자 :
남시욱, 김민환, 김경호
개최일 :
2009-11-26
조회수 :
6,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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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허물자’ 3차 토론회>

 

주제:언론계 갈등 극복 대안 찾기

일시:2009년 11월 26일 오후 2시 30분

장소:한국프레스센터 내셔널프레스클럽

 

사       회: 이목희 관훈클럽 총무

주제발표 :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전 문화일보 사장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김경호 한국기자협회 41대 회장

 

이창순(관훈클럽 사무국장):지금부터 관훈클럽과 한국언론학회가 공동주최하고 한국언론재단이 후원하는 ‘언론계 갈등 극복 대안 찾기’ 토론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목희 관훈클럽 총무님의 개회사 겸 인사말씀이 있겠습니다.

 

이목희(관훈클럽 총무):죄송합니다만 앉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관훈클럽 이목희 총무입니다. 저희 관훈클럽이 올해부터 벌이고 있는 ‘벽을 허물자’ 캠페인의 세 번째 토론회를 한국언론학회와 공동으로 개최하게 되어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후원해주신 한국언론재단에도 감사드립니다. 지난 1, 2차 토론회에서는 문제점을 알아보는 그런 것이었고요, 올해 마지막으로 열리는 3차 토론회는 어떤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정말 꾸준히 의견을 제시하고 연구해오신 우리 언론계 대선배이신 남시욱 선배님과 또 사실보도를 객관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는 것을 아주 분석적으로 연구해오신 김민환 고려대 교수님, 그리고 현장을 잘 알고 있는 김경호 기자협회 회장님을 주제발표자로 모셨습니다. 토론자로 모신 분들도 모두 쟁쟁한 기자와 교수들입니다. 오늘 좋은 토론회가 될 것으로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오늘 토론회가 언론 내부의 벽을 허무는 데 또 한 번의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간단하게나마 개회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이창순:이어서 문창극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이사장님의 인사말씀이 있겠습니다.

 

문창극(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이사장):오늘 많은 선배님들 얼굴을 뵈니까 진짜 한국 저널리즘, 한국언론계에 대한 선배님들의 걱정이 얼마나 크신가 하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겠습니다. 우리 이목희 총무가 총무가 된 이후 지금 한국 저널리즘이 겪고 있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오늘 세 번째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우리 언론학회가 공동으로 주관해서 한국의 저널리즘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나 이런 것에 대해서 대토론회를 갖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현재의 우리 저널리즘이 세계적인 현상과 마찬가지로 신문 같은 경우 하락추세에 있는 등 외부적 환경이 나쁜 데다가 한국언론계는 거기에 플러스 내부적인 갈등까지 겪고 있어서 저희 언론계가 안팎 곱사등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언론계가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한국 민주주의에도 굉장히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다들 공감하실 줄 믿습니다. 관훈클럽이 올해는 주로 이런 토론회를 했는데 이제는 정말로 우리가 행동으로써 이 벽을 허물고 과거 우리 선배들이 추구했던 저널리즘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그런 모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감사하고, 김경호 회장님, 남시욱 선배님, 또 김민환 교수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이창순:다음은 최현철 한국언론학회 회장님의 인사말씀이 있겠습니다.

 

최현철(한국언론학회 회장):지난달부터 한국언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현철입니다. 현재 고려대학교에 몸담고 있고요. 오늘 토론회를 관훈클럽과 저희 한국언론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게 된 것을 저 개인적으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발제해주시는 남시욱 교수님, 그리고 김민환 교수님, 김경호 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말씀 듣기로는 오늘 이것이 올해 열리는 마지막 토론회라고 합니다. 지난번까지 토론회가 두 번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벽을 허물자’라는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대토론회를 갖게 됐는데 지금까지 우리 언론계에 또는 미디어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갈등이라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갈등이 사회발전에 원동력이 될 때가 상당히 많으니까요. 그러나 서로 생채기 내는 갈등은 우리가 피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갈등의 첫째 원인은 우리 언론인들이 책임을 져야 될 것 같습니다만 그 책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부나 정치권의 무분별한 미디어발전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채기 나는 구조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생채기가 안 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언론인들께서 또는 우리 교수들이 서로 생채기 내지 않는, 벽을 허무는 그런 자리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만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나라 미디어 시스템이 서로 화합하는, 어떤 좋은 체제를 갖는, 그런 것들이 토론되는 자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 발표해주시고 또 토론해주시는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요, 이런 좋은 자리를 만들어주신 우리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문창극 이사장님 그리고 이목희 총무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목희:문 이사장님, 최 회장님 감사드립니다. 이 캠페인이 올해로 끝나는 것은 아니고요,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봅니다. 문 이사장님 말씀하신 대로 내년에는 더 업그레이드되고, 말하자면 현장에서 실현할 수 있는 그런 방법들을 오늘 다양하게 논의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실을 맺을 때까지 내년에도 계속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주제발표자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오른쪽에 따로 소개가 필요 없으신 우리 남시욱 선배님이십니다. 세종대 석좌교수로 계시고 동아일보에서 편집국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하셨고, 문화일보 사장을 지내셨습니다. 제 왼쪽에는 김민환 교수입니다. 김 교수님도 언론학계에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으실 정도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제 오른쪽에 김경호 한국기자협회 회장이십니다. 기자협회 회장으로서 기자협회가 그래도 좀 중립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좋은 제안을 많이 해주시려고 좋은 원고를 써주셨습니다.

다음에는 토론자를 소개하겠습니다. 김민배 조선일보 편집국 부국장이십니다. 이승철 경향신문 논설위원이시고요,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님이십니다. 최영재 한림대 교수님이십니다.

그러면 바로 토론에 들어가겠는데요, 저도 주제발표문을 읽어봤는데 정말 훌륭하신 논문을 써주셨습니다. 이것을 20분에 발표하라는 게 정말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제약이 있어 많은 시간을 드릴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토론회를 조금 일찍 진행하고 20분에 추가로 5분을 더해 25분씩 드릴 테니까 시간을 꼭 좀 지켜주셔서 25분 내에 주제발표를 마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남시욱 선배님께서 주제발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시욱(세종대 석좌교수):감사합니다. 오늘 우리 조용중 선배를 비롯해서 언론계 선배님들, 동료 후배님들을 이렇게 많이 모시고, 또 언론학회에서도 여러 분이 오셔서 제가 이 졸견을 말씀드리는 게 사실 조금 떨리기도 합니다. 여기 김민환 한국언론사 교수가 계십니다만, 우리 언론계에 구한말 근대화세력, 개화세력으로서, 말하자면 이 나라를 지키려는 그런 세력으로서 정말 존경할 만한 언론인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때 물론 똑같은 생각은 아니지만 굉장한 연대감이 있었고 또 적어도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전부터 연대감을 갖고 언론활동을 해온 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제가 일선기자 할 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만 기자실에서 같이 뒹굴고 그 친구들과 아주 잘 어울렸고, 같은 회사에 소속된 사람 이상으로 출입기자들이 참 친하게 지냈습니다. 언론은 이처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제도랄까, 하나의 굉장히 연대감이 있는 직업이지요.

그런데 이 직업이 요새 내부갈등으로 망가지고 있는 거지요. 또 그것이 기사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데 기사가 잘못되면 결국 피해는 독자, 나아가 국민이 보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관훈클럽이 이런 좋은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에 대해서 저도 마음속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사업이지만 그냥 논의만 해서는 안 되는 거죠. 좋은 결실이 맺어질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이상 보람된 일이 없겠습니다. ‘벽을 허물자’고 하는데 사실은 벽이 완전히 허물어질지 조금 낮아질지 모르지만 같은 운동장에서 노는 게 제일 좋은 거죠. 그런 점에서는 벽이 완전히 걷혀, 베를린장벽처럼 완전히 없어지는 게 좋지요. 그러려면 우리가 어떤 작업을 해야 되느냐? 제 주제발표문을 보신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결국 이것은 직업언론인인 우리의 일이라고 봅니다. 아까 최 교수가 말씀하셨습니다만 언론의 제도도 있고 여러 가지 외부적 요인도 있지만 결국은 우리 몫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귀결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시간제한이 있기 때문에 제가 쓴 글을 다 소화할 수 없지만 그런 점을 바탕으로 군데군데 요점만 읽어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말씀드릴 것은 용어 문제인데요, 최근에 제가 진보세력 어쩌고 쓰니까 우파 쪽에서 굉장히 반발하고 있어요. ‘그 빨갱이 같은 놈들을 무슨 진보라고 그러느냐’고 말하고 ‘당신도 혹시 그런 사상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진보는 좌파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고, 범위도 넓지요. 또 하나는 우리가 말하는 한겨레, 경향, 혹은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이런 등등의 소위 진보언론들은 자기 스스로 ‘진보정론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보언론, 보수언론 이렇게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초점은 이겁니다. 언론계가 다양한 의견이 있고, 그것도 다 좋은 거지요. 또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 오버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이따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지금 언론계에서 제일 큰 폐해가 뭔가 하니까 자기와 다른 견해를 말하는 사람을 비방하는 것이에요. 논리적 분석도 없이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거죠. 이게 지금 생리화되어 있어 아주 개탄할 일입니다. 판사는 판결로써 말하는 거고, 검사는 수사로 말하는 거고, 학자는 자기 논문으로 말하면 그만이고, 기자는 자기 글을 쓰면 그만이지 왜 남의 글을 시비하느냐 이겁니다. 여기에 중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예들을 좀 더 통계적인 뒷받침을 해서 말씀드리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언론재단에서 2009년에 실시한 ‘기자 의식조사’ 등을 약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사는 본격적으로 들어가 있지 않아요. 다음은 한겨레신문 출신인 경원대학교 이원섭 교수의 조사를 인용했습니다. 이분이 노무현시대의 6개지, 소위 ‘조ㆍ중ㆍ동’과 한겨레ㆍ경향ㆍ서울신문의 사설을 비교했는데 체계적으로 대단히 잘되어 있어요. 그런 등등 몇 개 외에는 자료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한테는 많이 도움이 됐고 또 며칠 전 언론재단에서 이 정파성에 관한 세미나를 했어요. 3개의 페이퍼를 제가 봤습니다. 다 교수님들이 쓴 건데 대단히 좋은 말씀이 많이 나와서 저한테 많은 참고가 됐습니다. 물론 이념문제와 정파성은 조금 개념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계에 반목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분석적으로 잘돼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언론학회 최 회장이 말씀하셨습니다만, 언론계에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죠.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것이 정말 이성적으로 피력되고 이성적인 토론이 가능하면 어떤 사회적 컨센서스가 나오는 거고, 그런 것을 통한 정치적 통합은 굉장히 좋은 것이고,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게 언론의 기본의무지요. 그런데 이게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아요. 지금 완전히 감정적으로 싸우고 있어요.

제가 며칠 전 진보진영에 속한다는 모 신문의 인터넷 페이지를 보니까 광주에서 열린 ‘영산강살리기 희망선포식’에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것에 대해 도지사하고 시장이 대통령을 좀 칭찬하는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 인터넷판 메인타이틀이 뭐냐면 광주시장하고 전남도지사가 용비어천가가 아니고 이명박어천가를 불렀다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야, 이것 참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제목을 붙인 분들이 자기가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생각을 못 하는 겁니다. 이건 정말 독자한테 예의가 아니지요. 독자한테 예의가 뭡니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독자가 판단하도록 하는 건데 이미 판단을 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그것을 본 민주당 사람들이 이제 도지사가 당 떠나게 됐다, 이런 식으로 말해서 점점 상황이 나빠지는 겁니다. 그런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예가 아니고 언론계의 갈등과 이것을 어떻게 처방하면 되겠느냐 하는 것인데,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요?

 

이목희:이제 7, 8분밖에 안 지났습니다.

 

남시욱:내가 말이 좀 빨라져서….

 

이목희:제가 한 23분 되면 알려드릴게요.

 

남시욱:건국 후에는 물론이고, 해방 직후 3년 동안도 좌ㆍ우파의 갈등이 있었고 테러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좌우 혹은 보수­진보의 대립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역시 한겨레신문 창단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뭐,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겨레신문이 여러분 알다시피 민주화 이듬해인 1988년에 나왔지요. 한겨레신문은 처음부터 아주 강한 민족주의적인 것을 지향했지요. 신문 이름도 한겨레 아닙니까? 민족적인 이름인데, 그해에 벌써 상당히 진보성향을 드러냈다는 것을 제 논문에 써놨습니다만 리영희 씨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식이었지요. 그러나 그때만 해도 아직 신생신문이었기 때문에 요새처럼 이렇게 본격적으로 대립한 것은 아니었지요. 그냥 이념이 다른 신문이 나오기 시작한다, 또 말하자면 다원적인 이념시대에 진입한다는 것을 예고한 거지요.

제가 볼 때 이념대립으로 인한 갈등이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역시 김대중정권 출범과 관계있다고 봅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김대중정권은 1998년 2월 25일 출범했지요. 그런데 이 양반이 출범하자마자 한 게 뭔가 하니까, 이회창 후보를 도왔다고 생각하는 중앙일보, 그다음에 자기의 대북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던 세계일보, 여기에 해당 사에 소속된 분이 계시겠지만, 두 신문사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했지요. 그래서 엄청난 세금을 때리고 중앙일보 사주는 구속하고 또 세계일보는 직접 탈세가 아니고 통일그룹과 관계되어서 했기 때문에 세계일보 사장은 사표 내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게 1999년 8월인데 1999년 12월에 그 당시 대한매일이, 지금은 서울신문이지만, 이것을 지지하는 사설을 썼어요. ‘이다음 선거 때, 이다음 총선 때 어떻게 해서든 김대중 대통령한테 힘을 줘야 되겠다’ 이런 사설이 나온 겁니다.

그 이듬해인 2000년에 6ㆍ15공동선언이 나오고 남북정상회담으로 한 해가 갔지요. 그리고 2001년 1월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보수신문에 대해 손을 보기 시작한 거지요. 언론개혁을 강조하시고 그다음에 세무조사를 했죠. 주제발표문에 써놨습니다만, 그해 한겨레신문이 ‘언론권력을 해부한다’는 특집을 무려 28회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말하자면 수구신문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친일했다’는 과거까지 다 보도하고 ‘가족경영이다’ 식으로까지 나오니까 전쟁이 시작됐지요. 거기에 가세해 KBS, MBC가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100분 토론’ 등도 방영했지요. 경향신문이 또 거기에 가세했지요. 이래서 2001년부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해서 말하자면 오늘의 반목이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2001년을 한국언론에 있어 ‘블랙홀의 시작’, 그러니까 ‘블랙 이어(black year)’라고 보는 거예요. 말하자면 좌우언론 반목의 시발의 해를 2001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2001년이라는 것은 한국언론사에 아주 치욕적인 해입니다. 언론이 정치세력과 손잡고 서로 공격하고 있어요. 제가 오늘 아침 이회창씨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설사 그렇게 느끼더라도 정치지도자가 그렇게 말할 정도가 되면 벌써 거의 끝장까지 온 것 아닙니까? ‘조중동이 방송을 얻기 위해서, 종편을 얻기 위해서 노예가 됐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하니, 그렇게 비치는 것도 문제고, 그렇게 말하는 분도 문제고, 하여간 오늘의 언론현상이 이렇게 됐다는 것은 대단히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2001년부터 시작된 것이 근 10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이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겨레신문의 출발로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드러내다가 김대중정권 출범부터 대립이 격화되어서 서로 비난하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서로 견해가 다르다는 게 아니고 ‘왜 너 다르냐? 너 잘못됐다’ 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제가 자세하게 그 예를 들었는데 예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고요, 가장 극적인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2007년이지요. 2007년에 한겨레신문하고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이런 진보언론들이 ‘기자실통폐합’ 문제에 대해 거론하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PD협회 총회에 가서 말씀했지요. 참 이것은 역사적인, 저는 한국언론사를 다룰 때 역사적인 하나의 세그먼트로 보는데요, 참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한 그런 건데, 15페이지에 있습니다. “언론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청산하려 했더니 편을 갈라 싸우던 언론이 모두 나의 적이 되어, 이전에는 나의 편이 되었던 소위 진보적 언론도 일색으로 나를 조진다.” 이렇게 아주 공개적으로 노 대통령이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진보언론을 위해서도 수치스러운 얘기고, 보수언론에도 수치스러운 얘기지요. 대통령이 갈라서 싸우던 언론이 한패가 되어서 나를 조진다고 한 말은 오늘 이회창씨 발언에 못지않은 폭언이지요, 제가 볼 때는.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경향신문이 뭐라고 그랬느냐? 경향신문이 이것을 반박했습니다. 경향신문이 뭐라고 반박했느냐? ‘진보언론은 대통령을 편들지 않았다’는 제목의 사설을 썼어요. 사설에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경향신문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학법 개정 등의 사안을 적극 지지했던 것은 그 정책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더욱 앞당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무현 개인을 지지한 게 아니고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학법 이것이 민주주의를 더욱 앞당길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라크파병과 한미FTA를 강력히 반대한 것은 그것이 명분 없는 침략전쟁의 들러리이자 민중의 생존권을 일탈하는 것이었기 때문으로 노무현정부의 정책에 대해 사안별로 분명한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라고 밝혔어요. 그러니까 ‘진보언론은 노무현을 지지한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또 반박했지요. 그래서 이런 것을 보면 참 우리가 이렇게 참을성이 없는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이 지난 10년간의 언론계 실상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소위 조ㆍ중ㆍ동ㆍ문화 4개지하고 한겨레하고 경향신문 그리고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4개 언론사가 서로 대치를 이루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진보 4개지는 최근에 진보정당 4개를 모아서 ‘지방선거 앞두고 너희들 단합해라’는 좌담회를 가졌지요. 그 좌담회 내용은 제가 자세히는 안 읽어봤지만 아마 진보정치세력을 돕는 그런 것일 겁니다. 그런 좌담회를 한 거예요. 그것은 정계의 분석 차원을 넘는다고 봅니다. 이것도 역시 진보정치세력을 은근히 인커리지하는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이 오늘 현재 상황입니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 언론이 어떤 계기로 해서 서로 물고 뜯고 하는데 최근에 또 가장 극적인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진보언론과 보수언론이 한바탕 붙은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보수언론이 먼저 ‘방송들이 처음에 막 노무현을 비판하다가 노무현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왜 이렇게 감싸고 드느냐’ 이러니까 소위 진보언론에서 보수언론에 대해 ‘너희들은 뭐냐?’고 또 공격한 거예요. 그다음 다시 또 몇 라운드 상대방을 막 공격하는 거예요.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자기주장만 펴면 되는 거지, 왜 자꾸 남을 시기하느냐 이거지요. 진리를 자기가 독점한 것도 아닌데 말하자면 독재심리인 거예요. 그러면 다양성과는 도저히 양립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언론계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빛나는 전통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이렇게 내부갈등을 보이고 있는데 이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 이것으로 인해 언론 전반의 신인도가, 신뢰도가 떨어졌어요. 기자신뢰도 조사를 위해 기자들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10점 만점에 신뢰도가 5점 정도예요. 신뢰성이 반으로 떨어진 거지요. 두 번째는 언론이 정치권하고 서로 결합해서 일종의 진영논리에 빠져서 막 편파보도를 해대는 겁니다. 세 번째, 이렇게 하다 보니까 이제는 자기진영에 불리한 기사를 아예 안 써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쪽 신문을 안 보면 모르도록 되어 있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선동적인 제목을 뽑아서 편향적인 편집을 하고 또 차분하고 분석적인 기사 대신 선동적인 내용도 막 쓰고 있어요. 이것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예요. 언론이 사회적인 컨센서스를 명확하게 확대재생산하지 못하면 결국은 일반국민들, 우리 선량한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거지요. 언론인들이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가지고 언론인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다 자사이기주의까지 있어요. 없는 말, 있는 말, 거짓말까지 써가지고 막 욕을 해대는 이런 것이 있어요.

그다음에 제가 꼭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헌법재판소 판결에 대해서입니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관련 판결을 했는데 많은 신문들이 그 판결내용에 대해서 계속 시비를 걸고 있는 거예요. 하도 이상해서 제가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판결문을 전부 입수해서 저 나름대로 분석해 봤더니 지금 터무니없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거예요.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절차에 하자가 있다. 절차에 하자가 있는데 그래도 그것이 유효하다고 판결 내린 것은 앞뒤가 안 맞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기사를 막 써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헌법재판소만 병신이 되어 있는 상태고 또 야당에서는 국회에서 이것을 재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그런데 제가 잘못 봤는지 혹은 무식해서 그런지 몰라도 제가 볼 때는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닌데 이것을 계속 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한테 이것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오해를 피할 것 같아요. 여러분 알다시피 헌법재판관이 9명입니다. 9명인데 판결은 어떻게 하느냐. 다수결로 하는 겁니다. 국회 의결하고 똑같은 거지요. 예컨대 절차에 문제가 있다, 즉 야당한테 표결을 못하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6명 이상, 방송법은 신문법안과는 조금씩 다릅니다만 6, 7명 이상이 이것은 안 된다고 판결을 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무효로 하느냐 하는 여부에 대해서는 문제가 전혀 다른 겁니다. 왜? 많은 사람들은 야당이 표결 못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전체에 영향을 안 준다 이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은 아예 문제가 안 되기 때문에 무효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은 국회에서 할 일이지, 우리가 절차에 문제나 하자가 있다는 것만 지적하면 그만이지 이것을 무효로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이런 의견들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자세히 이유별로 써놨는데 여러분 시간 나시면 보면 좋겠습니다. 방송법안과 신문법안에 대해서 견해별로 집계해놓은 게 있습니다. 예컨대 무효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수인 6명 내지 7명이기 때문에 무효가 아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계속해서 지금 일반성 없는 판결을 했다고 막 써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 헌법재판관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얻어맞고 가만히 있는가? 왜 해명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생각했으면 여러분이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결국은 제가 생각하기에 왜곡보도하는 것도 기자, 자사이기주의에 빠져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도 기자, 전부 다 직업언론인들입니다. 그런 직업언론인들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구한말 때와 같은 무슨 지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새 나오는 무슨 시민기자 이런 아마추어 기자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생업으로 하는, 어쩌면 평생 생업으로 해야 하는 직업언론인으로서의 자존심, 프라이드, 이게 문제입니다. 결국은 직업언론인이 해결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제가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지금 제일 큰 문제는 한국언론인, 특히 직업언론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이라는 게 뭐냐? 정체성이라는 것은 공인의식에 의해서 어떤 정파나 자기 회사를 편들지 않는 공인으로서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 이념이라든지 정치적 어떤 신념을 가진 것은 불가피하지만 이것을 절대로 논평 이외에 사실보도할 때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미국의 언론책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사실보도는 하나님의 소리다’ 이겁니다. ‘의견보도는 사람의 소리라도 사실보도는 하나님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뭐냐? 신성불가침하다, 이겁니다.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도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제가 예를 들어 놨습니다만 2000년에 워싱턴포스트 편집책임자 레너드 다우니가 워싱턴포스터가 사설로 민주당 후보 지지를 표명했지만 같은 날 자기가 칼럼을 써서 ‘사실과 의견의 분리’로서 ‘내 책임 아래 있는 보도면은 절대로 앨 고어한테 유리하게 쓰지 않는다’고 밝히고 실제로 그렇게 했고, 그 전통이 지금도 지켜지고 있지요. 우리가 의견 쓰는 것하고 사실보도만 구별되어도 그리고 남을 공격하지 않는 것, 또 기사로써 말한다는 것만 되어도 상당할 정도로 순화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방송보도의 중립성’ 이것은 아주 철저히 지켜야 됩니다. 여기 방송국에서 오신 분이 있겠지만, 요새는 제가 딱 단정적으로 얘기는 못하겠습니다만 제가 일본에 있을 때도 보면 NHK 같은 데는 우리 방송처럼 그렇게 안 해요. ‘이것이 되겠습니까?’ 하는 정도의 논평만 합니다. 왜? 전파라는 것은 국가 소유이고 신문처럼 정파성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철학에 기초한 거지요. 그런 점에서 ‘방송의 중립성’ 이것은 우리가 철저하게 보장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다음에 오보나 편향보도와 관련, 우리가 언론윤리규정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강하게 제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등등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관훈클럽이 하는 좋은 사업이니까 관훈클럽에서 지난번 2000년 보고서를 냈듯이 2010년, 즉 내년에 획기적인 좋은 결실을 맺어서 언론인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언론계가 지금 잘못되어 붕괴되고 있거든요. 왜 그러느냐? 다른 시대 같으면 그럭저럭 될지 모르지만 지금 보십시오. 인터넷을 보면 국민기자나 시민기자라는 전혀 직업적 훈련을 안 받은 분들이 막 써댑니다. 그다음에 기자와 전혀 관계없는 전문가들, 학자들, 연구소분들 이런 분들이 아주 훌륭한 분석적인 논설을 많이 써요. 블로거가 많이 나온 거지요. 그러면 직업언론인이 설 땅이 없는 겁니다. 설 땅이 없는 거예요. 기자들이 전문성을 의심받고 또 정파에 속하다 보면 말하자면 통찰력이라든가 경험이 부족하면 우리 사회가 존경하지 않지요. 오늘 이회창이 말한 그런 식으로 매도 대상이 되면 우리는 직업적으로 완전히 허물어지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관훈클럽의 이 좋은 사업을 계기로 해서 무언가 좋은 결론을 냈으면 하는 게 제 희망입니다. 그리고 제 논문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다음은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가 토론회를 위해 미리 준비한 주제발표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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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위기와 직업언론인의 책무〉

남시욱(세종대 석좌교수ㆍ전 문화일보 사장)

 

4대4로 前線 형성한 대치상황

한국언론계가 일찍이 없던 극도의 내부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함께 그 해결책을 시급히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민주주의 보루라는 언론,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여전히 ‘제4부’ 지위에 변함이 없다는 언론이 이처럼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자는 바로 국민이다.

우리 언론계 내부의 대립은 이미 10여년 이상 지속되어 진보­보수 언론 사이에 불신과 증오와 적대감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국언론계는 1987년 민주화 다음해의 한겨레신문 창간을 계기로 이념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겨레는 발간 직후 창간사 등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주민족언론’과 ‘성역 없는 언론자유’, 그리고 ‘대안언론’ 내지 ‘대항언론’을 내걸면서 강력한 민족주의 경향과 진보­좌파 성향1)을 드러냈다. 한겨레가 창간 때부터 여론매체부를 설치하고 주로 보수언론을 비판하는 미디어난을 만든 것은 지금과 같은 언론계 내부의 극단적인 상호 반목을 예고한 것이었다. 한겨레 창간의 핵심멤버들이 동아ㆍ조선 해직기자들이라는 점도 한겨레와 보수신문 간의 극렬한 갈등의 한 요인이 아닌가 한다.

한겨레는 1998년 김대중정부 출범 후에는 완전히 보수언론에 대항하는 이른바 ‘역편향성’을 드러냈으며, 노무현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5월에는 제2창간 선언을 통해 정식으로 ‘진보정론지’를 자임하게 되었다.

한겨레 이외에, 1998년 한화그룹에서 분리되어 사원주주회사로 소유형식이 바뀐 경향신문도 종래의 보수노선을 버리고 우리 사회의 ‘건전한 진보와 개혁세력의 대변지’를 표방했다. 경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는 동안 한겨레에 필적할 진보언론매체가 되었다. 경향의 변신으로 한겨레는 자신의 표현대로 ‘보수의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진보의 섬’ 같은 존재였다가 비로소 우군을 만나게 된다. 서울신문(1998. 11.~2003. 12. 사이의 제호는 대한매일) 역시 친정부신문이라는 숙명 때문에 김ㆍ노 두 정부 아래서 진보논조로 전환, 이른바 ‘조ㆍ중ㆍ동’ 보수 3개지에 대항하는 ‘한ㆍ경ㆍ대’ 진보 3개지 시대를 열었다. 이들 세 진보신문이 출현한 시기를 전후해서 인터넷매체가 쏟아져 나오면서 진보성향의 인터넷신문도 속속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이다.

한국언론계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내부갈등을 나타내기 시작했느냐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김대중정부가 출범한 1998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본격적인 갈등양상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한겨레는 ‘조선 김대중칼럼 네티즌 비판 빗발쳐’ ‘족벌신문 자사이기 너무한다’ 등의 보수언론 공격기사를 연거푸 실었다. 99년부터는 대한매일(서울신문)과 경향신문도 한겨레의 뒤를 따라 미디어난을 만들고 보수언론 비판과 함께 언론개혁을 주장했다.

2001년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도 미디어난을 만들어 이에 대항함으로써 양 진영간에 본격적인 상호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미디어면을 만든 직후 ‘대한매일ㆍ한겨레 앞다퉈 조선ㆍ동아 공격’이라는 기사를 싣고 진보언론에 반격을 가했다. 이 무렵은 90년대에 시작된 시민단체의 안티조선운동이 진보언론의 지원 아래 본격화한 시기였다. 미디어비평이라는 이름의 언론계 내부의 상호비판은 같은 시기에 김대중정부 영향하에 있던 방송도 보수신문 비판에 가세함으로써 열기를 더하게 했다. 그 무렵까지 ‘100분토론’과 ‘PD수첩’을 통해 신문개혁의 필요성을 때때로 강조하던 MBC가 ‘미디어비평’이라는 정규프로를 신설하고, KBS가 ‘시사포커스’의 매체비평 코너를 확대함으로써 언론 상호간의 갈등은 보수언론­진보언론­방송 3자간 이전투구로 확대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진보언론도 그렇지만 특히 방송의 보수신문 비판이 김대중정부의 언론정책과 보조를 맞춰 시작된 점이다. 김대중은 대통령 취임 다음해인 1999년 8월 보수언론 손보기에 나서,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가까웠던 중앙일보 사주 소유의 보광그룹과 자신의 햇볕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세계일보가 속한 통일그룹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중앙일보 사주와 통일그룹 책임자는 탈세혐의로 구속되고, 세계일보 사장은 사직했다. 김대중은 그해 12월 보수언론에 공개적으로 포문을 열었다. 그는 “과거 기득권세력의 저항이 심하다. 특히 정치와 언론이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는 노무현에 앞서 김대중이 보수언론을 반개혁적 수구세력이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한 발언이다. 친정부신문인 서울신문(당시는 대한매일)은 이때 사설을 통해 김대중의 발언에 공감을 표시하고 “개혁을 열망하는 국민이 내년 4월 총선에서 안정 과반수 의석을 확보해줌으로써 대통령이 개혁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보수언론의 비판이 멈추지 않자 그는 2000년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가진 이듬해 1월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곧 대대적인 언론사 세무조사를 단행했다. 세무조사 결과 동아, 조선 2개사에 엄청난 액수의 추징금이 부과되고, 사주는 고발되어 검찰에 구속되었다.

이 무렵 진보­보수 언론간 갈등이 첨예화하기 시작했다. 그해 3월 한겨레는 ‘심층해부 언론권력’이라는 장장 25회에 걸친 3부작 대형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주로 동아와 조선 두 신문을 비판했다. 당시 한겨레의 보수언론 비판은 단순한 논조 비평이 아니었다. 한겨레는 두 언론사의 과거까지 들추면서 이들 신문을 ‘족벌언론’ ‘수구언론’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보수언론들도 한겨레 등 진보매체를 ‘좌파언론’ ‘친북언론’이라고 비난하면서 맞섰다. 이 기획기사를 둘러싸고 한겨레와 동아ㆍ조선 간에 7년간의 법정싸움까지 전개되었다. 이 무렵부터 진보언론은 보수언론 측과 상호 논조 비판이라는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뒤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서로 상대방을 타도하려는 물고 뜯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제 양측 사이에는 언론이 지켜야 할 품위와 절제와 겸양의 정신은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경멸과 적개심으로 가득 찬 이전투구가 벌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2001년을 ‘언론전쟁 발발의 해’로 규정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 10년간 계속된 진보­보수 언론간의 치열한 대결은 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이명박정부 출범 후에도 그치지 않고 있다. 진보언론 측에서는 그전에 없던 일도 일어났다. 2008년의 정권교체로 정부비판언론이 된 한겨레­경향­오마이뉴스­프레시안 4개 진보언론매체가 서로 손잡고 협력관계를 결성, 지난 11월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신당(준비위) 등 4개 야당대표가 참가하는 ‘진보 개혁 연대의 길, 4당 대표에게 묻는다’라는 토론회를 합동으로 개최했다. 이것은 이들 진보매체들이 진보­좌파 정치세력의 연합전선 형성과 내년 지방선거 승리 및 나아가 정권 재창출을 위해 기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언론계의 지형은 이들 4개 진보매체와 보수언론인 조선ㆍ중앙ㆍ동아ㆍ문화 등 4개지가 서로 마주보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명박정부 출범으로 서울신문은 다시 성격이 바뀌어 진보언론진영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어서 종래의 이른바 ‘한ㆍ경ㆍ대’ 연합전선은 붕괴되었다. 서울신문 자리에 좌파정권 아래서 영향력을 키운 두 인터넷매체가 들어선 것이다.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을 옹호했던 두 대표적인 방송매체인 KBS와 MBC는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경영진 교체와 좌파성향 노조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내부갈등을 빚고 있다.

 

언론 망가뜨리는 언론계 내부갈등

언론계 내부갈등으로 인해 언론과 그 수용자인 국민이 입는 피해는 엄청나다. 그 피해란 한마디로 언론의 붕괴 위기이며, 정확한 정보를 공급받아야 할 주권자인 국민은 그만큼 정확한 정보에서 차단되어 오도당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 위험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언론간 무분별한 상호 비방으로 인해 언론 전반의 신뢰도가 추락했다. 2009년의 한국언론재단 조사에 의하면 언론인 자신이 생각하는 국민의 언론신뢰도는 해마다 떨어져 10점 만점에 5점 수준이다. 2)

② 언론내부의 갈등을 정치세력이 이용하거나 언론이 정치세력을 언론내부 싸움에 끌어들임으로써 언론과 정치세력이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결합, 일종의 진영심리에 사로잡혀 서로 감싸고 옹호하는 동맹군처럼 되었다. 그 결과 정당대표가 상대방 주요 언론사를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과거에 없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언론이 이념과 정치의 대리전 무대가 되어 언론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③ 언론과 정치세력의 유착으로 인해 자기 진영에 유리한 기사는 확대하고 불리한 기사는 축소하거나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는 언론의 자기검열이 제도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은 진보­보수 양 언론매체 모두를 보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도록 되었다.

④ 언론의 다양한 관점은 원래 이성적으로 표출되면 국정현안을 비롯한 그 사회의 쟁점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통합을 이끌어내는 순기능을 하지만 언론계 내부의 감정적 대결과 비이성적, 무조건적 자기주장과 이성적 토론의 부재로 인해 오히려 여론을 양분하고 국민의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대의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요소다.

⑤ 언론 내부의 대결심리로 인해 상대방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할 목적의 기사를 쓰려다 보니 진실과 사실의 추구와 검증을 게을리하는 경향이 우리 언론계에 생겨났다.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이 다른 분야의 기사에까지 번져 기사의 왜곡 및 사실과 의견의 혼합이 일상화ㆍ습관화되고 있다. 진보와 보수 양쪽 언론의 미디어비평란에 서로 상대방이 왜곡된 보도를 했다고 비난하는 기사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언론의 이념적 편향보도로 인한 폐해는 과거에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신탁통치관련 보도(1945), 평화의댐 보도(1986), 김일성사망 오보(1986), 이승복소년사건 조작설 허위보도(1995), 미군장갑차교통사고를 계기로 한 촛불시위보도(2002), 노무현 탄핵보도(2004), 광우병 촛불시위 보도(2008), 미디어법안 보도(2009) 등이다. 미디어법안 보도 가운데 헌법재판소 결정에 관한 기사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이념적ㆍ정치적 동기 때문에 사실보도보다는 주장이 앞서 진실 추구와 검증을 게을리하는 경향을 보여준 예가 아닌가 한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7월 국회에서 변칙통과된 미디어법안은 10월 29일 헌법재판소의 최종판단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썽이 나고 있다. 헌재는 야4당이 제기한 권한쟁의심판청구 심판에서 국회의장이 야당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했다고 인정하면서도 법안선포를 무효로 하라는 청구는 기각하는 결정을 내렸으나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정확하지 않은 보도가 한몫하고 있다. 야당은 헌재 결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에서 법안 재심의를 주장해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길거리에서는 반대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일부 언론이 미디어법안에 극력 반대하는 것은 자유라고 치더라도 보도만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 일부 신문과 방송매체들은 헌재가 미디어법안 통과절차에 위법이 있었다고 인정하고도 국회의장의 법안가결선언은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판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헌재는 국민들의 불신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 일부 언론에 의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 언론은 또 사설을 통해 헌재 결정은 국회가 다시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뜻이라고 주장하면서 정부와 한나라당이 야당의 법안 재심의 요구를 묵살한 것을 ‘뻔뻔스럽고 오만한 태도’라고 질타했다. 이 사설은 위법하게 처리된 미디어법안이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언론매체의 주장은 헌재의 권위를 깎아내려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위험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권자인 국민을 오도해 민주주의를 해치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헌재 결정의 진상은 무엇인가. 헌재 결정에 대한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는 헌재의 정확한 결정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어떤 목적을 위해 고의로 왜곡한 데서 빚어졌다고밖에 볼 수 없다. 헌재 재판관들의 합의방식은 국회가 다수결원칙에 따라 결의하듯 재판관의 다수의견으로 판결하는 방식이다. 헌재는 민주당 등 4개 야당이 낸 권한쟁의심판청구에서 국회의장의 미디어법안 가결선포행위가 야당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했느냐는 점에 대해 신문법안의 경우는 7대2, 방송법안의 경우는 6대3으로 그렇다고 인정했다. 헌재는 그러나 국회의장의 법안가결선포행위가 무효임을 확인해 달라는 청구에 대해서는 거꾸로 신문법안은 6대3, 방송법안은 7대2로 국회의장 측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헌재가 이들 미디어법안 가결선포를 무효로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다수의견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당연한 판결로, 하등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법안가결선포를 무효로 할 수 없다는 재판관들의 이유는 각각 다르다.

신문법안의 경우 원래부터 야당의원의 권한이 침해당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침해를 전제로 한 무효 심판청구는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2명), 국회의 입법에 관한 자율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헌법재판소는 원칙적으로 처분의 권한 침해만 확인하고 위헌ㆍ위법 상태의 시정은 국회의장에게 맡겨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2명), 헌재가 가결선포행위 자체의 무효확인을 할 경우 이는 실질적으로 법률에 대해 무효선언을 하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가결선포행위 효력에 대한 사후의 조치는 오직 국회의 자율적 의사결정에 의해 해결할 영역에 속하므로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해야 한다는 의견(1명), 국회의원들의 권한이 침해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입법절차에 관한 헌법 규정을 명백히 위반한 흠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가결선포행위를 무효로 볼 것은 아니라는 의견(1명)이다.

방송법안의 경우를 보면 원래부터 야당의원의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침해를 전제로 하는 무효청구는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3명), 야당의원의 권한침해 정도가 법안통과를 무효로 할 정도가 아니며, 법안이 압도적 다수로 통과되었고 야당의원들의 의사방해행위가 이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의견(3명), 일부 과정의 하자가 법안을 무효로 할 정도가 아니라는 의견(1명)이다.

이유는 각각 다르지만 법안통과를 무효로 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이 대목은 기이하게도 많은 언론매체가 보도하지 않아 일반국민은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지만 이 내용을 보면 헌재 결정에 모순이 있다는 일부 언론과 야당의 주장이 억지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는 헌재의 결정은 국회에서 법안을 재심의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같은 당내 일부에서는 “헌재 결정문을 분석해보면 재판관 9명 가운데 적어도 6명은 국회의장이나 국회가 이 문제를 시정해야 한다고 한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재판관 9명 가운데 신문법안에 대해 무효로 할 수 없다는 6명 중 3명만 시정문제는 국회의 자율에 맡기자는 의견이었고, 방송법안에 대해서는 무효로 할 수 없다는 7명 중 국회에 시정 여부를 맡기자는 재판관은 없었다. 따라서 헌재의 결정이 국회에서 미디어법안을 다시 심의하라는 뜻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한국언론 내부갈등의 대표적 사례와 원인

그렇다면 언론계 내부의 반목과 갈등을 시정하고 한국언론을 바로 세우는 길은 무엇인가. 무릇 사태해결을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앞서야 할 것이다. 한국언론계가 이렇게 된 데는 외부적 환경요인과 내부적 요인이 있다. 앞서 언급한 우리 사회의 격렬한 이념대립과 정치적 분열이 외부적 환경요인이라면, 언론사의 자사이기주의와 언론인들의 정치오염과 직업윤리 및 직무수행능력 저하가 내부요인이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언론계 갈등의 주된 원인인 이념대립과 정치적 분열, 그리고 언론사들의 상대방 타도 시도와 자사이기주의에 대해서는 간단히 살펴보고, 본고의 주목적인 한국언론인의 직업윤리 및 직무수행능력 저하 문제 그리고 정치오염 문제를 주로 다루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언론계의 갈등해소 문제는 외부환경요인 개선도 있어야겠지만 결국은 기사를 직접 쓰는 인론인, 즉 언론을 생업으로 하는 직업언론인에게 달렸다. 우선 외부 이념대립 상황을 살펴보자.

 

1) 이념대립

진보신문과 보수신문이 이념갈등을 빚은 최대원인은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과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극한적 이념대립이 언론에도 확산된 데 있다. 김대중은 초당적으로 추진해야 할 대북정책을 당리당략 때문에 일방적으로, 그리고 비밀리에 밀어붙여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정상회담 결과 발표된 6ㆍ15공동선언 가운데 통일조항은 국론을 크게 분열시켜 우리 사회 좌우갈등에 불을 붙인 기폭제였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통일방안 접근이 획기적이라고 호의적으로 논평했다. 한겨레는 남쪽의 연합제안과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사이의 공통점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한 것은 남북이 평화통일을 실현할 것임을 밝힌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통일방안과 관련해 다소 모호한 개념을 확실히 조율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동아ㆍ조선 등 보수언론은 사설을 통해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대해 그것이 우리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배치되는 김일성의 연방제방안이 아닌가 의구심을 표시하고, 통일방안 수립은 무엇보다 우리 내부의 동의를 바탕으로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극단적인 갈등과 오해가 생겨 국론분열의 원인이 될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고 주문했다.

문제는 양측이 햇볕정책을 둘러싸고 정부정책을 비판하거나 지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상치되는 상대방 언론의 보도와 논평을 공격하기 시작한 데 있었다. 이념대립 때문에 진보와 보수언론이 공방전을 보인 사례는 부지기수지만, 한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2001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국군의날 기념사에서 6ㆍ25가 무력에 의한 통일시도라고 언급한 것을 한나라당 안택수ㆍ김용갑 두 의원이 그를 친북세력이라면서 사퇴를 주장한 데 대해 조선ㆍ동아 등 보수언론이 크게 보도하자 경향신문은 이를 ‘극우적 편향보도’라고 비난했다. 또한 경향은 북한 측이 이 무렵 돌연 ‘안전상의 이유’라는 석연치 않은 구실로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무기연기한 것을 보수언론이 비판하자 “평소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에 불만을 품어왔던 일부 ‘수구언론들’에게 결정적인 호기를 제공했다”고 비난했다. (2001. 10. 17)

이 무렵 〈KBS노보〉(2001. 6. 27)가 언론사 세무조사 보도와 관련해 동아ㆍ조선ㆍ중앙일보를 ‘수구언론’, KBS 등 공영방송을 ‘주구언론’,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일부 신문을 ‘변두리언론’ 또는 ‘들러리언론’으로 표현한 글을 실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당시 KBS와 MBC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진보신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수신문을 매도함으로써 그해 8월 개최된 국회 언론발전연구회(회장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 주최 ‘방송의 공공성과 방송법 개정방향’ 토론회에서 주제발표자인 외국어대 김우룡 교수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방송사들은 윤리강령을 스스로 만들었으나 지키지 않고 있다. 특히 공영매체인 방송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 대해 수구언론, 족벌언론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편견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말은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

2001년 8월 평양에서 열린 통일대축전 참석 대표단의 일원으로 갔다가 김일성 생가를 방문하고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운운하는 글귀를 남겨 말썽이 난 강정구 동국대 교수 사건에 대해 동아일보는 우리 대북정책과 민간 통일운동의 난맥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사퇴를 포함해 정부는 이번 사태에 책임지는 행동을 보이라고 촉구했다. 반면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강정구의 행동이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지만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고 또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것은 남북간 화해ㆍ협력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겨레는 나중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강정구도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라고 옹호했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한총련 불법화 문제는 김대중정부 초기부터 진보­보수 언론 사이에 첨예한 대립을 보인 문제였다. 한겨레는 기회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보안법 폐지와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을 철회할 것을 주장한 데 반해 보수언론은 이를 반대했다. 제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2002년 조선일보가 사내에 후보검증위원회를 만들어 노무현 등 후보에 대한 검증을 하자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후보검증 나선 언론을 검증할 때”라고 비난, 상호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한겨레는 후보검증에 나선 언론이 지금까지 대통령선거에서 ‘신문권력’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편파적 보도를 해왔다고 주장하고 후보검증을 명분으로 색깔론을 펴거나 지역감정을 부추기지 않을지 언론계 안팎에서 우려가 높다고 주장했다.

진보언론은 노무현정부 아래서는 이라크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보수언론과 맞섰다. 또한 외교문제는 아니지만 2003년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송두율 교수 사건은 언론계를 양파로 분열시켰다.3)  그의 귀국에 맞춰 2003년 9월 27일 KBS­1TV가 ‘한국사회를 말한다-귀향, 돌아온 망명객들’ 편에서 송두율을 해외 민주투사로 미화하자 조선ㆍ동아 등 보수언론은 KBS의 편향된 제작태도를 문제 삼은 논설과 칼럼을 개재했다. 이에 대해 KBS노조를 비롯한 17개 진보시민단체는 서울 프레스센터에 모여 ‘한나라당과 보수언론 KBS 색깔공세 중단촉구 대회 겸 공동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송두율씨 사건을 빌미로 KBS에 가해지는 이념공세는 내년 총선을 겨냥한 KBS 길들이기 전략”이라면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노무현이 한미FTA와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을 때부터 그에게 비판적이었던 진보언론은 임기 말인 2007년 여름 노무현이 기자실을 통폐합하는 언론통제책을 강행하자 이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노무현은 이 무렵 경제정책 실패와 부동산가격 폭등, 소득 양극화 등 다른 문제와도 겹쳐 인기가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진보언론과 진보적 지식인들마저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해 8월 31일 여의도에서 개최된 한국프로듀서연합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한 노무현은 진보언론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언론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청산하려 했더니 편을 갈라 싸우던 언론이 모두 나의 적이 되어, 이전에는 나의 편이 되었던 소위 진보적 언론도 일색으로 나를 조진다.”

이에 대한 진보언론 측의 반응이 흥미롭다. 경향신문은 9월 3일자 ‘진보언론은 대통령을 편들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경향신문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학법 개정 등의 사안을 적극 지지했던 것은 그 정책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더욱 앞당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경향은 또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를 강력히 반대한 것은 그것이 명분 없는 침략전쟁의 들러리이자 민중의 생존권을 침탈하는 것이었기 때문으로, 노무현정부의 정책에 대해 사안별로 분명한 입장을 밝혔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경향이 이른바 취재시스템 선진화 방안, 즉 기자실 통폐합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선진화는커녕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 봉쇄하는 반언론적 조처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이것을 가지고 “언론의 특권을 박탈하려 하자 반발한다”고 말하는 것은 심각한 왜곡이자 언어도단이라고 통박했다. 그리고 사설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임기 말 대통령이 국정의 마무리는커녕 잘못된 현실인식으로 자꾸만 혼자만의 성(城)을 쌓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 정치적 분열

보수­진보언론의 대립과 갈등은 국내 정치문제를 둘러싸고 빈번히 일어나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에는 진보언론이 친정부적 언론이 되고, 이명박정부 들어서는 보수언론이 친정부적 언론이 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양측은 서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을 무조건 비호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언론이 정치세력의 편을 들어 동맹관계, 즉 정언유착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념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내정치 문제에서도 자기편과 다른 보도를 하는 상대방 언론을 공격하는 것이 일상화된 데 있다. 한겨레는 강정구 교수의 맥아더동상 철거 주장 논문이 문제가 되어 검찰이 그를 구속수사하려 하자 천정배 법무장관이 이를 막기 위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검찰총장이 사퇴하는 파동이 일어났을 때 ‘검찰,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자’라는 사설(2005. 10. 11)에서 보수언론의 보도와 논평을 비난했다. 이 사설은 “한나라당이나 일부 수구언론도 천 장관에 대한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공세를 접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보수정권이 출범한 뒤인 작년 5월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관련 촛불시위의 경우는 한국언론이 거의 붕괴상태임을 보여준 사례였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상황에 대해 진보언론은 경찰의 강경진압작전만 부각시키고 보수언론은 시위대의 폭력행위만 부각시켜 독자가 그 유혈사태의 진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진보언론은 시민들에게 촛불시위에 참여하도록 은근히 선동하는 기사를 쓰고 보수언론은 폭력집회를 우려하는 보도를 계속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위참여에 대해서도 진보언론은 ‘서울광장서 무기한 단식ㆍ미사’ 기사에서 “천주교 사제단이 대규모 미사를 연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처음”이라고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대해 보수언론은 “정의구현사제단은 공식기구 아닌 내부모임”이라는 기사로 사제단을 깎아내리고 시위참여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나중에 동아는 경향ㆍ한겨레 등이 반정부 선동을 했다고, 경향은 동아가 정권편향적이라고 서로를 몰아세우는 이전투구 사태로 발전했다.

보수언론이 MBC ‘PD수첩’을 비판하자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조ㆍ중ㆍ동의 비난은 지나칠 뿐 아니라 터무니없다”고 주장하고 한나라당의 비판에 대해서도 “조ㆍ중ㆍ동의 집단폭력에 손을 빌려준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MBC의 프로그램 번역을 맡은 정지민의 글을 인용하면서 한겨레와 경향 등 진보언론의 보도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경향은 일부 시민단체가 보수언론에 대해 광고중단 캠페인을 벌이자 이를 비판하는 보수언론에 대해 ‘조중동답다’라는 제목의 시론을 실었다. 이 글은 “광고중단 압박으로 위기를 맞고 있으니 너희도 당해보라는 식의 태도는 치졸한 보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놈현스럽다’는 신조어 등장을 씁쓰레 받아들여야 했던 국민들에게 ‘조중동답다(현실을 외면하더니 결국 최악의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는 말까지 추가시킬지 지켜볼 일”이라고 주장했다.

2009년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게 되자 진보언론도 보수언론 못지않게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겨레는 ‘노 전 대통령 주변의 추한 모습’이라는 사설과 ‘밝혀야 할 수백만 달러의 대가’라는 사설을 쓰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한겨레는 권양숙 여사가 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자 ‘노 전 대통령, 국민 가슴에 대못 박았다’라는 사설에서 “그는 한 오라기의 진정성도 인정받을 수 없었다”고 비난했다. 한겨레는 며칠 후 ‘검찰에 앞서 국민에게 고해성사하라’는 사설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보이는 태도는 구차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다”고 맹비난했다. 경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백, 국민은 참담하다’는 사설을 쓰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경향의 이대근 정치ㆍ국제에디터는 ‘굿바이 노무현’이라는 칼럼에서 “노무현 당선은 재앙의 시작이었다고 해야 옳다. 이제 그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이 뿌린 환멸의 씨앗을 모두 거두어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라고 지탄했다.

그러나 막상 노무현이 봉화마을 뒷산 절벽에서 투신자살하고 그를 애도하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검찰과 언론의 책임론이 제기되자 진보언론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한겨레와 경향은 그를 추모하는 기사로 지면을 채우고 사설을 통해 그에 대한 정치보복설과 그의 공적을 크게 부각시켰다. 한겨레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함’이라는 사설과 ‘처음부터 정치보복 냄새 진동했던 노무현사건’이라는 사설에서 검찰을 비난했다. 경향 역시 ‘다시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사설에서 “끝없이 이어진 추모행렬은 인권과 민주주의, 권위주의 타파,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을 위해 헌신해온 고인의 삶을 되새기며 애도했다”고 그를 찬양했다.

노무현의 국민장이 끝나자 두 신문은 사과성 사설을 썼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한겨레도 이번 사태와 관련해 책임론을 무겁게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각오로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경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며’라는 사설에서 “고인은 검찰의 언론플레이만으로 ‘640만 달러짜리 서민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경향신문도 그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을 겸허하게 새기고자 한다”고 다짐했다.

노무현 국민장이 끝나자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공방이 또 벌어졌다. 조선ㆍ동아는 먼저 ‘땅에 떨어진 노무현의 청렴성’을 비난하던 KBSㆍMBC가 그의 자살 이후에는 그를 미화했다고 비판하고, 노무현의 고해성사와 석고대죄를 외치던 한겨레ㆍ경향이 정치적 타살이라고 주장한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비난했다. 동아는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노무현 서거 전에 ‘국민 가슴에 대못’ ‘위선 보는 것 같아 말문 막혀’ 등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를 질타했기 때문에 서거의 책임이 있음에도 연일 보수신문의 잘못만 부각시킨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진보언론은 반격을 가하고 나왔다.

경향은 ‘비판과 저주의 차이’라는 사설에서 참여정부 비판과 노 전 대통령 재조명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반박하고 보수신문의 비판은 불매운동과 미디어법안 처리 차질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보도면에서 ‘비판 대신 증오… 죽은 권력 물어뜯기’라고 평가하면서 서거의 책임이 보수언론에 있다고 반격했다. 한겨레는 보수지들이 ‘증오 저널리즘’에 가까운 양태를 보였고, 취재보도의 기본원칙을 제대로 지켰는지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확실히, 노무현 수사과정에서 보수신문들이 너무 앞질러 보도한 잘못을 저지른 사실과 노무현 추모행렬에 갑자기 태도를 바꾼 진보언론의 지나친 노무현 미화보도는 국민을 오도한 과오로 비판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체들의 정치적 편향 때문에 빚어진 현상 하나가 언론매체의 정파성으로 인해 선거 때 자기 진영 후보를 기사를 통해 교묘하게 지지하는 관행이다. 또 다른 문제는, 언론매체가 평시에도 정파성 때문에 보도가치가 있는 기사를 고의적으로 누락하거나 축소보도하는 현상이다. 예컨대 보수지는 진보ㆍ좌파 정당의 움직임을 비판적인 기사 이외에는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진보지는 우파정당의 움직임을 역시 비판적 내용 이외에는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 이로 인한 독자들의 피해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3) 상대방 타도 시도와 자사이기주의

2000년 이후의 보수­진보 매체간 갈등은 단순한 논조의 싸움이 아니라 상대방을 타도 내지 무력화하려는 의도도 엿보였다.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01년 3월 한겨레의 ‘심층해부 언론권력’ 시리즈는 단순한 보수언론의 논조 비판이 아니다. 한겨레는 동아ㆍ조선의 과거까지 들추면서 이들 신문을 공격했다. 한겨레는 그해 5월 ‘수구언론 비판한 노무현씨의 용기’라는 사설(2001. 5. 24)에서 그가 “수구언론을 그냥 두고서는 한국사회를 개혁할 수 없다”면서 “정치인도 시민단체ㆍ대안언론 등과 손잡고 수구언론의 무한권력을 고쳐야 한다”고 말한 것을 극구 칭찬했다. 사설은 이어 “거대한 언론권력이 된 조선일보 등 족벌신문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구언론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고 찬양하면서 “노무현 고문의 표현대로 ‘반독재투쟁을 하던 생각으로’ 수구언론 극복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단순히 상대방의 논조를 비판하는 선의의 경쟁 차원을 넘어 특정 보수언론사 자체를 타도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는 상대방을 타도해 자신에게 유리한 신문시장 개편을 노리는 자사이기주의도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한겨레는 2002년 12월 25일자에 언론개혁시민연대 집행위원장인 김동민 한일장신대 교수가 신문시장 재편을 주장한 주목할 만한 칼럼을 실었다. 그는 “현재의 (조선ㆍ중앙ㆍ동아 3대 보수지 전체 점유율;필자 주) 75%를 35%로 낮추어 그 빈자리(즉, 40%;필자 주)는 한겨레나 한국, 경향, 대한매일, 문화 등 비교적 공정보도의 원칙을 지키는 젊은 신문들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3년 5월 3일 노사모 대표 명계남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조선일보를 언론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하고 조폭언론(조선)을 언론계에서 퇴출시키겠다고 선언했으며, 안티조선운동의 선봉장인 영화배우 문성근은 노무현 후보의 민주당 경선 당선 축하모임에서 “앞으로 대선 본선과정에서 조선ㆍ동아일보 구독부수를 50만~100만부는 떨어뜨려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자사이기주의에서 비롯된 언론계 내부갈등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앞서 설명한 대로 헌법재판소에까지 간 미디어법안을 둘러싼 보수언론­방송 간, 그리고 진보­보수언론 간 대립일 것이다. 신문과 대기업의 방송진출을 국가적 차원에서 논하기보다는 자사의 이해관계에 입각해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보도와 논평으로 시종했다. 보수언론은 한목소리로 미디어법안 저지를 위한 MBC와 전국언론노조의 총파업을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냈고, 보수적인 방송이 나올 경우 타격을 우려한 MBC는 뉴스와 해설 프로를 통해 연일 ‘조중동ㆍ재벌 방송’이 여론을 독점하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갈등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차분한 객관적 토의보다는 감정적인 상호 비난이 신문지면과 스크린을 장식했다.

 

최종적으로는 직업언론인들의 책임이다

이상, 우리는 한국언론계 내부갈등의 원인과 양상,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우리 언론을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대충 살펴보았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결국 언론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언론계 내부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언론을 망가뜨리는 행위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언론에 종사하고 있는 직업언론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직업언론인들이 언론계 내부갈등과 언론파괴의 책임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왜 한국언론인들이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 그 원인을 성찰해보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한국 직업언론인들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책임과 임무를 지고 있는가도 검토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선 직업언론인들이 가져야 할 투철한 직업의식과 직업윤리의식 저하를 들 수 있다. 언론인은 무대 위에 선 플레이어(연기자)가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무대를 지켜보는 관찰자라는 점을 망각하고 이념투쟁이나 정치투쟁을 하는 기분으로 기사를 쓰거나 프로그램을 제작하다 보니 편파ㆍ왜곡보도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인이 전문직이냐, 유사전문직이냐는 논의도 있지만 여하간 전문직을 지향하는 직업언론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책임의식 저하는 한국언론인에게 가장 큰 위기다. 최근의 세계적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한국언론인들의 생활은 타 분야에 비해 어려운 점이 많다. 언론사의 경영위기와 좋지 않은 보수, 국민들의 언론인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도 추락, 장시간 근무로 인한 과로와 직업적 스트레스, 낮아진 직업만족도와 장래에 대한 회의감이 모두 직업적 자긍심을 떨어뜨리는 요인들이다.

언론인의 이직, 특히 정계나 관계 진출은 이상과 같은 직업언론인들의 사기저하에서 비롯된 전직의 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언론계 내부분열로 인한 언론과 정치의 결합과도 관련이 깊지 않나 싶다. 언론인의 정계진출은 국회의원의 경우 제15대 총선(1996년)에서 32명, 제16대(2000년) 44명, 제17대(2004년) 42명, 제18대(2008년) 39명으로 정치인과 법조인 다음으로 많다. 제18대의 경우 공천을 신청한 언론인(16∼17대 국회의원 경험자 제외)은 한나라당 77명, 통합민주당 34명에 이르는 다수여서 화제가 되었다. 주목할 사실은 과거에는 언론인이 특정정당으로부터 영입교섭을 받으면 한참 고민하다가 결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제17대부터는 자진해서 공천을 신청한 언론인 수가 많아진 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사명감이 투철한 직업언론인 모임으로 출발한 관훈클럽이 1957년 1월 창립 당시 ‘신문계에 평생 투족할 뚜렷한 목적의식의 소지자’를 회원자격으로 한 점이다. 이에 비하면 요즘은 언론인들의 의식이 크게 변했다. 일선기자 중 언론사 퇴직 후 일정기간의 유예기간을 둔 다음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무방하다는 응답이 중앙일간지 기자의 경우 57.8%이고, 현직에서 당장 정계에 입문해도 무방하다는 응답이 22.2%인 데 반해 정계진출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응답은 불과 11.3%다.4)

한국언론의 질적 저하는 재교육과 훈련 부족에도 큰 원인이 있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결성된 언론노조의 과격투쟁과 이에 영합하는 경영진과 편집­보도 간부들의 무책임성에서 비롯된 기강 해이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편집국장 선거제도나 임명동의 제도는 언론사의 기강을 흐트러뜨리고 간부들의 지휘감독권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기사의 게이트키핑 기능을 하는 데스크 작업이 소홀해지고, 허위보도 등 잘못을 저지른 기자에 대한 징계조치가 어려워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풍토가 자그마치 20년 이상 누적되었으니 함량이 부족한 기사, 요건을 갖추지 못한 기사, 사실을 왜곡한 기사, 의견을 내세운 부실한 기사들이 충분한 게이트키핑 과정 없이 그대로 보도되었다. 노무현 탄핵소추 당시 이를 좌절시킬 목적의 KBS의 장시간 선동방송과 작년 광우병 파동을 몰고 오는 데 한몫 단단히 한 MBC의 편파적인 ‘PD수첩’이 그 대표적인 예다.

또한 언론인의 샐러리맨 경향 심화로 자신이 소속된 언론사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숨기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기사나 논평을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회사에 충성하기 때문에 자사이기주의적 기사가 범람한다. 언론사는 비록 사기업이지만 여기에서 일하는 언론인은 공익의 입장에서 독자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사회를 선도해야 하는 공인이라는 점을 잊어버리는 것은 직업언론인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언론인이 소속한 언론사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할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흐지부지되었지만 1970년대에 서독을 비롯한 유럽 일부 국가의 언론사와 기자측 사이에 체결한 편집규약에는 회사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의 보도에 대해서는 편집책임자가 발행인과 협의하도록 한 규정이 있었다. 언론인은 어느 나라에서건 결코 진공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어느 경우에도 언론윤리를 어기면서까지 소속회사에 충성하는 것은 직업언론인의 양심을 저버리는 것이다.

오늘 세미나는 한국언론의 내부갈등을 치유하고 양측간 벽을 허무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인 만큼, 결론으로 직업언론인들이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몇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볼까 한다.

 

① 한국언론인의 직업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최선결 과제다. 오늘의 언론인은 구한말시대 같은 지사형 언론인이나 미디어혁명으로 대거 등장한 아마추어 언론인과는 다른 직업언론인이다. 무엇보다도 직업언론인이 독립적 위치를 되찾고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무장해야 비로소 한국언론의 르네상스가 가능하다. 한국언론은 언론자유는 누리지만 언론의 독립성은 위기에 처해 있다. 언론이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언론인은 공공의 이익을 수호한다는 의식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직무수행을 위해 전문지식을 익혀야 한다.

② 직업언론인도 이념과 정치적 신념을 가지는 것은 불가피하고 당연하다. 그러나 정치인을 비롯한 다른 직업인과 달리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반도는 세계의 마지막 냉전지역이자 분단국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격렬한 좌우이념 대결이 언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선진국에서는 이미 그런 좌우이념 대립구도는 끝이 났다. 선진국형 보수­진보체제에서는 이념문제가 사회체제 변혁보다는 복지ㆍ환경 등 국민생활 문제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앞으로 현재와 같은 분단상태에서의 좌우갈등 양상은 완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③ 언론매체가 정파성을 띠고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한국 신문의 경우 신문윤리강령에서도 허용하고 있는 일이지만, 보도와 논평의 엄격한 분리가 요구된다. 2000년 10월 워싱턴포스트가 사설로 민주당 앨 고어 후보 지지를 표명하자 편집책임자 레너드 다우니는 같은 날 자신의 칼럼에서 자기 책임 아래 있는 보도면에서는 그를 상대방 후보보다 유리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사실을 참고해야 한다.

④ 한국언론계는 편파적이고 왜곡된 보도를 언론인의 반윤리적 행위로 규정하고 제재해야 한다. 직업언론인은 철저한 검증을 통해 사실의 전모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보도하고 사실보도와 의견을 엄격히 분리하도록 한 윤리강령을 준수해야 한다. 논평은 절제를 갖추어야 하고 선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비판적인 논평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상대방 면전에서 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써야 한다.

⑤ 방송보도의 중립성을 담보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전파는 국가의 자산이므로 이를 이용해서 특정 정치세력이나 경제ㆍ사회ㆍ노동단체 등의 이익에 봉사하는 보도나 논평을 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사실보도와 의견의 혼합을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 방송심의 기능을 강화해서 방송의 중립의무를 위반한 경우 그 책임자를 엄중히 제재해야 한다.

⑥ 신문, 방송, 인터넷 등 모든 매체의 미디어비평란의 내용과 편집방향을 개선해야 한다. 미디어난은 비판 위주로 하지 말고 뉴스도 중요시하되, 상대방 매체의 움직임도 보도해야 한다. 언론계 이념갈등이 본격화한 2001년 실시된 한국언론재단의 조사에 의하면 일선 언론인 가운데 언론사의 미디어비판에 대해 “자사이기주의와 상대 언론사에 대한 일방적 비방이 큰 문제점”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63.0%에 달했다. 이 밖의 미디어비판 문제로는 동종업종간 연대의식 팽배(15.9%), 공정성과 신뢰성 결여 및 정치세력 개입(15.2%), 전문성 결여와 감정적 접근(13.8%) 등으로 나타났다.5)

⑦ 기자는 기사로써 말하라. 자신이 믿는 바를 기사로 쓰되, 자신과 이념이나 정치적 소신이 다른 상대방 매체의 보도나 논평 내용에 시비 걸지 마라.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비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훼손하며 궁극적으로는 상대방에게 보장된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즉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언론인의 편견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취재와 보도 때 작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편견을 최대한 관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⑧ 우리 사회 내부의 이념갈등이 빚는 인터넷매체의 악성댓글로부터 보도와 논평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댓글은 실명제로 한다. 실명제가 언론탄압이라는 일부 주장은 무책임한 상업주의적 주장이다. 익명의 악성댓글이 국민정신을 좀먹고 있다. 실명제는 저급하고 악질적인 악플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⑨ 신문윤리강령과 방송윤리강령을 비롯한 각종 언론윤리강령을 현실에 맞도록 보완하는 것이 좋겠지만 시기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윤리위원회와 방송심의위원회에서 심의를 강화해야 한다.

 

〈참고자료〉

남시욱(2009), “언론의 이념적 편향보도행태 진단:한국사회의 보수­진보 갈등을 중심으로”(서울언론인클럽 세미나 발제문).

이원섭(2007), “노무현정부 시기 남북문제에 대한 언론보도 분석:조선ㆍ중앙ㆍ동아일보와 한겨레ㆍ경향ㆍ서울신문 사설을 중심으로”, 서강대 동아연구소, 〈동아연구〉 52집(2007. 2), pp. 325, 366.

이인우ㆍ심산(1998),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한겨레 10년의 이야기〉, 한겨레신문사.

정진석(1996), 〈언론한국인물사〉, 나남출판사.

최준(1990), 〈신보판 한국신문사〉, 일조각.

한겨레신문사(1989), 〈한겨레논단①, 88. 5. 19~89. 6. 14〉

한국언론재단(2001), 〈한국의 언론인 2001:제7회 전국 신문ㆍ방송ㆍ통신기자 의식조사〉.

한국언론재단(2009), 〈한국의 언론인 2009:제11회 기자 의식조사〉.

Kovach, Bill and Tom Rosenstiel(2007), The Elements of Journalism:What Newspeople Should Know and the Public Should Expect, Completely Updated and Revised, New York:Three River Press. [이 책의 번역판은 2009년 이재경 교수(이화여대)에 의해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언론재단에서 발간되었다.

 

각주

1) 창간한 해인 1988년 9월 15일자 리영희의 “새는 ‘좌ㆍ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칼럼은 초기 한겨레의 좌파 성향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기사다.

2) 2009년 조사에서 기자들이 생각하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매체에 대한 전반적 국민신뢰도는 각각 5.87과 5.64점(10점 만점)이다. 한국언론재단(2009), 〈한국의 언론인 2009-제11회 기자의식조사〉, p. 21.

­­­­­­­­­­­­­­­­­­­­­­­­­­­­­­­3) 이원섭 교수(경원대)는 노무현정부 아래서 진보­보수 양측 언론이 대립한 이념문제를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 노무현의 평화번영정책 천명, 대북송금 특검, 노무현 첫 방미, 송두율 교수 사건, 이라크 파병, 평택 주한미군기지, 북한선박 북방한계선 침범사건, 국가보안법 개폐 추진, 정동영 평양방문, 강정구 교수 사건, 6자회담의 9ㆍ19선언, 북한 미사일 발사, 작통권 환수 문제, 북핵실험 등 15개 항목으로 분류, 자세히 고찰함으로써 많은 유익한 참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4) 한국언론재단(2009), p. 119.

5) 한국언론재단(2001), 〈한국의 언론인 2001:제7회 신문ㆍ방송ㆍ통신기자 의식조사〉, p. 158.

 

이목희:감사합니다. 연구를 열심히 하셔서 원고를 많이 쓰셨는데 발표는 짧게 하라고 부탁드릴 수밖에 없어 죄송스럽네요. 그런데 논문 원고와 속기록은 〈관훈저널〉에 실리고 관훈클럽 홈페이지에도 올립니다. 우리 회원분들한테는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또 MBC 뉴스사이트(http://news.imbc.com)에서 녹화중계한다니까 다양하게 알려질 겁니다. 현역기자들은 바쁜 시간이라서 많이 오지 못했지만 어떤 경로로든지 후배들한테도 많이 알려질 겁니다. 정말 남시욱 선배님께서 언론계 갈등 현황과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하시고 최종적으로 직업언론인들이 정신 차리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저부터 굉장히 반성하면서 받아들이고 후배나 동료들한테도 많이 전달하겠습니다. 그러면 김민환 교수님 발표하시지요.

 

김민환(고려대 언론학부 교수):예, 김민환입니다. 앉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에 존경하는 조용중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원로언론인 여러분 그리고 학계에서도 안광식 선생님을 비롯해서 여러 분들이 많이 나오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발표하는 게 영광스럽기도 하고, 또 ‘허튼소리하는 거 아닌가’ 겁도 나고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 막 들어서자 문창극 이사장께서 ‘발표할 군번이 아닌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만 이목희 총무가 발표 안 하면 마치 이 시대의 사명을 저버리는 사람처럼 그렇게 몰아붙여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잘 나왔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내년 8월에 정년을 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꽤 어른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오니까 ‘젊은 게 아니라 어리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어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준 언론계 선배님 여러분께 정말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론계에서 서로 싸우는 거 언론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동아일보 계시다가 조선일보로 옮기셔서 편집국장 하셨던 하몽 이상엽 선생과 동아일보 설인식 선생 두 분이 싸운 얘기를 듣고 혼자 참 많이 웃은 적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오니까 호외 내기 경쟁을 하는데 호외 내용이야 빤하지 않습니까? 이쪽에서 호외를 내면 저쪽에서도 내고, 계속해서 그런 싸움을 벌이는데 정전이 됐답니다. 그러니까 호외를 못 내게 된 거죠. 그런데 하몽 이상엽 선생님이 계시던 조선일보에서 호외가 나왔습니다. 그 양반은 혹시 몰라서 발동기를 옆에다 놔두고 계셨다가 정전이 되니까 그것을 돌려서 호외를 찍은 겁니다. 그래서 설인식 선생이 치밀하지 못한 걸 한탄하면서 땅을 치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통곡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늘 그런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경쟁사간에 경쟁의식을 갖고 다투고 하는 건 언론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경쟁을 통해서 독자에게 보답하고 그래야겠죠.

그런데 요즘 싸움은 좀 질이 다릅니다. 그전에는 경쟁사끼리 했다면 요즘은 진영이 있습니다. ‘좌파, 우파’ 이런 식으로 진영이 있어요. 옛날 신문은 ‘불편부당’을 내걸었지 않습니까? 불편부당이 사시라고 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거 다 걷어치우고 진보나 보수 어느 한쪽에 딱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싸웁니다. 그런데 싸움이 좀 심합니다. 가령 이에 앞서 어떤 분이 세미나 할 때 광동제약 광고문제 가지고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거 하면 안 되죠. 광동제약에 광고 줬다고 뭐라고 하는 건 실정법에 어긋나고, 이런 걸 떠나서 언론의 존립기반 자체를 스스로 허무는 거 아니겠습니까? MBC도 마찬가지입니다. MBC가 PD수첩 했다고 그래서 검찰이 압수수색하려고 했습니다. 압수수색, MBC로서는 그거 거부해야죠. 미국에서 ‘목숨은 내놓더라도 기자수첩은 내놓지 마라’는 게 있는데 이건 철칙입니다. 왜냐? 취재원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문은 MBC 압수수색도 못하는 공권력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는 사설을 썼습니다. 이건 언론의 존립기반 자체를 스스로 부정한 겁니다. 이게 공동 기본가치나 존립기반 자체를 허물고,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 같은 것도 좀 심하고요. 그래서 ‘관훈클럽의 이런 토론회나 또는 이런 캠페인은 대단히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의미 있는 행사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서로 싸우는 이유가 뭔가? 문창극 선생님 여기 앉아 계십니다만 이분이 ‘벽을 허물자’ 2차 토론회에서 발언한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제가 한마디로 저널리즘의 위기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한 집단 내지 한 세력을 위한 spokesman 또는 spokesperson이 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여야나 진보, 보수를 떠나서 우리가 한 진영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언론인이 되는 것을 상당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파성을 바탕으로 이렇게 패가 갈려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정파성이 형성된 배경이 뭘까? 저는 한 4가지쯤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첫 번째가 이게 ‘민주주의의 과실이다. 민주주의의 소산이다’ 하는 거고, 두 번째는 우리 사회에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의 층이 두텁지 않다는 것, 세 번째는 인터넷매체가 나와서 언론의 존립기반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현재진행형입니다만 미디어법이죠. 국회를 통과했고, 헌재에서 판결을 해서 발효하리라고 봅니다. 시간문제라고 보는데, 이 문제는 앞으로 언론간의 어떤 전쟁을 격화시킬 충분한 요인으로 작동하지 않겠나 봅니다. 이 4가지가 중요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4가지에 대해서 여기서 하나하나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첫 번째, 민주주의 문제입니다. 저희가 60년대 후반기에 대학을 다니고 이랬습니다만 그러면서 신방과 학생으로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왜냐? 어느 신문이나 다 똑같습니다. 판에 박은 듯이 똑같습니다. ‘이럴 바에야 신문이 여러 개일 이유가 뭐가 있냐? 신문이 뭔가 좀 달라야 되지 않겠냐?’ 그런 불만이었습니다. 왜 똑같은 신문이 나왔는가? 똑같은 신문을 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초기에는 이런 거 저런 거 못 쓰게 하고, 뒤에는 보도지침이라는 걸 내려서 아예 틀까지 지워주고 그랬어요. 그런 가혹한 언론통제 때문에 다르게 쓸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그래서 뭔가 좀 다르고, 언론끼리 좀 싸우기도 하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에는 진보파가 있고, 보수파가 있기 마련입니다. 두 파는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상호 보완하고 견제하고 이러면서 사회가 발전하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건강한 사회는 그래야 되는 사회입니다. 언론도 건강하게 그런 사회를 지향하고 그러면서 사회통합을 이뤄가고 그래야겠죠.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랬는데 지금 민주화를 통해서 신문끼리 서로 다르고 싸우고 하는 그런 시대가 된 거죠. 이제 이런 것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갈등이 정반합의 변증법, 어떤 진화과정을 통해서 역사가 진행ㆍ발전해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갈등은 독재시절에 그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던 것과 비교해서 거대한 역사 진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렸지만 기본가치, 존립기반 이런 걸 허무는 일은 삼가야 되고, 그리고 서로 비판하더라도 금도는 지켜야 되지 않겠나, 좀 품격을 지켜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기본가치나 품격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핵심적인 것은 사실 정파성을 바탕으로 언론활동을 하며 사실을 왜곡하거나 아니면 아예 기사를 빼는 문제입니다. 신방과 교수이기 때문에 사람들 만나면 흔히 ‘아니, 조선일보 보고 있는데, 경향신문 또는 한겨레신문 보니까 조선일보에 있는 기사는 아예 나지도 않는다. 또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신문에 있는 기사가 상당히 중요한 기사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동아일보 이런 데는 아예 나지도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사 자체를 어떤 것은 정파적인 잣대를 가지고 완전히 죽여 버리거나 무시해 버리거나 또 어떤 사실을 왜곡하거나 하는 것은 언론의 아주 본질적인 문제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언론이 왜 중요합니까? 언론이 왜 있어야 됩니까? 국민들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왜곡하거나 특정사실을 정파적으로 뺄 건 빼버리고 또 키울 건 키우고… 그런 건 언론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밥 우드워드가 얘기했지만 인간이 신이 아닌데 어떻게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팩트는 신만이 압니다. 그럼 기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확보가능한 최선의 버전으로 기사를 썼다면 그게 팩트다,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저는 밥 우드워드가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도 했습니다만 이런 명언을 하는 기자로 존경스럽습니다. 확보가능한 최선의 버전으로 사실을 기사화하는 것, 이게 언론의 철칙이라고 생각합니다. ABC입니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제가 늘 얘기합니다만, ‘확보가능한 최선의 버전’이 아니라 ‘이용가능한 최선의 버전’으로 각색합니다. 이건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벽을 허물자’ 1차 토론회에서 좌우 신문이 다 이 점을 인정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의 어떤 분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들 사이에서 우리가 겉으로 인정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팩트가 있습니다. 스스로 다들 느끼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팩트 앞에 겸손해질 때 상호비판이 생산적이고 건강하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답은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좌든, 우든 상식적으로 어떤 팩트라는 것에 대해서 윤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떤 애는 좌파고, 어떤 애는 우파인데, 요즘 애들은 참 빠르게 변합니다. 옛날에는 신념이라는 게 상당히 있고 그랬는데, 요즘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바꾸는 데 1년도 안 걸립니다. 상당히 우파로 보이던 애가 어느 날 한겨레신문에 가면 그냥 극좌가 되어 있고, 반대로 상당히 진보적인 애가 조선일보에 가더니 그냥 극우가 되어 있고 이럽니다. 그 회사에 순응하는 겁니다. 기자 맛은 사실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회사가 어떻든 나는 팩트를, 나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다. 이게 기자가 할 일이고, 이걸 위해서는 어떤 압력도 무릅쓰고 싸운다’ 이게 기자정신인데 너무 순치되어 가고 있습니다.

밥 우드워드가 ‘확보가능한 최선의 버전’ 얘기를 했습니다만 그 후에 미국에서 CCJ라는 게 생기고, PEJ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이재경 교수가 그 부분에 대해 아주 해박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만 요점은 뭐냐 하면, ‘사실을 쓸 때 관심과 이해관계가 다른 4가지 뉴스소스 이상에 접근해서 취재를 해가지고 한 기사에 써라. 그게 좋은 기사다. 그런 식으로 쓰자’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관심은 어떻게 보면 이데올로기 이런 얘기가 되겠고, 이해관계 그러면 계급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좀 다양하게 취재해서 사실을 사실대로 확보가능한 최선의 버전으로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 아니냐, 그런 얘깁니다.

제가 문창극 이사장님이랑 이목희 총무한테도 말씀드렸는데, 이거 언론끼리 패 짜가지고 싸우는 거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습니다. 상당히 오래갈 겁니다. 그래서 저는 관훈클럽이나 신영연구기금 쪽에서 미국의 PEJ 활동하고 비슷한 한국적인 PEJ 활동을 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산학협동을 통해서, 그러니까 언론계에 계신 분들하고 학계에 계신 분들이 같이 한국의 저널리즘을 살리는 운동으로 승화시켜갈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돈 많이 들지 않을 겁니다. 상당히 오염되지 않은 양심적인 학계 사람도 꽤 있고, 그 사람들은 정말로 무슨 보수를 바라지 않고 이런 일을 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봐 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 요인으로 우리나라에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의 층이 얇다는 얘기를 드렸습니다. 미국 언론사에서도 처음에는 전부 다 정파지가 판을 쳤습니다. 여러분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퍼슨이 그렇게 만들고 재기를 했죠. 그런데 대중이 성장하면서 바뀌었습니다. 대중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대중지가 나오게 되고, 그래서 그 대중지들은 정치적으로는 중립적인데 지적 수준은 좀 낮은 층을 대상으로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그쪽이 장사가 되니까 정파지가 마치 해 나오면 안개가 사라지듯이 쫙 걷히고 대중지시대가 됐지 않았습니까? 그다음에 뉴욕타임스가 나옵니다. 거기서 지향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그러나 지적인 독서층입니다. 그걸 겨냥해서 신문을 만들자고 해서 뉴욕타임스가 나왔고, 객관주의 언론 원칙을 지키며 그야말로 ‘20세기는 뉴욕타임스의 시대라고 할 만큼 저널리즘의 전범을 세웠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뉴욕타임스가 가능하게 한 것은 뭐냐?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거 대단히 얇습니다. 이걸 해줘야 될 게 어떻게 보면 시민단체입니다. 저는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시민단체가,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걸 보고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이게요, 남시욱 선생님은 DJ시절에 대해서도 대단히 인색하신데, 그러나 DJ시절까지도 외형적으로는 시민단체 같은 것들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고 표방하고 이랬습니다. 그런데 노무현시대하고요, 그리고 제 학교 선배가 됩니다만 MB시절 와서는 시민단체가 권력의 대변자가 아니라 완전히 앞잡이입니다. 여러 원로선배님들이 취재하셨겠지만, 저는 지금 시민단체가 좌나 우나 간에 자유당 시절의 백골단이나 땅벌떼하고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학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학계에 무슨 공정 어쩌고 표방하는 단체가 4개입니다. 4개인가 몇 개인가 됩니다. 저는 그 하나도 안 끼어 있는데, 그러니까 저는 불공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4개를 가만히 보면요, 다 정치적으로 어디 손대어 있습니다. 손대는 것까지 이해가 되겠는데, 노무현 시절에는 그 사람들이 KBS의, MBC의 이사, 무슨 시청자위원회에 다 들어갑니다. ‘아, 저건 좀 아닌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MB시절 와서 보니까 반대편 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질적으로는 오히려 지금 더 후퇴한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지식인 사회가 정치얘기 안 하면 오래가는데, 정치얘기 나오면 10분 있다 서로 얼굴 붉히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이 없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오늘 자리배정에 대해서 대단히 불만이 많습니다. 사회자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조선일보와 남시욱 선생이 계시고, 왼쪽에 경향신문의 이승철 논설위원이 계시는데, 이러면 저를 좌파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이목희:전혀 아닙니다.

 

김민환:저는 제 자리매김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의 일원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 같은 사람을 겨냥해서 내는 인텔렉추얼 페이퍼(intellectual paper)가 나올 수 있도록 하는 한 분자라도 되자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마음은 가운데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남시욱 선생님께서 리영희 선생님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그게 제 지론이기도 합니다만 그분이 한 시대에는 시대의 양심으로까지 불리고 지식인 사회에서 좋아하는 분도 계신데, 한겨레신문 창단할 때 ‘날개론’이라는 걸 얘기하셨습니다. ‘오른쪽 날개는 그야말로 탱크를 날게 할 수 있을 만큼 강한데, 왼쪽 날개가 없다. 그러니까 한겨레신문은 이걸 만들고 키워야 된다.’ 그런데 지금은 다양해졌습니다. 그럼 지금 문제는 뭐냐? 다양한 것도 좋지만 사회통합을 누가 합니까? 통합이 되어야 됩니다. 통합이 안 됩니다.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매체가 있어야 됩니다. 저는 그래서 마이너신문, 마이너언론이 다양성을 위해서 열심히 언론활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치고받고 싸우고, 지금보다 더 험악하게 싸우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 사회의 다양성 측면은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학교에서도 그럽니다만, 메이저언론, 그러니까 KBS, MBC, SBS, YTN, 조중동 등은 날개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메이저언론은 몸통이 되어야 됩니다. 저 아래 형제들이 싸우면 ‘어험’ 하고 기침하고, 그러면 밑에 동생들 조용해집니다. 큰형, 맏형 같은 언론이 있어야 되는데, 지금 문제는 이에 앞서 노무현시절에는 KBS, MBC 그런 메이저언론이 어디 앞잡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공영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조중동이 한쪽에 있어서 그랬다는 겁니다.

저는 다시 돌아가야 된다고 봅니다. 뉴욕타임스 왜 좋은 신문입니까? 사회를 통합시킵니다. 결국 미국은 뉴욕타임스가 가라는 데로 갑니다. 약간 진보적으로 하지만 언론이 약간 그런 맛, 지식인 사회가 그런 맛이 있어야겠지요. 그러니까 저는 여론 다양성을 추구하는 언론들이 있어야겠지만, 그러나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메이저언론이 사회를 통합시켜 가야 한다고 봅니다. 메이저언론이 너무 넓은 스펙트럼을 좀 좁혀서 현실화시켜 가야 합니다. 저는 오바마의 책 읽고 감동했습니다. 민주당 출신인데 뭐라고 하냐면 ‘나는 공화당 사람들의 기본가치가 뭔지를 알고 있다. 늘 그 사람하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가능한 협상, 가능한 지역이 어디일지 그걸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 흑인 출신이 그런 생각을 해요. ‘아, 그래서 대통령이 됐구나’ 생각했습니다. 메이저언론이 자리매김을 어디다 해야 되느냐? 타협가능한 곳에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사회에 진보, 보수 다 있어야 됩니다. 하나 없어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양다리가 있듯이 있어야 됩니다. 그 진보, 보수가 타협가능한, 공존가능한 그런 영역으로 ‘이리 오게’ ‘이리 오게’ 그래서 잘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런 공간을 창출해주는 거, 이거 메이저언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사회통합 기능을 소홀히 하는 거, 이건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세 번째 요인이 인터넷입니다. 언론은 시청료나 구독료가 수입의 하나고, 광고료가 또 하나의 수입입니다. 이 2가지가 수입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나와서 공짜로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품 살 때 지금 신문이나 방송광고 보고 사는 사람 없습니다. 인터넷 들어가면 상품정보 다 나옵니다. 거기서 그냥 직거래까지 인터넷 전자상거래 다 해버립니다. 이런 인터넷이 나와서 구독료나 시청료를 받거나 광고료 받고 살아가는 기존 전통매체의 존립기반 자체를 흔들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조선일보 1년 매출액 한 3,400억, 중앙일보 400억 적고, 동아일보 그보다 또 400억 적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개 합해도 1조가 안 됩니다. 네이버 하나가 1년 매출액이 1조 4,000억입니다. 이렇게 됐습니다. 그럼 네이버의 수입원이 뭐냐? 검색 한 40% 된다고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이 광고입니다. 이미 그렇게 변해버린 겁니다. 광고가 인터넷 쪽으로 가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그러는데 그야말로 ‘광고의 대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앞으로 가속화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매체가 위협하고 있는 게 뭐냐면, 전통매체한테 독자는 어디까지나 소비자에 지나지 않았는데 인터넷매체에서는 독자가 생산자라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막 뭐 띄우고 뭐 하고 이래요. 그게 막 유통됩니다. 그러니까 기본이 흔들리는 거예요. 유통패턴 자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싸우게 됩니다. 그럼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될 것이냐? 저는 이건 어쩔 수 없는 역사의 추세라고 봅니다.

고려시대에 대간제도를 만듭니다. 그 얘기는 공론형성의 주체가 대신들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조선조 이율곡 선생님 등 사림파가 상소제도를 발전시킵니다. 그 얘기는 향촌에 있는 사림계층까지 공론형성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정약용 선생님 같은 분은 ‘원님이 부임하면 농촌의 들, 논둑 같은 데 가서 얘기를 들어야 된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공론형성의 범위를 그만큼 넓힌 겁니다. 서재필 선생님이 독립신문 만듭니다만 일종의 시민사회에서 공론을 주도적으로 형성하는 걸 시도합니다. 혁명적인 일이 벌어진 겁니다. 지금은 대중이 공론형성의 주체로 막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건 역사의 진전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부정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면서 인터넷과 공존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인터넷의 생산 양식의 핵심이 뭐냐? 협업입니다. 네이버에서 만든 거 별로 없습니다. 전부 다 신문사에서 만든 거거나 일반인들이 만든 겁니다. ‘위키피디아’라는 백과사전 아시겠습니다만 그것도 대중 속에 있는 전문가들이 전부 다 만들었습니다. 그 백과사전은 세계의 모든 명문 백과사전 다 죽이고, 위키피디아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그게 협업입니다. 협업의 정신이 뭐냐고 그러면, 전통매체는 독자나 시청자를 소비자로만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사람들하고 이제 같이 만들 생각을 해야 됩니다.

마지막에 신방 겸영문제, 미디어법 문제인데요, 저는 신방 겸영하는 것은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발전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제 다 디지털화되는데 이건 안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법적으로 만드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디어법과 관련, 비유적으로 FTA에 대해 말씀드리죠. 저는 전공은 아닙니다만 농민들이 어렵겠지요. 그러면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되어 미국 가기 전에 농민들을 좀 방문도 하고, 농업 살리는 길을 모색하라고 지시도 하고 그러면서 그 사람들을 달래기도 하고, 그러고 가서 FTA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죽을 것들은 빨리 죽어버려야 된다’ 그런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역작용도 일어나고 그럽니다.

지금 신방 겸영하게 하면 광고가 대이동합니다. 지금 지방신문 다 죽고, 서울에 있는 마이너신문도 빈사상태에 놓여 있는데, 광고 빠져나가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방송을 하면 조중동 같은 메이저신문도 광고 때문에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할 겁니다. 어쨌든 이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때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공동배달제, 지방신문 공동지원책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지원책을 강구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걸 보면 ‘죽을 것들은 빨리 죽어버려야지’ 이러면서 ‘큰 거 하나 뭐 준다’ 이런 식으로 합니다. 그러면 싸움하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 싸움이 안 나겠습니까? 지금 지방신문이 전부 다 빈사상태입니다. 지금 월급 안 주는 지방사가 거의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공동배달제나 공동제작시스템 등 지방지를 살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영세 신문사가 많은데, 모든 신문사가 다 인쇄소를 갖춰야 될 이유가 뭡니까? 그러니까 군소 또는 피해받을 매체에 대한 보완책 같은 것을, 사회안전망이라고 그러나요, 언론 쪽에도 그런 안전망을 해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거 후폭풍이 대단합니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언론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그야말로 메이저언론도 마이너언론에 대한 어떤 지원책 같은 것에 대해서 절대로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런 점을 좀 주도적으로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인터넷시대입니다. 인터넷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대중들의 어떤 ‘집단지성’을 창출했습니다. 이 집단지성에 맞서서 전통언론도 살아야 됩니다. 전통언론, 즉 신문ㆍ방송매체에 있는 기자들, 언론인들의 집단지성, 그야말로 합리적이고 건강한 집단지성이 절실한 그런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 다음은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가 토론회를 위해 미리 준비한 주제발표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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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민환(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벽을 허물자…기상천외한 캠페인

중견언론인의 공동체인 관훈클럽이 ‘벽을 허물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언론계의 심각한 갈등과 반목의 벽을 허물자는 것이다. 그동안 언론사나 언론인단체가 이런저런 캠페인을 많이 전개했지만 상호비판을 자제하고 반목의 벽을 허물자는 캠페인은 처음인 것 같다. 선진국에서는 언론의 상호비판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캠페인은 이례적인 느낌까지도 줄 법하다.

관훈클럽은 이 캠페인의 부대사업으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6월 제주도에서 기자출신 교수를 주제발표자로 정해 주요 언론사 기자들과 토론하게 했고, 9월에는 경주에서 기자출신 정치인과 대기업 간부를 불러 밖에서 본 언론계 갈등과 해소방안에 대해 기자들과 폭넓게 의견을 나누게 했다. 이번 토론회는 3차로, 지난 1년 동안 벌여온 캠페인을 종합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차 토론회에서 손태규 교수는 한국언론의 상호비판이 지나치다고 잘라 말했다. 비판을 넘어 감정적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상호비판이 상호고소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다. 손 교수가 지적한 대로 우리나라의 언론사간 명예훼손 소송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많다. 당파성이 보편화한 유럽에서조차 언론사끼리 소송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손 교수는 상호비판을 하되,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차 토론회에서 발표자로 초청받은 전여옥 의원은 ‘언론사의 반목과 언론인간 갈등을 지켜보며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유대인과의 관계를 연상할 정도’라고 말하고, 언론인 스스로 벽을 허물고 벽 대신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영선 의원은 시인 도종환의 시를 인용했다. 그 시는 벽과 담쟁이를 노래한다. 벽이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느낄 때 담쟁이는 꼭 여럿이 손을 잡고 그 벽을 올라 결국 그 벽을 넘는다는 내용이다. 박 의원은 언론계의 벽을 허물기 위해 언론인들이 힘을 모을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 같다. 이 토론회에 제3의 발표자로 나온 이인용 삼성전자 부사장은 두 정치인에 비해 훨씬 날카롭게 언론계 갈등을 해석했다. 그는 언론계가 갈등하고 있는 것은 주의와 주장은 넘치는데 상대적으로 사실관계 검증에는 약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언론이 사실관계의 철저한 검증이라는 저널리즘의 최소한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나는 언론의 상호비판이 지나치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1차 토론회에서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이 지적했듯이 우리 언론의 상호비판은 언론의 기본가치를 훼손하는 수준에 이른 지 오래다. 김진 위원은 광동제약에 대한 시민단체의 협박사건을 예로 들었다. 광고주에 대한 그런 공격은 열린사회에 대한 공격이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테러행위이기 때문에 언론계가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이 규탄해서 그런 현상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개탄했다.

우리는 또한 MBC에 대해 국가기관이 압수수색을 시도한 것을 기억한다. 이럴 때 MBC가 취할 매뉴얼은 무엇일까? 미국의 예를 참조한다면, 압수수색은 당연히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불응해야 한다. 취재원(news source)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숨은 내놓더라도 기자수첩은 내놓지 말라는 금언은 취재원 보호가 얼마나 지엄한 철칙인지를 말해준다.

압수수색에 대응하는 매뉴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MBC가 해야 할 일이 또 있고, 다른 언론사가 해야 할 일도 있다. 우선 MBC는 쟁점이 된 방송의 내용이 사실에 부합한 것인지, 공정성을 엄수했는지 자체적으로 가려야 한다. 방송내용에 문제가 있었거나 취재과정에서 정도에 벗어난 일이 있었다면 처벌해야 한다. 마땅히 지휘책임도 물어야 한다. 다음에 다른 언론사는 무얼 해야 하는가? 언론사에 대한 압수수색은 언론자유 자체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므로 모든 언론사가 MBC를 엄호해야 한다. 언론노조가 아니라 언론사 사장단이 비상대책회의를 긴급소집해 압수수색의 부당성을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매뉴얼은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현 단계에서는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언론사의 공동대응이란 하나의 잠꼬대일 뿐이다. 일부 언론은 압수수색조차 하지 못하는 공권력의 무력함을 개탄하기까지 했다. 취재원 보호라는 언론의 존립기반 자체를 부정한 셈이다. 이른바 상호비판이라는 감시활동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관훈클럽이 캠페인을 벌이는 것 자체가 당연하고도 절실한 시대적 요청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립과 갈등의 원인

왜 우리 언론은 언론 공동의 기본가치나 존립기반마저 부정하면서까지 대립하고 있는 걸까? 한마디로 정파성 때문이다. 정파성이 갈등과 대립의 근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지난 두 차례의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했다.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문창극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한마디로 저널리즘의 위기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한 집단 내지 한 세력을 위한 spokesman, spokesperson이 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 …여야나 진보, 보수를 떠나서 우리가 한 진영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언론인이 되는 것을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저널리즘 위기의 본질이 정파성에 있으며, 이 정파성이 진보나 보수를 떠나 모든 언론에 보편화하고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우리 언론사(言論史)에는 언론사(言論社)간 갈등을 여과 없이 노출한 경우가 많다.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여러 차례 감정 섞인 싸움을 벌였다. 식자들은 이 싸움을 게와 두루미의 싸움에 빗대곤 하였다. 중앙일보가 나온 뒤 세 신문은 그때 그때 조합을 달리해 가며 싸웠다. 그러나 이런 싸움은 치열한 경쟁의식의 소산이었다.

근자에 들어 우리 언론이 벌이는 것은 경쟁사끼리의 일시적 반목이나 대립이 아니다. 우리 언론은 요즘 정파적 이해관계나 이념성향이 엇비슷한 언론끼리 하나의 진영을 이루어 반대진영을 가차 없이 공격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이념적 색깔을 덧씌우기까지 한다. 전개하는 논리의 저변을 살피면 더욱 놀라게 된다. 진영이 다른 언론을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배제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떨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파성 형성 배경

우리 언론이 상호비판의 명분으로 갈등과 대립을 심화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심층적인 접근이 필요하지만 피상적으로 느낀 바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이런 갈등이 민주주의의 소산(output)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광복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향했지만 민주주의를 늘 유예해야 했다. 특히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언론은 국가개발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철저히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고작 권력이 금하는 것을 보도할 수 없을 뿐이었지만 뒤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권력이 내려준 지침에 따라 보도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이 서로 다른 보도태도를 취하고 그 결과로 반목하거나 갈등하는 것은 권력이 허용하지 않았다. 언론은 침묵의 카르텔에 안주하며 관급기사를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이 보도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이런 카르텔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새로운 신문이 나와 새로운 시각,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신문이 나와 경쟁했다. 개성이 없으면 독자적인 시장을 지키거나 개발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이런 처지에서 보수매체와 진보매체라는 대립된 자리매김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 진보와 보수 간에는 벽이 두껍다.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라는 생각이 엄존한다. 기나긴 독재정치가 그렇게 만들었고, 거칠게 밀어붙인 개혁정치가 그런 성향을 더 강화했다. 이런 토양에서 언론의 대립과 갈등 역시 도를 넘게 된 것이다.

둘째, 우리 언론이 정파성을 바탕으로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데 일인이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미국에서도 정파저널리즘(partisan journalism)이 한동안 판을 쳤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새로 교육받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가독공중이 대두하자 이른바 대중지가 정파지를 물리치고 언론의 주류를 형성했다. 미국 사회가 발전을 거듭해 지적 공중의 층이 두터워지자 뉴욕타임스는 객관주의라는 새로운 기치를 내걸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을 대상으로 지적 신문(intellectual paper)의 새 길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정치과잉이다. 우리 자본주의가 그야말로 압축성장을 거듭하며 숙려의 과정을 생략한 업보가 아닌가 한다. 정치가 과잉이기는 우리 언론학계도 예외가 아니다. 언론의 공정성을 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술단체가 여럿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들 단체마저 하나같이 정파적이다. 공정성을 내세우며 공정성 훼손하기 경쟁을 수시로 벌인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은 그 층이 결코 두텁지 않다. 상업주의적으로 보면 시장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차라리 한 정파에 충성하는 것이 이롭다. 연세대 윤영철 교수는 2001년 “주류신문이 보수적인 정치세력과 중산층 독자로부터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수주의를 강화함으로써 반공ㆍ반북 이데올로기 재생산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그의 전망은 현실화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진보적 마이너신문은 그 반대논리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현재의 언론갈등에는 이런 상업주의적 판단이 개재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부 신문은 비교적 중립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립적인 지적 공중의 층이 두텁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셋째, 미디어산업 재편이 매체갈등의 소지를 조성했다. 인터넷이 등장함으로써 전통매체의 존립기반이 위협받고 있다. 수용자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뉴스를 얻는다. 사업가들은 신문이나 방송에 광고를 해 상품정보를 소비자에게 알린다. 그런 일련의 대가로 신문과 방송은 수용자한테서 구독료(시청료)를, 광고주로부터 광고비를 받는다. 그 2가지 수입이 전통매체의 주된 수입원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등장해 무료로 뉴스를 제공하고, 나아가 소비자가 인터넷을 통해 상품정보를 검색해 직거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통매체의 핵심적인 수입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이다.

경영적으로 위기가 왔을 뿐만 아니라 공론형성 과정 자체도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세기말까지도 공론형성 과정에서 전통매체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독자나 시청자는 그야말로 수용자에 불과했다. 현대인은 학교 교실에서 보낸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미디어 앞에서 수동적인 수용자로 앉아 지냈다.

그러나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대중화하면서 혁명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수용자는 여전히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정보나 문화를 즐겨 소비하지만, 클레이 셔키(Clay Shirky) 뉴욕대 교수가 그의 명저 ‘Here Comes Everybody’에서 말했듯이 스스로 정보나 문화를 생산하거나 공유하기를 더 즐긴다. 지나간 100년 동안 수용자들이 소비하는 데 자족했다면, 이제는 생산과 공유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게 하여 창출된 집단지성이 지식세계나 공론장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메이저언론이 그들의 힘의 왜소화를 초래한 대중이나 집단지성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메이저언론의 위세에 눌려 지낸 마이너언론은 대중의 성장을 반기면서 대중과의 연대를 강화할 길을 찾게 된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으로 하나의 추세가 되어 있다. 이런 추세가 우리나라에서는 언론간 갈등과 반목을 격화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문과 방송 겸영문제가 언론간 갈등을 증폭한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문의 방송겸영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 미디어법이 국회를 통과한 상태다. 미디어법이 발효하여 거대신문이 겸영하는 채널이 생기면 매체산업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한정된 광고시장을 놓고 생사를 건 싸움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겸영을 허용하는 것이 국제적인 추세라 하더라도 겸영으로 인해 기존 언론사들이 경영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당국은 미디어법 발효가 가져올 후폭풍을 최소화하기 위해 치밀한 보완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이 정부는 그런 원려(遠慮)에 인색하다. 이런 요인은 매체간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동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벽을 허물 방법

언론계에서 신문과 방송이, 또는 진보언론과 보수언론이 지나치게 대립하고 있고, 그 대립을 상호비판이라는 명분하에 합리화한 지 오래다. 그래서 관훈클럽이 ‘벽을 허물자’는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요인이 빠른 시일 안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벽을 허물자는 캠페인 하나로 벽이 허물어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차분하고도 장기적인 접근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나는 벽을 허물기 위해 의사들에게서 지혜를 얻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의사는 원인별로 과학적으로 대응한다. 언론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도 포괄적인 해법이 아니라 원인별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파적 대립의 첫째 요인은 민주주의 진전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자유가 보장되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할 수밖에 없고 또 존재해야 할 진보파와 보수파가 생겼고, 그들과 이념적으로 연대하며 보도하고 논평하는 언론이 등장했다. 힘의 균형은 아직 갖춰지지 않았지만 소수파의 처지를 대변하는 언론이나 언론인이 하나의 세력으로 대두한 것은 역사의 진전이다. 그로 인한 갈등이나 대립은 민주주의의 결과이자 민주주의의 소중한 자산이다.

독재시절에 우리는 언론보도에 개성이 없음을 개탄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시절에 우리는 언론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펴며 치열하게 논전을 벌이는 시대가 오기를 염원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런 일련의 갈등과 대립은 역사 이행과정에서 거칠 수밖에 없는 일종의 통과의례에 해당한다. 격하고도 지루한 대립을 통해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언론끼리 반목하고 대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상호비판 자체를 자제하자는 일각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날카롭게 지적해야 한다. 질정을 통해 상대의 과오를 바로잡는 것은 나의 과오를 예방하는 길이기에, 상호비판은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 상호비판을 무조건 지양하면 결국은 침묵의 카르텔을 통해 저널리즘 자체가 더욱 황폐화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언론계에서 횡행하는 상호비판은 금도를 넘어선 경우가 많다. 이미 말했듯이 정파가 다른 언론을 공격하기 위해 언론의 기본가치나 공동기반조차 허무는 일은 삼가야 한다. 광동제약에 외압을 가하거나 MBC에 대한 압수수색을 부추기는 태도는 언론의 존립기반을 훼손하는 일로 두고두고 자계(自戒)의 예로 삼아야 한다. 또한 비판에 동원하는 언어적 표현은 품격을 갖춰야 한다. 관훈클럽의 1ㆍ2차 세미나에서 많은 참석자가 품격문제를 거론했다. 품격을 잃은 상호비판으로 언론계 전체의 이미지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남을 공격할 때 구사한 언어가 정도에서 벗어났다면 그것은 자신이 남을 비판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스스로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2가지는 중요하긴 하지만 그러나 지엽적인 일이다. 정파성에 함몰되어 사실(팩트) 자체를 왜곡하는 일이야말로 핵심적이고도 치명적인 과오다. 저널리즘의 기초가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있다.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 그 일이 시급하고도 절실하다.

왜 언론기관이 필요한가? 국민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기 위해서다. 신이 아닌 이상 기자가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자는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법정 증언대에 선 우드워드(Bob Woodward)는 쟁점이 된 기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기자가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버전이므로 사실로 간주해야 한다고 답했다. 기자는 그가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버전을 보도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기사를 썼다면 그것은 사실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사실의 윤곽을 파악하고도 정파성에 맞춰 사실을 왜곡하고 각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기자들이 확보가능한 최선의 버전이 아니라 이용가능한 최선의 버전으로 보도하는 것이 하나의 습성이 된 지 오래다. 정파성을 바탕으로 사실을 재구성해야 기사가 실리니까 일선기자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1차 세미나에서 김의겸 한겨레신문 문화편집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 사이에서 우리가 겉으로 인정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팩트가 있다. 스스로 다들 느끼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팩트 앞에 겸손해질 때 상호비판이 생산적이고 건강하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상호비판이 건설적인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저널리즘이 저널리즘답게 하기 위해 언론은 사실에 충성해야 한다. 우드워드가 말한 확보가능한 최선의 버전으로 사실을 보도해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미국 CCJ(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m)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는 이 위원회 이름을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위원회’라고 옮긴 바 있다. 이 모임은 1997년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들이 모여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최근 PEJ(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PEJ 프로젝트는 사실보도에 대해 진일보한 정의를 내놓았다. 한 사안에 대해 관점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4개 이상의 취재원을 활용해서 쓴 기사라야 우수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PEJ의 작업을 참고한,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확신한다. 관훈클럽이 그 주체가 되는 방안을 심도 있게 검토하기 바란다. 진지하고도 능동적인 산학협력의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다.

정파성에 함몰되어 길항을 일삼는 두 번째 요인으로 나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의 층이 엷은 지적 풍토를 들었다. 미국에서 정파신문을 몰아낸 것은 정파성이 없는 대중이었다. 뉴욕타임스라는 지적 신문이 성공하게 한 것도 뉴욕의 층이 두터운 지적 공중이었다. 같은 논리로 우리나라에서 언론이 정파성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정파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의 층이 얇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뉴욕타임스가 창간될 당시 뉴욕에 한 신문이 경영적으로 안착을 담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지적 공중이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뉴욕타임스는 지성인 사이에서 정파적 편파성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새로 성장하는 지적 공중을 발견하고 그들을 겨냥해 신문을 발행했다. 점차 지적 공중이 성장하면서 뉴욕타임스도 컸고, 뉴욕타임스가 크면서 지적 공중도 더욱 늘었다.

우리 언론도 뉴욕타임스의 혜안을 배워야 한다. 정파성은 일종의 추수주의의 소산이다. 이제 그런 소극적 태도를 지양하고 새로운 흐름을 이끄는 언론이 21세기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언론이 먼저 그런 새로운 지향성을 보여야 하겠지만 지식인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언론을 눈여겨보고 지원해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이제 여론의 다양성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본다. 여론다양성 못지않게 사회통합이 중요하며, 현 단계는 바로 그런 방향의 수정보완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믿는다. 바로 뉴욕타임스 같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을 대상으로 삼는 지적 신문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을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에 반체제 지식인으로 혹은 시대양심의 대변자로 회자한 언론학자 이영희 교수가 이른바 ‘날개론’을 편 바 있다. 우리나라 언론계에 오른쪽 날개는 있는데 왼쪽 날개는 없다면서 왼쪽 날개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후 그 말이 자주 화두에 오르곤 했다. 나도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균형 있게 발달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지만, 이 시점에서 더욱 필요한 것은 날개언론이 아니라 몸통언론이 아닌가 한다. 나는 언론계가 공생하려면 역할분담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마이너언론은 좌우의 날개가 되어 여론다양성을 꽃피우되, 메이저언론은 좌우가 공존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사회통합을 이루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는 궁극적으로 다양성과 통합성이 병존하는 품격 있는 사회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적한 정파적 대립의 셋째 요인은 새로운 매체의 대두다. 새로 등장한 인터넷매체는 무서운 속도로 전 방위에 걸쳐 전통매체의 기반을 잠식해왔다. 이제 인터넷이 공론형성 과정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터넷 덕분에 대중이 공론형성의 주체가 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가속화할 것이다.

인터넷시대에 대중이 공론형성의 주체로 성장하면 앞으로 전통매체는 종언을 고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대중이 만들어 인터넷을 통해 퍼뜨리는 콘텐츠는 그것이 협업과정을 거쳐 생산되고, 그 내용이 아무리 알찬 것이라 할지라도 수용자가 선뜻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출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출처에 대한 신뢰가 전제될 때 비로소 그 콘텐츠에 높은 신뢰도가 붙는다.

바로 그런 요인은 신문이나 잡지 또는 방송 같은 전통매체가 생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전통매체는 교육받은 다수의 기자가 책임 있는 당사자(또는 사건현장)에 직접 접근해 취재한 정보를 게이트키핑(gate­keeping) 과정을 거쳐 취사선택한 뒤 기사로 내보낸다. 수용자는 기사를 보고 나서 해당출처에 정보의 사실 여부를 검증할 수 있고 추가정보도 용이하게 얻어낼 수 있다. 이런 복잡한 메시지 제작과정은 자연스레 수용자로 하여금 콘텐츠에 대해 신뢰하게 한다.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원하는 수용자가 있는 한 전통매체는 여전히 권위 있는 정보원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전통매체가 인터넷매체에 비해 신뢰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언론재단이 2008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매체별 신뢰도는 지상파TV가 3.39, 전국 종합신문이 3.11인 데 비해 인터넷매체가 3.35였다. 신뢰도에 있어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인터넷매체가 신문의 신뢰도를 제쳤을 뿐만 아니라 지상파TV의 신뢰도를 바짝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 참조)

매체별 만족도 및 신뢰도 (단위:5점 척도 평균점, N=5,104)

 

 

언론재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90년 텔레비전을 믿는다는 사람이 34.7%에 불과한 데 반해 신문을 믿는다는 사람은 55.4%였다. 90년대 후반에 텔레비전과 신문의 신뢰도는 역전되었다. 1998년 텔레비전을 믿는다는 사람이 49.3%로 뛰어오른 데 반해 신문을 믿는다는 사람은 40.8%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 신문은 텔레비전은 물론 인터넷매체에도 신뢰도에서 뒤지고 말았다. 전통매체의 힘의 원천(power base)은 신뢰도인데 우리 전통매체가 확고한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은 전통매체로서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저널리즘의 위기는 물론 산업적 위기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전통매체의 신뢰도가 낮고 영향력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전통매체가 인터넷이 유발한 외적 변화에 대응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인터넷과 전쟁을 벌이는 방향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는 자칫 역사의 진화를 거역할 우려가 있다. 공론장 확장에 기여한 인터넷매체의 공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인터넷매체와 공조하며 윈윈(win­win)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또한 인터넷매체의 생산양식을 하나의 시대흐름으로 인식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의 가장 특징적인 생산양식은 협업이다. 대중 속에 묻힌 사람들이 협업을 통해 집단지성을 창출한다. ‘위키피디아’가 그 좋은 본보기다. 협업이야말로 이제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런 양식을 전통매체도 능동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신방겸영이 언론전쟁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동하였고 앞으로 그런 성향이 심화할 개연성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겸영금지의 틀을 허문 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다. 메이저신문도 아니다. 날이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수준이 매체간 장벽을 허물었다고 봐야 한다. 국가간 문턱도 사실상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겸영은 불가피한 일면이 있다.

겸영철폐가 세계적 추세인데도 이로 인해 언론간 갈등이 심화할 개연성이 높은 것은 언론환경 급변에 따를 부작용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최소화하려는 정책의지가 결여되었거나 박약한 데 기인한다. 한정된 광고시장에 강대한 신규매체가 등장하면 언론계 전반에 심각한 후폭풍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위성방송이나 케이블TV, 지상파방송의 지방사 등은 경영위축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이미 고사상태에 빠진 마이너 전국지나 지방신문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신방겸영의 화려한 청사진만 펼쳐 보일 뿐이다. 그 청사진마저 허점투성이다. 위축이 불가피한 언론사를 어떻게 지원할지는 아예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있다. 신문에 대해 다양한 지원책을 곁들여 적극적으로 합병을 권유해야 한다. 신문의 공동인쇄가 가능하게 하고, 공동배달제도 정착시켜야 한다. 그 밖에도 겸영 허용으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기존 매체를 살리는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메이저언론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는 데 만족하고 만다면 미디어법은 전면적인 언론전쟁을 촉발하는 변수가 될 것이다.

 

결어;인터넷의 집단지성과 저널리스트의 집단지성

인터넷은 대중의 협업을 통해 집단지성을 창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인터넷의 성공은 저널리즘의 실패를 기반으로 한 일면도 있다. 그렇게 빠르게 수용자가 인터넷매체로 이동한 것은 저널리즘의 실패를 상정하지 않으면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매체가 인터넷매체와 공존하며 튼튼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제 저널리스트들이 집단지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인터넷매체가 집단지성을 통해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면 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의 집단지성을 통해 차원 높은 저널리즘을 구현해야 한다. 그것은 저널리스트가 사는 길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격을 높이고 공론형성 과정이 촘촘해지는 첩경이기도 한다. 관훈클럽의 ‘벽을 허물자’ 캠페인이 구체적인 운동으로 진화를 거듭해 저널리즘의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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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희:논리정연하신 주제발표 감사드립니다. 시간관계상 바로 김경호 회장님 주제발표를 듣겠습니다.

 

김경호(한국기자협회 41대 회장):네, 소개받은 김경호입니다. 김민환 교수는 아까 발제 모두에 ‘발표할 자격이 없다’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제가 이렇게 아주 새파란 나이에 대선배님들 앞에서 발표하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영광이면서도 송구스럽기도 하고 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관훈클럽으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과연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이 무엇이 있겠는가? 과연 의미가 있는가? 또 이것이 공허하지 않은가? 이러한 고민을 하다가 제가 결론을 그렇게 내렸습니다. ‘2년 동안 기자협회에서 일하다 보니 느낀 게 많았다. 그 부분을 학술적 논의가 아니라 그냥 솔직담백하게 제시해보자. 그것이 굉장히 나이브하고 또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논의가 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진단하고 그래도 그 방향이 맞는다면 가야 되지 않는가?’ 이런 인식론에서 제가 이 자리에 나오게 됐습니다. 앞에서 다행히 우리 남시욱 대선배님 그리고 김민환 교수님께서 말씀을 다 해주셔서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장황하게 많이 썼습니다만 겹친 부분은 생략하고 제가 느꼈던 부분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언론계 대선배님들이 후배들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소회가 계실 텐데요, 오늘 토론회가 이것을 잘 엮어서 저널리즘이 제자리로 가는 정체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찾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저널리즘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이라고 하면 결국은 기자들이 주체가 될 텐데, 기자들이 기사를 쓰고 취재를 하고 보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선배님들께서 예전에 군부독재 때와 언론자유를 탄압할 때 보여주셨던 기개, 소위 기자정신 이런 부분이 왜 지금은 사라져버렸고, 그나마도 없는 집에 우애라도 있어야 될 텐데 왜 기자들끼리 서로 싸우는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습니다. 최근에 제 후배기자 둘이 소속사는 다릅니다만 언론계를 떠났습니다. 이름 석 자를 말씀드리면 알 만한 기자들입니다. 한 기자는 진보적인 쪽에서 그야말로 보수매체를 공격했던 미디어 전문기자였고, 또 한 분은 마이너신문의 보수매체에 있는 후배였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조금만 더 기자로서 버틸 힘만 있었다면 남으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저널리즘 정신을 얘기하기도 지쳤다. 이제 밥을 찾아 떠난다’ 굉장히 충격적인 얘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왜 벌어졌나? 이런 상황이 왜 벌어졌는가? 또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며칠 전 후배기자가 그럽디다. ‘경제부 기자로서 대기업 잘못된 것 지적도 하고 취재도 해서 이 기사 정도는 충분히 사회적 반향이 있을 것 같아서 썼다. 그런데 홍보실 직원이 벌써 알고 소위 작업을 하더라. 그래도 아니다, 이 기사는 아마 나갈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두고 보자, 내일 아침에 나오나 안 나오나 하고 왔는데 아침에 보니까 기사가 홀라당 날아가 버렸다’는 거지요. 원래 초판에 있던 기사가. 그런데 과거에는 왜 내 기사 뺐나, 왜 내 기사를 속된 말로 엿 바꿔 먹었는가 하며 항변했던 기자가 종종 있었습니다. 데스크와 현장기자와의 충돌이나 대립, 이런 상황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조용합니다. 그 자체도 별 의미가 없다는 거지요. 그것 해봤자 찍히기나 하고 아마 인사 때 반영될 것이라는 자조적인 생각들이 굉장히 강합니다.

이런 현상은 저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도 지금 신문의 위기, 방송의 위기가 오기 때문에 미국 기자들은 보통 2가지 신문을 보지요. 자기가 사는 지역의 대표적인 것 하나, 그리고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를 봅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라는 한 60만부 되는 신문사가 있습니다. 서부 쪽에서는 LA타임스 못지않게 굉장히 명성이 있는 신문이지요. 그 신문 기자도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를 봐야 된다고 합니다. 논평이라든가 이런 것을 보고 그것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죠. 지역적인 신문들도 자신의 판단이 맞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잣대가 바로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다고 합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미디어법이라는 것도 어쩔 수 없이 가야 되는 방향일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정파적인 부분에서 얽혀 들어가면서 지금 이념적 대립, 정파적 대립으로 악화돼 있는 거겠지요. 지금 기본적으로 저널리즘이 무너진다, 위기다,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언론현상을 매체경제학적 방법으로 접근하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어떻게 저널리즘 시스템이 망가지게 되었는가? 결국은 재정적인, 경제적인 어떤 하부 토대 자체가 지금 흔들리고, 어떤 경우는 무너지기 때문에 저널리즘의 토대가 역시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의 지배를 당하는, 봉급을 받는, 또 회사에 의해 자신의 위치가 결정지어지는 기자들 개인의 운신의 폭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면 그 운신의 폭을 제약받을 때 과연 여기 선배님들이 보여주셨던 그러한 기자정신을 얼마만큼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보면 잘못하면 공허하고 관념적인 얘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자 개인에게 ‘너 똑바로 기사 잘 쓰고 과거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그런 기자정신을 갖고 네 정체성을 확보하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저는 솔직히 굉장한 회의감을 갖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 들어갔고 언론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적인 부분, 정파성 부분이 지나치게 과잉인 우리 한국사회에서 소위 매체들간 상호 공격, 이것은 정말 정도가 지나치다고 봅니다. 어차피 신문은 독자가 보는 것이고 방송은 시청자가 보는 것인데 그 선택의 폭이라는 것이 굉장히 좁고 어떤 정파성에 의해서 매체를 선택하는 그런 부분들이 너무 안타깝고 문제 있다고 생각하고, 아까 두 분이 발제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그 소통이라는 부분이 거의 단절됐다고 봅니다. 기자실에 소수의 매체만 출입했을 당시 옛날 선배님들 사이에는 어떤 동업자의식, 동료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청와대 출입하는 기자만 300명이 넘습니다. 서로 얼굴도 모릅니다. 그렇게 매체가 많이 늘어나 있는 상황이라 소위 정보의 공유현상이 나타나기 어려워 어차피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제한적이고 좀 편중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소통이라는 것은 같은 부류의 사람끼리 통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입장을 갖고 있는 다양한 어떤 네트워크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DJ정부 출범 이후부터 지금까지 소통은 갈수록 더 단절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경제적인 하부구조가 흔들리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만큼 복잡다단한 사회관계가 이루어지다 보니까 정치적 영역에서도 그것을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의 논의로 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 좀 제한을 했습니다. 사실은 DJ정부부터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라든가 특히 노무현정부에서의 특정매체 공격 그리고 편 가름, 기자실에서 기자들을 내쫓는 그런 기자실 파동, 이런 것을 보면서 권력이라는 게 저런 것인가 하는 회의를 참 많이 느꼈습니다.

이명박정부 출범하고 난 뒤 사실은 제가 가장 큰 수혜자일 겁니다. 노무현정부 말기에 소위 기자실 파동 때 제가 기자협회 수석부회장을 하면서 ‘이런 정파적인 어떤 속셈을 가지고 기자실을 재단하지 마라’고 하면서 제가 문제를 일으켰지요. 그래서 결국은 노무현 대통령의 소위 언론과의 대화도 엉망이 되어버렸고 그 후 기자들이 밖으로 내쫓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봤습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 출범 후 기자실을 우여곡절 끝에 복원시켜 놨습니다. 사실 저는 굉장한 수혜자지요. 수혜를 받았지요. 감사한 마음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2년이 거의 지난 이 시점에서 왜 이렇게 소통이 안 되고 문제가 더 커졌는가? 솔직히 현 정부에서 지금까지 기자협회와 또 관련단체 그리고 기자들과 얼마만큼 소통했는가, 이런 부분에서 저는 낙제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말씀하셨듯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진단을 여러 군데서 해주셨어요. 결국은 언론사 내부에 문제가 있을 수 있겠고 기자 개인의 문제, 그다음에 기자들간의 소위 소통의 문제, 그리고 언론사간의 문제, 그다음에 정부와 유관기관 그리고 언론단체와의 여러 가지 복잡한, 소위 커뮤니케이션 구조 자체가 지금 많이 막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언론사 같은 경우는 소위 수직적 통합구조지요. 단계를 보면 수습기자부터 사장님까지 단계별로 아마 15개 단계가 될 겁니다. 요새는 또 나이 많이 들었는데 안 나가면 자리를 만들어서 무슨 선임기자, 뭐 해서 만들다 보니까 한 16개, 17개 되더군요.

지금 세상은 굉장히 수평적으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우리 언론사 내부구조는 여전히 과거의 효율성에 기반한 수직적 구조입니다. 그런데 ‘야, 이것 기사 써. 이것 이렇게 잡아보라’고 하는 것들이 요새 젊은 기자들한테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있고 내가 있는데 왜 옛날 방식의 생산시스템을 나한테 적용하느냐’는 반발이 있고 그것이 일종의 ‘세대격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금 소통이 굉장히 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촛불시위를 계기로 특정언론에 대한 무차별공격, 그리고 특정단체와 언론사 간의 연대, 이런 편 가르기 현상이 더욱더 우리의 소통구조를 왜곡시키는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위 정책홍보 라인도 대단히 나이브하게 접근했던 것 같아요. 옛날의 국정홍보처라든가 공보처 기능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소위 정부조직 슬림화 원칙에 따라서 이것을 지나치게 잘라내다 보니까 청와대에 전화 한 통 해도 받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런 문제점이 누적되어서 얼마 전 홍보수석실을 만들었습니다만, 소통의 막힘 현상이 나타나 소위 언론정책이라는 것이 입안부터 실행까지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문화부 2차관실에서 그 큰 언론정책을 총괄해버리는 아주 이상한 상황이 벌어져버린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언론계 내부의 소위 편 가르기는 더욱더 커지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언론의 여러 문제를 너무 어떤 특정한 가치로 재단해버리는 것도 있어요. 특히 자유시장 논리 굉장히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유럽 대부분의 언론학자나 그 매체종사자들은 공익이라는 개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유시장 논리가 잘못하면 전체주의 논리로 갈 수가 있어요. 히틀러가 그 똑똑한 독일민족 끌고서 유대인들을 그렇게 학살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전체주의 아닙니까? 그리고 다수결원칙이라는 것을 굉장히 강조해서 다수가 51 대 49라는 논리를 앞세우다 보면 소를 희생시키고 다수가 진리라고 하는 왜곡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러한 시장주의 논리에 편승하다 보니까 아까 말씀하신 대로 지방신문과 방송 또 마이너신문, 그리고 메이저신문, 방송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막 무너져서 소위 생계적 기반이 붕괴되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 한국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소수를 좀 배려하는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는데 그런 것이 좀 부족하다는 거지요.

언론의 정치과잉, 이념성 이런 것들도 지금 굉장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논의는 많이 했으니까 생산적인 소통을 어떻게 할 거냐 그리고 아까 모두에 말씀드린 대로 미디어 경제학적 입장에서 소위 저널리즘의 경제적 안전망이 어떤 게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결국은 기자가 ‘아,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이 옳고 내가 사실과 객관보도를 해야 되니까 내 주관대로 가겠다’고 하더라도 직업적 안정성 확보가 되어야겠지요. 그 안정성이라는 것은 소위 실직이라든가 명예퇴직이라든가 회사에서의 위상변화라든가 이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작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자들이 이중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운 여건하에서 직업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부분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에서 배웠던 것을 가지고 그동안 몇 년 써먹고 다 털어버렸는데 재교육을 하지 않아 전문성이 떨어졌는데 나이도 들어서 나가라고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떨려나지 않으려는 기자들의 어떤 보호본능이 맞물려서 지금 더 눈치 보게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객관적인 사실보도라는 것은 어떤 경우도 지켜야 될 저희들의 가이드라인이고 언론인으로서의 기본준칙이지요. 그런데 전부 다 객관적 보도를 한다고 합니다. 과연 ‘객관적’이 존재할 것인가 하는 그런 논쟁은 있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기자들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새는 뭐 스토리텔링 얘기를 하니까 스트레이트 박스 막 뒤섞여서 논평인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하는 스트레이트 뉴스인지 모를 정도로 폐해가 있습니다만, 아무튼 어떤 경우도 객관적인 사실보도를 한다는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구체적인 방안이 뭐가 있을까? 경영과 보도가 지금 혼재돼버린 이 상황이 굉장히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주, 경영주의 방침 자체가 완전히 기자, 수습기자의 머리까지 지배해버리는 이 구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경영과 보도의 분리 방안은 없는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고민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거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먹고살아야 되니까 경영의 논리에 보도의 논리가 지배되어 버리는 그런 상황이 오다 보면 결국 기자의 어떤 정신 또는 저널리즘이라는 어떤 기본적인 것마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러면 분리가 불가능하다면 어떤 방법론이 있을까, 이것을 우리 선배님들께서도 한번 고민해주시고 대안이 있는가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소통구조도 역시 새로운 흐름에 맞게, 즉 ‘디지털 패러다임’이라는 구조에 맞게 수평적 구조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많이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과도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MBC라든가 중앙일보 같은 경우는 지금 에디터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데 굉장히 혼란스럽지요. 과거방식이 좋은데 왜 자꾸 피곤하게 하느냐, 이런 개념인데 어차피 세상의 흐름이 기술이 추동하는 패러다임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소통구조도 수평적 구조로 가려는 노력을 해야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부 학계에 계신 교수님들을 중심으로 ‘저널리즘스쿨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나의 교육기관이 되겠지요. 수습기자부터 경력기자 또 은퇴하신 대선배님까지 한곳에서 만날 수 있는 소위 교육기관, 이것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신방과 교수님들이 여기 계시지만 신방과 나온 기자들 다 다시 교육시켜요. ‘신방과에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기사 하나 못 쓴다’ 이러한 지적을 받습니다. 그래서 학계와 몇십 년 동안 필드에서 취재하셨던 언론인들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믹스되어서 하나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 저널리즘스쿨 아니겠습니까. 교수님들이 시도하셨는데 여러 가지 재정적인 문제가 있고 또 기자들의 교육문제 이런 것들을 지금 하고 있는 어떤 기관에서 내놓지 않으려고 그래요. 그렇지만 저널리즘스쿨 같은 것을 만들어서 수습기자들에게 공통적인 OJT 교육을 시켜놓고 나머지는 회사에 가서 사시에 맞는 교육을 하든지 하면 경비의 효율성에도 도움이 되고 기자들의 어떤 동료의식이라든가 이런 것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존에 수십 년 동안 해오셨던 선배언론인들의 경험을 후배기자들이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배울 수 있는 그런 공간도 되겠고요. 또 석ㆍ박사 과정을 각자 할 수도 있고 해서 저는 저널리즘스쿨이 좀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두환정권 때 프레스카드에 대한 하도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런 용어 사용하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프레스카드 도입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언론재단의 지난 9월 통계에 의하면 언론사에서, 인터넷까지 포함해서, 기자 내지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대충 5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희 기자협회에 가입한 144개 언론사 기자는 8,000명이 조금 안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까 말씀하셨듯이 많은 언론사가 재정적으로 굉장히 취약해서 봉급을 제대로 못 줍니다. 지금 1도1사 하던 언론사들도 거의 봉급을 제대로 못 주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인지 뻔하지요. 그런데 전부 명함 들고 나와서 기자라고 하면 모든 국민은 그들이 모두 기자협회 소속 기자인 줄 알아요. 이제는 어떤 권력, 정치권력에 의해서 지배받는 프레스카드가 아니라 기자들 스스로 기본적인 인증을 받아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까 말씀드린 저널리즘스쿨이라든가 이런 데서 기자로서의 기본적인 교육을 이수했을 경우 기자로서 인정하는 게 좋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선배님들이 해당될 겁니다만 미국에 가보면 언론인들이 퇴직해도 프리랜서로 활동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퇴직하면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영역에서 지식을 가지고 기사를 써오셨던 것을 우리 후배기자들이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전문언론인 풀을 만들어 활용하는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언론단체 대표자회의체를 한번 신설해서 하는 방향도 있겠고요, 그다음에 정부 홍보조직도 이제는 언론장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좀 일원화해서 효율적인 대국민 홍보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홍보조직의 체계화가 필요하겠고요.

아까 말씀드린 언론인들의 퇴직 후 안정망, 그러니까 현직기자들도 ‘내가 나가더라도 기본적인 것은 해결할 수 있다’는 기자 복지를 위한 기금확충 방안에 대한 논의가 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인공제회 문제는 언론단체간에도 이견이 있고 또 워낙 기자들 내부에서 갈등을 겪다 보니까 지금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프레스센터 부분도 역사성을 보면 관훈클럽이나 기자협회가 연고권이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초과되는 것 같아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소통이라는 것이 언론인들의 기본책무인데 그것이 단절됐을 경우는 대단히 문제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언론인 개개인의 부분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언론사 내 구조, 그다음에 유관기관, 언론단체 또 특히 정부까지도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서로의 노력이 구조적으로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언론인들의 직업적 안정성이 확보되고 그다음에 저널리즘의 기본이 흔들리지 않고 어떤 중심을 잡아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한다면서 상대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그런 극단적인 가치관이 우리 언론사에 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앞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거죠. 미디어법도 역시 절대 안 된다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인데. 그래서 갈등을 좀 조정할 수 있는 어떤 타협의 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발제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오늘 여러 선배님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드린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 다음은 김경호 한국기자협회 회장이 토론회를 위해 미리 준비한 주제발표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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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의 생산적 소통구조를 위한 대안 모색>1)

김경호(한국기자협회 제41대 회장)

 

들어가는 말

사전적 의미로 소통(疏通)은 ‘막힘이 없이 서로가 통한다’는 뜻이다. 영어로 보통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체 내에서 혈액이 제대로 돌지 않으면 건강을 잃듯이 사회체계도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정성과 혼란이 증대되어 결국 시스템 자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어느새인가 ‘소통이 너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무성하다. 특히 언론계 안팎에서 ‘대화의 단절’ 내지 ‘소통의 부재’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나돌았고, 이는 곧 사회적 관계의 단절로 나타났다. 특히 이명박정부 출범 후 우리 사회에서 너무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더욱 무성했다. 한마디로 ‘말이 안 통한다’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보는 시각에 따라 진단과 처방이 다를 수 있겠으나 우리 사회의 소통부재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소통부재는 역대 어느 정권이든 존재해왔고, 따라서 언론이나 위정자들이나 소통을 가장 현실적인 과제로 인식해왔다. 과거 권력과 언론계 안팎에서 소통을 위한 수많은 논의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온 것도 사실이다. 일례로 노무현정부에서는 대통령이 토론회 내지 회견을 통해 직접 대국민 소통을 시도한, 이전에 보기 어려웠던 사례도 있었다. 포퓰리즘이냐 논란을 빚기도 했고, 대통령의 권위를 잃는 것 아니냐고 할 정도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사회적 쟁점이나 현안 등 국민적 관심사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장이었다는 평가도 많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극심한 소통부재는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론계도 갈수록 소통의 단절이 두드러졌다. 90년대 중반 광고시장 축소와 매체간 무한경쟁이 가속화되며 끊임없는 반목과 단절이 증폭되면서 동료기자간, 언론사간 소위 ‘동업자 의식’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기자간, 언론사간 공격이 지면과 전파를 탔고 취재현장에서 매체에 따라 취재기자간 이견과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반면에 대기업 등 다른 분야에서는 선의의 무한경쟁을 하는 구도가 정착되고 오히려 ‘동업의식’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기업 내에서 상하좌우로 끊임없는 이어지는 네트워크 소통구조는 기술정보화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언론계 내부에서도 이 같은 새로운 소통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뉴스정보 생산주체인 언론사 내 보도국과 편집국에서 최근 에디터제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서구식 소통구조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지만 내적인 소통구조 변화와 아울러 외적 변화를 담아내는 소위 삼투압식 소통방식은 아직도 미흡한 실정이다. 여기서 어떻게 서로간 벽을 허물고 자연스럽게 소통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기존 방식대로 소통할 것인가? 아니라면 생산적 소통구조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생산적 소통의 기술은 존재할 수 있는가?

소통이란 용어는 조작적 정의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복잡다난한 개념이다. 아마도 소통구조는 분석단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언론계의 경우 기자 등 언론에 종사하는 개인, 그리고 언론사 또는 언론단체, 정부유관기관의 안팎을 잇는 소통이 분석의 기초단위가 될 수 있다. 기자 개인의 내적 커뮤니케이션은 곧 자신의 사내 위치와 신념과 가치관, 이념, 사시, 처우 등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이를 내면화하여 이를 기반으로 취재와 편집, 기사작성 등의 언론활동을 벌이는 주체다. 그런 점에서 기자를 포함한 언론사 등 언론기관 및 유관단체 활동은 곧 언론인 개개인과 조직과의 관계에 끊임없이 소통을 하며 언론과 관련된 사회적 관계를 생성해 나가게 된다.

기자 개개인은 자신 내부와 끊임없는 소통, 즉 비언어적 소통인 내적 커뮤니케이션(intra­communication)을 하게 된다. 전술한 대로 언론사라는 조직 내에서의 자신의 위치, 진로, 동료와의 경쟁, 사시 등 언론사가 개인을 틀 잡는 구조에서 움직이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변수들을 놓고 내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틀 잡아가면서 언론활동에 임하게 된다. 나아가 동료는 물론 조직 안팎의 언론행위주체와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대인커뮤니케이션(interpersonal communication)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언론사나 언론유관기관에 종사하는 주체는 보통 내적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주체다. 자사 동료는 물론 타사 등 주변과 대인커뮤니케이션을 하며, 편집국 또는 보도국 내 각 부서 등으로 나누어진 집단 내에서는 집단 커뮤니케이션(group communication)을 한다. 나아가 소속사나 언론유관단체, 그리고 정부유관기관 등 비교적 시스템으로 짜인 조직 차원에서 조직커뮤니케이션(organization communication)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자 등 개인과 언론사는 최종적으로 대부분 독자나 시청자 등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매스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을 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2)

여기서 기자들은 자신과 내부 자아와의 끊임없는 내적 커뮤니케이션이 소통의 원천이 된다. 어떤 뉴스정보를 어떻게 수집하고 분류하고 기사화하고 보도할 것인가 하는 일련의 뉴스정보 보도과정은 그야말로 고도의 끊임없는 내적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런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면 소통은 급격히 감소하고 언론활동 자체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념과 주관, 그리고 언론사 방침, 취재원과의 관계설정 등은 이 과정에서 매우 복잡한 변수의 관계로 작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기사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쓴다면 어떤 방향으로 쓸 것인가? 취재원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식으로 의사결정을 앞두고 끊임없이 자기 내부에서 표출되는 갈등과정이 이에 해당된다.

소속사 내 또는 외부 인사와 소통하는 대인커뮤니케이션은 인간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두 사람 이상이 대화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언론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보수집 전달체계를 구축한다.

“무한경쟁이 가속화되고 기자로서의 사회적 위상이 약화되면서 언론활동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집단커뮤니케이션과 조직커뮤니케이션이다.3)  특히 조직커뮤니케이션에는 공식적 통로와 비공식적 통로 2가지가 있다. 공적인 업무수행에 필요한 정보는 주로 문서나 회의 등의 공식적 통로를 통해 전달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공적인 업무와 관련된 정보라도 비공식적 통로를 통해 유통되기도 한다. 조직에서의 정보는 발신인이나 수신인의 지위와 역할이 규정하는 대로 전달되는 것이 상례이지만 혈연이나 지연, 혹은 개인적 친분관계 등의 비공식적 통로를 거쳐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 (오택섭 외, 2003)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를 비롯한 언론종사자는 자신과의 내적 커뮤니케이션을 시작으로 대인, 그룹, 조직 커뮤니케이션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주체로서 ‘소통의 주체’이기도 하다.

소통이라는 다소 막연한 개념을 논의하기에 앞서 편의상 ‘언론인의 개념’을 ‘기자’로 한정하고 분석단위는 기자 개인(내적 커뮤니케이션), 언론사 내 및 언론현장(대인커뮤니케이션 및 집단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언론사 및 언론유관단체, 정부유관기관(청와대, 문화관광체육부:조직커뮤니케이션) 등 3개 영역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이명박정부 출범 후 언론계 소통구조 진단

2008년 이명박정부 출범은 언론계 소통구조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언론사 내에 존재해왔던 뉴스생산 방식의 비효율성이 노출되고 구성원간 가치관 충돌은 내적 모순으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광고시장 축소와 새정부의 시장주의 논리는 언론계 지형을 뒤흔들었다.

10년 만에 진보에서 보수정권으로 정치권력이 교체되면서 그동안 언론사에 비균질적으로 내재되었던 이념적 지향성이 일시에 폭발하는 전환기를 맞았다. 나아가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무려 800만표가 넘는 압도적 지지로 출범한 이명박정부는 예상 밖의 엄청난 표차에서 정치적 과신을 한 탓인지 초기부터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등의 이념적 편가르기를 본격화했다는 지적도 많았다. 이에 따라 ‘잃어버린 10년’이란 거의 과거단절에 가까운 정책드라이브가 계속 이어졌고, 언론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보수와 진보매체 간 반목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아울러 새정부가 언론에 미국식 자유시장 논리를 대입함으로써 이념과 생존의 두 과제가 언론계 최고현안으로 부상하였다. 이 2가지는 전ㆍ현직 기자를 포함한 언론인들의 갈등을 과거 어느 때보다 증폭시키면서 소통이 시급한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1) 언론사 경영전략 부재:수직­수평적 소통구조 혼재

신문과 방송사로 대별되는 언론사는 전통적으로 편집국장 또는 보도국장 1인 중심체계로 작동되는 시스템이다. 기자와 데스크는 일종의 상명하복의 일사불란한 수직적 통합체계의 구성원이며, 적은 인원으로 외부의 뉴스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집ㆍ가공ㆍ배분하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마감시간을 최우선 가치로 하기 때문에 소위 기자-차장-부장-국장으로 이어지는 상하관계가 가장 두드러진 조직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뉴스정보를 언론이 독과점하거나 고급정보에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던 과거 아날로그 시대에 적합한 모델이다. 미공개 정보나 정치권력의 정보통제의 벽을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은 지사적 언론관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취재관행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80~90년대 사건기자의 ‘특종’ 취재방식이 대표적이다. 취재명령이 떨어지면 그 명령은 하늘이 무너져도 어떤 완결성을 띠는 결론을 도출해야만 되는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취재의 동력이 되었다.

이에 반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취되고 정보가 대부분 공개되는 디지털미디어 사회에서 이러한 수직적 통합구조방식은 항상 효율적이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4)  뉴스정보가 대부분 인터넷 등 디지털미디어에 공개되는 상황에서 수용자는 대부분 이미 접한 뉴스정보를 기반으로 신문과 방송미디어를 접하는 이중성에 빠진다. 오히려 현장의 취재기자들은 물론 수용자들은 다양한 정보를 다양한 방식으로 개성 있게 취재하고 가공해 보도하길 원하고 있다. 틀에 박힌 상투적 보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현장기자들은 다양한 취재원으로부터 같은 뉴스정보를 취재하더라도 이를 자유롭고 창의적인 시각에서 중견데스크와 협업을 통해 가치 있는 새로운 뉴스를 보도하길 원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일종의 일방적인 상의하달 방식이 아닌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적합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수십년간 가동되어온 기존 뉴스취재 방식은 이를 극히 일부만 허용하는 탓에 언론사 내부에서 미묘한 마찰이 벌어지게 된다. 즉 전통적인 뉴스생산방식을 가장 효율성이 있다고 믿으며 ‘내가 선배들에게서 배운 방식이 가장 좋다’는 권위적 사고를 가진 데스크와 일선에서 뉴스정보를 취재하는 현장기자들 간에는 뉴스취재 방식에서 상당한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데스크 보조 내지 데스크급인 고참 차장급 이상 간부와 일선 취재기자들의 연차는 대략 10~15년 정도 벌어지게 마련인데 이 경우 상당한 세대간 차이(generation gap)가 나타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이중성이 현재 언론사의 최대 과도기적 취약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에 따라 각 언론사는 네트워크 사회 이양에 따라 아날로그식 뉴스생산에 익숙한 데스크급 기자와 90년대 후반 입사한 젊은 기자들과의 마찰과 간극을 줄이고 다양한 뉴스정보를 조직 내로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언론사들은 사별로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여전히 출입처주의에서 데드라인에 함몰된 과거 뉴스생산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한마디로 수직적 통합구조와 수평적 통합구조가 혼재한 과도기적 이중적 생산구조는 언론사마다 항아리형 인사 적체와 더불어 고비용ㆍ저효율의 구조로 남아 있다.

 

2) 이념적 충돌

지난해 촛불시위를 전후로 보수매체와 진보매체 간 대립과 갈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현실에서 이념적 대립은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념은 정치와 맞물려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적 가치로 자리잡고 있다. 이미 이념의 잣대는 언론사간 경쟁을 벗어나 단순한 대립이나 갈등, 오히려 적대적 관계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는 이념적 지향성이 정권교체와 맞물려 충돌한 결과다. 지난해 촛불시위 등에서 보았듯이 보수신문과 진보매체의 극한충돌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문제는 언론사간 관계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정언론사의 이념적 충돌과 적대감은 취재기자 등 해당언론사 구성원간 대립과 적의로 비화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 보았던 일종의 ‘기자=동종업’라는 연대의식이 철저히 깨져버렸다는 사실이다. 물론 2000년 김대중정권하에서 특정신문사에 대한 세무조사와 발행인에 대한 형사처벌로 언론사간 극한갈등을 발생시켰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현장에는 나름대로 ‘우리’라는 기자간 연대의식이 잔존해 있었다. 특히 지난해 촛불시위 현장에서 나타난 언론사와 기자의 이념적 정파성은 언론계의 결속구조를 급격하게 해체해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3) 대국민 정책홍보 라인의 혼선

이명박정부 출범 후 국정홍보처와 청와대 홍보수석실 폐지는 언론과 정치권력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이었다. 특히 국정홍보처는 ‘기자실 파동’의 주범으로 낙인찍혀 출범과 동시에 폐지가 되어 문화관광부 조직으로 흡수통합되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 역시 ‘정부조직 슬림화’라는 명분 아래 축소되어 사실상 언론과 청와대 및 정부부처 간 소통라인은 급작스럽게 경맥동화 현상을 빚게 되었다.

집권 2년차인 2009년 중반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예전으로 환원되었지만 언론과의 소통은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력과 우호적인 극소수 매체 위주로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국민들의 정책 체감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나만 잘하면 국민이 알아준다. 그런데 굳이 홍보조직을 동원해 나를 알릴 필요가 있느냐’라는 매우 나이브하거나 겸손한 입장으로 언론관계를 생각했다는 점이 대언론정책 부재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홍보수석실 축소와 국정홍보처 폐지는 정부정책에 대한 언론의 이해를 높이는 데 실패하였고, 집권 후 대국민 설득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등장했다. 대정부정책의 골간이 빠진 채 부분적으로 정책이 쏟아져 나왔고, 설익은 정책은 언론으로부터 집중 비판받는 수순이 이어졌다. 뒤늦게 소통부재를 느낀 나머지 정부의 대언론 전담인 문화관광체육부 2차관실이 언론정책 전반을 관장하는 실세부처로 부상하며 언론과 현 정부와의 소모적 논쟁과 갈등이 증폭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 정부의 언론과의 소통정책은 공식적인 채널이 아니라 비공식적 채널, 다시 말하면 지연이나 학연, 이념적 동질성이 높은 소수의 이너서클 등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여기서 언론정책이 입안된다는 점이다.

 

4) 언론비판 배제와 극심한 편가르기

언론은 정치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권력은 언제나 언론을 순치시키거나 장악하려는 관성을 갖고 있었다. 박정희정권은 물론 전두환ㆍ노태우ㆍ김영삼 정권, 심지어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등 진보정권조차 대언론관계를 매우 중시하였다. 역대정권들이 언론의 대국민 홍보를 최우선 정책과제로 꼽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정권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대국민 홍보에 대한 방법론 및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대개 인수위 출범 직후 대통령의 최측근 내지 실세를 홍보수석 대변인으로 임명함으로써 언론에 대한 직ㆍ간접적 또는 유ㆍ무형의 장악력을 제고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정부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럴듯한 명분만 있다면 절차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매우 평면적인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집권 초기 벌어진 촛불시위사태로 정권출범 초반에 강력한 추진력을 잃는 것이 아니냐는 극심한 불안감 속에서 언론정책을 추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좌파와 우파’ 등 극단적인 용어를 앞세운 이분법적 논리와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편가르기가 급속히 부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KBS나 YTN 사태다. 결국 출범 초기 ‘잃어버린 10년의 청산’이란 명분에 집착하다 보니 극단적인 이분법, 편가르기 시각으로 언론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표면화되었다. 특히 언론 외에도 경실련 등 무려 1,800여개 시민사회단체를 반정부단체로 규정하고 적대시함으로써 스스로 정치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5) 보편성과 특수성의 부조화

이명박정부는 출범 이후 자유시장정책을 언론정책의 근간으로 삼겠다고 강조해왔다. 경쟁과 자율일 뿐 정부는 어떤 영역에서도 규제하거나 간섭할 의도가 없다는 점을 누차 강조해왔다. 경쟁과 자율과 자유시장 논리는 일견 매우 타당해 보인다. 국내 언론시장의 과포화 상태나 비정상적으로 높은 광고협찬 비중은 언론의 정상적 기능을 가로막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정상성은 이미 언론의 정기능에 매우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으며, 실제로 수도권은 물론 지역에서도 가시화되고 있다.

하지만 보편성과 특수성 문제를 동시에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언론은 정치권력에는 매우 불필요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언론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구조는 이미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다. 특히 민주주의는 언론의 여론형성 기능에 담보되지 않으면 그 순간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특히 다수결원칙은 민주주의의 기본이지만 형식논리에 빠질 때 이미 전체주의의 도구로 변질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여론의 수용, 그리고 이에 따른 정당한 절차적 합리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허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어쩌면 매우 비효율적인 절차이고, 자칫 형식논리에 빠질 수 있는 문제점을 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현 정부 고위당국자들도 언론은 민주주의의 생명선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와 소수의 이해가 조율된 합의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은 항상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시장주의라는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놓치고 있다. 자유시장주의는 여론의 독과점 문제를 낳을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고 자유시장 논리가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자유시장 논리와 여론의 독과점 문제에 조화를 둘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여론형성의 틀이 무엇인가 하는 보편과 특수의 조화를 기하는 정책이 나와야 함에도 현 정부의 언론정책은 이러한 철학적 관점에는 그다지 천착하지 않는 듯 보인다. 오히려 철학적 관점보다는 정치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예컨대 중앙과 지역, 메이저와 마이너, 신문과 방송,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 등 수많은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여론형성 기능보다는 효율성에만 가치를 둔다는 비판을 받았다. 더구나 한국방송광고공사 해체와 민영 미디어렙 등에 대한 입장은 현실적으로 여론형성이란 측면에서 신중히 접근해야 할 것이다.

 

6) 언론의 정치과잉

한국적 상황에서 정치권력과 언론은 매우 복잡다단한 과정으로 쌍방간 관계를 설정해왔다. 정치가 모든 것의 상위개념인 한국사회의 토양에서 언론은 자연스럽게 새정부 출범 시 정치권력에 온 관심을 쏟게 된다. 특히 언론과 정치는 언론사의 부침과 정치권력의 역사적 평가와 밀접하게 상관관계를 갖는다. 과거 새정권 출범 때마다 그러했듯이 이명박정부 출범 후에도 언론사의 이해관계와 정치권력이 뒤엉키는 일정한 경향성이 드러났다.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상당수 언론사가 정치권력과 우호적 관계를 설정했거나 아직도 일정기간 탐색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권교체 시 언론사 고위 보도책임자는 물론 정치부장과 데스크, 청와대 출입기자 전면교체 등의 후속조치를 취함으로써 정권에 메시지를 보낸다. 새정권 실세와 이너서클(inner circle)의 접근경로를 확보함으로써 취재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권력핵심의 정보를 보다 원활하게 도출해내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동시에 정치권력 핵심에 ‘파워 프렌들리’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자사와의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보여왔다. 전술한 대로 언론사는 정권출범 시 언론사의 경영목표와 방향, 그리고 논조가 자사 이기와 직결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특정언론과 정권과의 관계는 대선 전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기 마련이다. 이미 대선캠프에서부터 우호적-중립적-비우호적(또는 적대적)이란 스펙트럼에서 언론을 관리해오고 있다.

이러한 관행은 여전하다. 과거 1980년대 특정신문사간 1, 2위 서열이 뒤바뀐 현상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역시 정권과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명운을 가른다는 점을 인정하고, 실제로 그러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현 정부에서도 소위 신문­방송 겸영문제는 단순한 디지털 패러다임 도래에 따른 미디어시장 변화를 넘어서 고도의 정치적 거래가 될 수밖에 없다. 종편과 보도채널 등의 허가권을 따내기 위한 언론사간 경쟁은 이미 정치과잉을 자초하고 있다. 적극적 우호관계에서 비판적 우호관계, 그리고 절대적 갈등관계까지 언론사의 포지션이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다. 과거에도 지역민방 선정부터 통합방송법 시행 등 각종 미디어정책은 언론사들을 술렁이게 했으며, 권력은 이를 지렛대 삼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를 이용해왔다. 언론도 군사독재 등 역사적 악몽 탓인지 모든 것을 ‘음모론’적 시각에서 접근하다 보니 미디어시장에는 정치뉴스 과잉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언론의 생산적 소통구조의 대안

1) 저널리즘 위상 재정립

① 직업적 안정성 확보

기자의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매체 시대에 매체 수가 급증하면서 기자 등 언론인 수도 크게 늘었다. 더구나 과거와 달리 뉴스정보가 대부분 공개됨으로써 언론인의 사회적 영향력도 매우 줄어들었다. 더구나 매체 증가와 광고시장 축소는 언론사의 재정적 부담을 증가시켰고, 부담은 고스란히 기자 등 언론인들의 몫이 되어가고 있다.

모든 현업기자들이 느끼듯이 실직 및 명예퇴직의 불안감이 늘고 있고, 퇴직 후 안전망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럴 경우 현직에 있더라도 퇴직 후 미래는 매우 불투명하고, 이로 인한 기자로서의 자긍심이나 소명의식은 매우 퇴색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자로서의 가치관이나 소명의식보다는 개인으로서 이해관계에 함몰될 위험성이 크고 결국 언론사 내는 물론 언론사간, 대외적 관계에서 소통의 부재가 더욱 공고화된다. 언론인으로서 기자의 직업적 안정성을 담보하는 방안은 결국 기자로서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보장하는 것이다. 나중에 논의되지만 기자의 직업적 안정성은 해당언론사의 재정적 자립도와 직결되지만 기자공제회라든가 언론인연금 등 공적 부조 제도와 깊이 맞물려 있다.

② 기자의 전문성 제고

‘우리는 왜 백악관 출입기자같이 머리가 하얗게 센, 연륜 있는 기자들이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술한 대로 최고의 엘리트 인재들을 데려다 가장 경쟁력 없는 존재로 전락시켰던 기존 언론사 충원시스템을 보완하는 방식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언론사는 수습부터 일정기간 동안 재교육 없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나 역량을 급여 외에는 별다른 비용지급 없이 빼먹기만 하는 소모적 인력운용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개인의 능력이 출중하지 않는 한 일정 직위에 오르거나 일정 연령에 다다르면 퇴사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 경우 다른 언론사 역시 동일한 문제에 봉착해서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해당기자를 영입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5년차 전후의 일선기자들은 언론사간 벽이 상당히 낮아졌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벽은 여전히 높다.

이러한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입사 초부터 전문기자를 양성하여 특정언론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고유영역을 지키도록 해서 경쟁력을 갖추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서 90년대 후반기에 전문기자제를 도입했지만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는 내부비판이 있었다.5)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다매체ㆍ다채널 시대에 들어간 지금이야말로 전문기자제가 빛을 발하는 시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수습 외에도 언론사에서 10년차 이상에서 전문기자를 선택하도록 해서 ‘언론사 기자=천직’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소품종 대량생산이 아니라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다. 기자도 뉴스상품을 생산하는 주체다. 누구나 다 쓰는 뉴스정보가 아니라 나만이 쓸 수 있는 뉴스정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것이 전문화다.

③ 객관적 사실보도

저널리즘의 생명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사실보도다. 사실(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보도는 사실상 저널리즘이라 볼 수 없다. 물론 논평이나 해설은 어느 정도 기자 개인의 주관과 의견이 개입되겠으나 역시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지 않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사실보도가 아닌 왜곡보도에 대한 목소리가 여전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자성할 일이다. 소위 주제(야마)에 맞춰진 기사는 매우 위험하다. 사물을 보는 시각에 따라 인지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듯 컵을 옆에서 보느냐, 위에서 내려다보느냐 하는 것과 같다.

솔직히 언론이 사시나 자사이기, 특정 목적성에 치우쳐 객관적 사실을 선택적으로 취합하여 기사를 작성하는 이른바 야마 기사가 독자나 시청자의 신뢰 하락은 물론 한국 저널리즘의 위상을 추락시킨 주요인이다. 똑같은 사실을 취재하고 제각기 다른 방향의 기사가 나오는 자체를 둘러싸고 무엇이 사실보도인가라는 논쟁이 촉발되는 요인이다.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보도는 저널리즘의 요체다.

 

2) 언론사 내 그리고 언론사간

① 경영관리시스템 정착:경영권과 보도권 분리

신문과 방송 등 언론사는 ‘최고의 엘리트, 정말 똑똑한 사람들을 데려다 바보 만드는 곳’이라는 말이 학계에서는 정설로 굳어져 있다. 왜 이런 불명예스런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

과거 언론사는 그야말로 언론권력이었다. 언론사는 권력자로 군림하고 기자 등 구성원은 권력의 시행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언론사 내에는 ‘기업이 아닌 기업으로서의 미묘한 관행’들이 생겨났고 그 관행은 때로는 비기업적이고 비사회적이고 비국민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언론사에 그야말로 ‘경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대학에서 우수한 인재를 뽑아다 수습기자부터 시작해서 일정기간 재교육 없이 현장에 매몰시켜 놓고 일정연령이 되면 급기야 능력 없는 자로 낙인찍어 내보내는 조직이 바로 언론사였다.

언론환경은 급변하는데 이에 대한 경보기능이 상실된 채 언론권력자로서의 지위만 고집하는 비전문 경영방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서 경영권과 보도권 분리는 어떤 형태로든 정착되어야 할 과제다. 물론 사원주주제 등 여러 형태의 방식이 이전에 제기되기는 했지만 이는 경영적자를 탈피하기 위한 마이너 매체의 궁여지책이었을 뿐이어서 실패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경영과 보도의 분리가 매체의 신뢰를 확보하고 이로 인해 영향력이 확보될 것이다. 보도=권력이라는 등식이 존재하는 한 경영권과 보도권 분리는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영과 보도의 분리는 매체의 신뢰와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지금처럼 경영과 보도가 혼재되어 있는 한 수용자의 신뢰는 계속적인 하락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다시 말해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맡고, 보도는 기자출신이 하는 식의 역할분담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항간에 ‘언론사가 망하는 지름길이 2가지 있다. 기자출신이 경영을 맡거나 기자출신이 아닌 사람이 보도를 맡는 것’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도는 것도 이유다.

② 소통구조 전환:수직적 구조­수평적 구조

수습기자를 포함한 일선기자들과 중견급 기자 등 데스크 간에 ‘말이 잘 안 통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세대차가 가장 주요한 변수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세대차는 기자훈련을 받았던 시점과 방식의 차이가 조직 내에서 소통의 단절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즉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 세대와의 간극이다. 상명하복의 종적 커뮤니케이션을 체득했던 중견간부들과 개성과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는 일선기자들 간 인식론 차이일 것이다.

우리 언론사 내에는 여전히 상명하복의 수직적 통합구조가 엄존하고 있다. 기자-차장-부장-부국장-국장-본부장(대우에다 위원 자리까지 포함하면 최소한 12단계 이상) 등으로 이어지는 위계질서는 데스킹 기능과 맞물려 하의상달보다는 여전히 군대조직 같은 상의하달의 명령구조에 가깝다.

기존 편집국과 보도국 등 뉴스정보 생산구조를 위한 소통도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기자 등 구성원들이 창의적이고 자율적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보도할 수 있는 내적 소통구조를 갖추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수직적 통합구조가 아닌 수평적 통합구조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MBC나 중앙일보의 에디터 시스템 등이 될 수 있다. 많은 언론사에서 에디터제 등 수평적 구조로의 전환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이유도 이러한 수직적 통합구조의 관성이 굳어 있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급변하는 외부환경을 능동적으로 수용해내는 삼투압 기능 없이는 해당언론사가 경쟁력을 갖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③ 저널리즘스쿨 설립

한국언론재단이 시행하는 수습 중견언론인 연수프로그램은 매우 시의성 있고 적절한 방식이다. 하지만 미디어법 통과로 한국언론재단은 독임제 형태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 통폐합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분산된 신문유통원 등 언론유관기관을 효율적으로 통폐합하는 방식은 독임제 형태로서 이전의 언론재단과는 매우 다른 준(準)정부기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내년 초 출범할 언론진흥재단이 현 언론재단의 교육기능을 그대로 시행한다면 ‘준정부기관이 기자를 교육시키는’ 이해 못할 등식이 성립한다. 물론 앞으로 추진단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따라 예단하기는 어려우나 기존 언론재단이 그야말로 ‘재단’으로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갖지 못한 점에 비추어볼 때 언론진흥재단의 위상은 사실상 문화부 산하기관으로서의 역할에 그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언론인, 특히 기자들에 대한 교육은 철저하게 언론사 내지 언론유관단체들이 공동으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관훈클럽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기자협회 등 순수 언론유관단체에서 언론인 교육을 담당하는 것이 언론의 중립성과 객관성을 제고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언론유관단체가 언론학계와 공동으로 저널리즘스쿨(Journalism School)을 설립하고 재원을 언론진흥재단에서 지원하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저널리즘스쿨이 정착단계에 들어갈 경우 언론사가 선발한 기자에 대한 위탁교육을 해서 주요 언론사들이 참여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이 경우 각 언론사의 사시나 이념이 다른 만큼 탐사보도 등 매우 객관적인 프로그램만 한정하여 일종의 OJT 방식으로 하되, 나머지만 해당 언론사에서 교육하는 것이 비용절감은 물론 중복교육이라는 비능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안이 도입될 경우 이념적 이해관계로 흩어졌던 조선ㆍ중앙ㆍ동아 등 보수매체와 한겨레ㆍ경향 등 진보매체 기자들 간 상호이해도를 높이고 사라진 동료의식을 제고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아울러 퇴직 내지 정년퇴임한 기자 등 언론인들이 현직경험을 토대로 후배기자를 교육하고 양성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본인도 석ㆍ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수습기자 외에 경력기자를 상대로 한 전문교육을 실시하고, 나아가 기자들을 상대로 석ㆍ박사과정을 공유할 경우 기자들의 질적 수준 향상은 물론 한국언론계에서 기자들 상호간 배려와 이해를 제고하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④ 기자인증시스템:프레스카드

다매체ㆍ다채널시대에서 언론종사자 수가 급증함에 따라 언론인의 범주가 매우 모호하다. 기존의 신문과 방송 외에도 인터넷매체와 케이블TV와 IPTV, PP 등 모든 영역의 수습기자들이 저널리즘스쿨의 일정 소양과정을 이수할 경우 이들에게 프레스카드를 제공하는 방안이다.

5공 당시 언론통제 목적으로 프레스카드제가 시행된 적이 있다. 그런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아직도 프레스카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자가 소수였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인터넷매체 등 뉴미디어 증가로 기자라는 이름이 이미 보통명사화되어 버렸다. 일정 저널리스트 교육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기자’라는 이름으로 현장에서 부딪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이비기자 문제도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중앙일간지와 방송기자를 중심으로 ‘기자라고 다 같은 기자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자’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속칭 ‘도맷값’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한 볼멘소리다.

해외 언론단체의 경우 국제기자연맹(IFJ:International Journalist Federation)에서 프레스카드를 발급하고 있다. 적정한 자격을 갖춘 기자를 채용한 언론사로 인정될 경우 프레스카드를 발급하고 이에 대한 각종 혜택을 주고 있다. 그리고 해외 어디서든지 이 카드를 보여주면 최대한 취재협조를 해주는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제도라고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무분별하게 기자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교육과정도 이수하지 않은 ‘기자’를 끌어들여 최소한의 기자로서의 이수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 일종의 인증제로서의 프레스카드다. 전국 144개 회원사의 기자들 8천명이 참여한 한국기자협회는 이미 IFJ 회원카드를 일종의 ‘프레스카드’로서 신입회원들에게 배포하고 있다.

이제는 언론계 스스로 ‘기자’라는 명칭에 대해 책임질 때가 되었다. 최소한 일정기간 취재윤리 등 기본적인 소양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⑤ 전문언론인 풀제:프리랜서 제도

한국언론사에서는 ‘퇴사=실직’이라는 등식이 여전하다. 개인이 수십년간 쌓아온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차단당하는 폐쇄성이 매우 강한 것이 한국언론계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 등 각 나라마다 소위 프리랜서나 대기자가 그야말로 언론사를 넘나들면서 기자로서의 소명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나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등 국내 언론단체에는 프리랜서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특정언론사에 재직했다는 이유만으로 타 언론사의 기자로서 역할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한 만큼 프리랜서 제도나 대기자 제도는 현실적으로 매우 필요하다. 관훈클럽이나 기자협회, 편협 등에서 일정자격을 갖춘 전직 언론인을 별도의 회원으로 공동관리하면서 이들의 분야를 각 언론사에 통고하고 일정기간 취재나 칼럼 등을 쓰도록 하는 ‘개방형 언론인 풀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3) 언론단체 및 정부유관기관

① 언론단체 대표자회의체 신설

전술한 대로 언론과 정치권력과는 숙명적으로 긴장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통상적 감시기능과 건전한 비판, 그리고 대안 제시는 언론으로서의 소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언론과 정치권력 간 소통은 매우 중요해진다. 양측 모두 상호간 입장을 전하고 이를 통한 상호 이해와 방향모색 등을 위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전 정권에서도 그랬듯이 이명박정부 출범 후 더욱 소통의 단절이 존재해왔다. 아무리 이념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지만 언론은 언론으로서의 지형을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된다. 특히 언론유관단체는 더욱더 그러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특정언론단체를 좌파나 우파, 진보나 보수 등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서로를 백안시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상황이 수없이 벌어졌다. 유관단체장의 개인적 소신, 이념이나 집행부 성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가변성이 너무 높은 탓이다.

언론단체는 객관성과 중립성을 담보한 순수단체로 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념적이고 정파적인 입장을 넘어 언론관련 현안에 입장을 갖는 단체여야 할 것이며, 결코 특정한 정치영역이나 이념영역에서 편중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100% 중립성과 객관성을 담보하는 순수 언론단체가 몇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실제로 완벽한 객관주의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언론사마다 객관과 중립을 주장하지만 이미 이념적 정파성에 깊이 파묻혀버린 경우를 너무 흔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객관과 주관, 중립과 편중의 문제는 복잡다기한 개념이고 현실적으로 매우 실현하기 어려운 가치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벽이라 하더라도 언론단체는 객관과 중립의 선에서 모두를 포용하고 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쟁점 또는 정치적 현안은 물론 청와대나 정부 관련부처의 핵심쟁점에 대해 입장을 조율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그것이 어렵다면 언론단체간 입장차이라도 서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시각차를 확인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정기적인 언론유관단체간 대표자회의는 소속단체간 이해를 구하고 단체간 단절을 막으며 최소한 상대방의 입장과 시각차를 확인하는 정상적인 소통구조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정부 홍보조직 일원화 및 체계화

이명박정부는 정권출범 시 국정홍보처를 폐지한 후 문화관광체육부에 일부 조직을 흡수시키고 청와대 홍보수석실 역시 대변인실로 축소시켰다. 특히 국정홍보처는 기자실 파동, 이른바 브리핑룸 도입 등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을 일방적으로 주도함으로써 기자사회 등 언론계의 거센 반발을 샀다는 점에서 별다른 검토 없이 폐지를 결정했다. 사실 일선 취재기자들을 길바닥으로 내몰았던 국정홍보처의 일방적 조치는 그야말로 언론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고, 지금도 기자들의 가슴엔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과연 기자실 통폐합 조치를 주도한 국정홍보처는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청와대 홍보수석실도 정부조직 슬림화 방침에 따라 없애는 것이 당연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집권과 더불어 노무현정부 때의 취재지원 선진화 조치를 통째로 폐기한 것은 명백히 잘한 일이지만 노무현정부로부터 배워야 할 반면교사식 교훈도 분명히 있다.6)

국정홍보처 폐지와 기자실통폐합 조치는 사실 별개의 문제다. 국정홍보처가 청와대 홍보수석실의 지휘 아래 참여정부의 언론정책을 맹종했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지만 국정홍보조직은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서는 필요한 조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는 점이다. 실제로 신한국당 당시 국정홍보처의 전신인 공보처 역시 정권의 홍보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언론과 정권 간의 기본적인 소통의 창구 역할을 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명박정부는 대국민 홍보기능이 상당부분 고착상태에 빠진 데다 이념적ㆍ정파적 이해관계로 일부 언론사, 그리고 일부 언론단체들과의 제한적 소통을 시도하다 결국 민심과 많이 동떨어진 정책 실행으로 인해 대규모 촛불시위와 KBS와 YTN사태 등으로 언론과 대립각을 세우는 우를 범했다. 언론과 언론단체에 사실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구하거나 설명을 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모든 측근들이 정책적 미스가 지적될 경우 ‘여전히 좌파가 잔존하고 있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최고국정책임자로 하여금 판단을 흐리게 하고 좌파척결이란 신념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YS나 DJ의 가신그룹도, 노무현의 386그룹과 같이 그야말로 ‘주군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내놓는다’는 헌신의 신념도 없는 권력핵심 주변의 소수실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소통을 제한하고 희생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뒤늦게 국정홍보처 같은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지만 청와대 홍보수석실 확대에 그쳐야 했고, 이로 인해 언론과 청와대 등과는 소통의 단절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정홍보와 관련된 부처나 해외홍보 기능, 국가브랜드 제고, 대국민 홍보전략은 낙제수준을 맴돌고 있다. 현 정부 출범 후 해외 교포사회에서 한국의 해외국가홍보 시스템은 거의 망가진 상태라고 힐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의 명분에 발목 잡힌 나머지 홍보수석실을 부활시키는 정도에 그쳤지만 과거 국정홍보처, 공보처 같은 정부 내 대외홍보조직을 확충하고, 청와대 홍보수석실도 기능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적인 과거단절이 아니라 좋은 것이면 다시 도입하고, 좋으나 잘못 쓰였다면 이제라도 제대로 쓰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실용주의다.

③ 기자복지기금 재정확충:언론인공제회 설립과 프레스센터 운영권

전술한 대로 기자들의 직업적 안정성은 매우 취약하다. 그런 점에서 교수나 경찰, 군인, 교원 등 다른 직능단체들은 자체적으로 공제회를 운영하고 있다. 반면 기자사회는 공제회를 갖고 있지 않다. 광고협찬시장 축소와 개별 언론사의 재정악화 등 어려움은 갈수록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자들의 복지를 위한 제도적 안전망이 시급하다. 더구나 연봉제 도입 등으로 과거와 같은 퇴직금제도 점차 사려져가고 있어 퇴직 시 무방비 상태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관훈클럽, 신문방송편집인협회, 기자협회 등이 주관하는 가칭 언론인공제회를 설립하고 출연을 받아 운영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아울러 현재 프레스센터는 관훈클럽, 신문협회, 기자협회, 신문방송편집인협회 등 언론운영주체들이 신문회관 대신 설립을 주도했던 만큼 운영권은 언론단체들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7)  하지만 5공 당시 한국신문회관 대신 프레스센터를 짓고 운영권을 사실상 정부가 가져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레스센터는 언론단체 주체로 운영되어야 하고 수익금은 언론인공제회 등을 통해 기자들의 복지기금으로 환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맺음말

소통은 언론의 생명이다. 그럼에도 소통의 단절 현상이 언론계 곳곳에서 심화되고 있다. 저널리스트로서 기자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직업적 안정성이 위협받는 상황이 곧 소통의 단절로 이어지고 있다. 저널리즘 그리고 저널리스트의 가치 자체가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면서도 현실적으로 약화되는 이중성의 영향이 크다.

이 같은 소통의 단절은 매체적 환경이 급변하고 이에 따른 저널리즘 위축, 그리고 한국이 처한 정치적 지형이 맞물려 더욱더 증폭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수의 매체가 정보를 독과점하던 과거와 달리 정보의 홍수 시대에 접어들면서 올드미디어는 갈수록 존재가치가 상실되기 마련이다. 이는 저널리즘의 존립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상업성을 최고가치로 무한경쟁에 들어간 미디어시장이 기존의 저널리즘 기반을 흔들고 있는 데다 한국사회의 정치적ㆍ이념적 편중성이 가중되어 단절의 벽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일부 언론현상을 정치ㆍ경제학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언론학자들은 저널리즘의 물적 토대의 붕괴가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로 분석한다. 과거와 같은 언론의 독점적 지위는 물론 독점적 지위가 가져온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는 현 상황에서 물적 토대가 허물어져 결국 극심한 생존경쟁이 가속화되고 급기야 구성원간 반목과 갈등이 표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 같은 언론계 반목과 갈등의 벽은 미디어시장 변화 외에 정치적ㆍ이념적 변수와 맞물려 더욱더 증폭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과 반목은 정치ㆍ경제적 시각에서 근원적으로 처방하지 않는 한 치유되기 어렵다. 기자 개인의 변화로써 반복과 갈등이 치유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언론사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한 이제 구성원으로서 기자 개인의 운신의 폭도 여기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념적ㆍ정치적 과잉이 정형화된 언론사의 경제적 기반 붕괴는 언론계 안팎의 소통의 벽을 더욱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복합적 요인이 있긴 하지만 소통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본령을 가려는 기자들의 자성과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과 함께 저널리스트로서 직업적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 마련, 부문별 소통의 틀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아울러 가치가 충돌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틀 안에서 타협과 조정을 통해 상호 배타적인 가치까지 조율해내는 타협의 정신이 중요한 저널리스트의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첨언하면, 다양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서로 인정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끝으로 언론과 정치권력도 숙명적으로 프렌들리할 수만은 없는 긴장관계이긴 하지만 구태여 갈등관계로 치달을 필요는 없다. 그런 만큼 청와대 등 정치권력은 지금이라도 ‘언론과의 소통채널을 제도화’하는 것이 다양한 가치를 조율해내는 민주사회의 주요한 틀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과 다른 이념과 주의ㆍ주장이라도 합리적이고 제도적인 틀 안에서 차분히 담아내고 조율해내는 소통의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언론이 저널리즘의 본령을 가는 것이 건강한 사회의 정도를 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정치권력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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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본고는 학술적 차원의 논의라기보다는 언론단체장으로서 재직 중 느꼈던 소견을 제시하는 문건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특정언론사나 특정인을 거명하지 않으려 하며, 특정언론사나 언론인, 정치인, 관료 등을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나 케이스를 일일이 제시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2) 언론학자들은 통상 communication이라는 용어를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고 영자 발음 그대로 ‘커뮤니케이션’으로 사용하고 있다. 70년대 초반 매스컴 이론이 국내에 본격 도입될 당시 커뮤니케이션을 소통, 대화, 화법 등의 개념으로 일부 번역하는 이도 있었으나 80년대 초 논란 끝에 ‘커뮤니케이션=소통’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후 커뮤니케이션은 TV방송 등 대중매체, 즉 매스컴을 포함하는 상위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3) 오택섭ㆍ강현두ㆍ최정호(2008), 《미디어와 정보사회》, pp. 17­22.

4) 기존의 신문과 방송사 보도국과 편집국은 빠른 뉴스가치 판단과 신속한 의사결정, 일사불란한 통솔, 강한 집단의식 고취, 교육훈련 강화 등 1인 중심체제의 장점과 연공서열, 위계문화의 효율성이 있었다. 반면 권위주의 관료화와 왜곡 발생, 뉴스가치 판단착오, 상명하복, 보직우선주의, 뉴스의 획일화, 조직폐쇄성, 환경변화 둔감, 전문성 약화라는 단점이 잔존해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경호(2008), “신문기업의 디지털화에 따른 공급사슬체계 전환에 관한 연구”, pp. 187­203 참고.

5) 손석춘, “전문기자제와 팀제”, 〈신문연구〉 통권 64호(1997), pp. 92­96 참고.

6) 이미숙, “이명박정부의 언론홍보, 노무현정부와의 차별성 갖기 위한 조건”, 〈관훈저널〉 통권 110호(2009년 봄호), pp. 82­88.

7) 한국기자협회보, ‘언론단체들 프레스센터 환수 나섰다’, 2007년 7월 11일자 1면.

 

이목희:김 회장님 감사합니다. 오늘 발표자 중에는 그래도 후배이신데 기자협회장을 맡다 보니까 복지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래서 좋은 것 같습니다. 기자들이 은퇴한 뒤에도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고, 복지문제 이런 것도 다 해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하실 말씀이 많은데도 시간을 잘 지켜주셔서 늦지 않은 시간에 1부 세션이 끝났는데요, 10분간 커피 브레이크하고 2부에는 토론자들이 토론하고 플로어에 계신 분들도 질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참석하신 분들을 위해 토론회가 끝난 뒤 만찬을 준비합니다. 10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휴식)

 

이창순:2부 토론은 4시 20분에 시작하겠습니다. 막간을 이용해서 제가 잠시 안내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토론회가 끝나면 바로 저희가 만찬을 준비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토론회가 끝난 뒤 저희가 준비한 만찬을 꼭 드시고 가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면 2부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목희:예, 감사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원로선배님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이렇게 계속 자리를 지켜주시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토론회 같은 데 가보면요, 처음에는 꽤 앉아 계시다가 나중에 2부 토론 하면 어떤 때는 세 분 앉아 계실 때도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2부에도 많은 분들이 계셔서 굉장히 좋습니다. 선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언론계를 위해서 계속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2부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1부에서 시간을 잘 지켜주셨는데, 2부는 더 잘 지켜주셔서 플로어에 계신 선배님들 말씀도 들을 수 있게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토론은 어떻게 하셔도 좋습니다. 자기 견해를 밝히셔도 좋고, 주제발표자에 대한 코멘트를 하셔도 좋습니다. 시간은 10분입니다. 그럼 최영재 한림대 교수님부터 시작할까요.

 

최영재(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제가 〈관훈저널〉에는 몇 번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렇게 관훈클럽에 나와서 직접 여러 선배원로님들 모시고 말씀드리게 된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관훈클럽의 어떤 포스를 느끼는 것 같아서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혹시 이야기하다가 실수하지 않을까 좀 두렵기도 합니다. 관훈클럽이 이목희 총무가 맡고 나서 많이 달라졌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좋은 자리에 이렇게 불러주셔서 영광이고 감사드립니다.

오늘 발제에서 남시욱 선생님, 김민환 선생님, 김경호 회장님, 세 발제 잘 들었고, 많이 배웠습니다. 좋은 얘기들이 너무 많아서 제가 어떤 이견을 달 일은 아닌 것 같고, 세 발제를 듣고 이른바 한국언론의 정파성 문제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말씀드리고, 그다음에 시간이 허락되면 해결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세미나 타이틀이 ‘벽을 허물자’인데, 결국 한국의 정파적 언론이 부닥치고 있는 3가지 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정파적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정치권력과의 종속관계의 벽입니다. 보수신문이 됐든, 진보신문이 됐든 독자들은 아침마다 편파적인 정치기사를 놓고 언짢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탄하기도 하고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적지 않은 정치기사가 소위 공격저널리즘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가차 저널리즘’(gotcha journalism) 형태를 띱니다. 많은 경우 정치기사들은 어떤 정파를 봐주거나 또는 I got you, ‘너 잘 걸렸어’ 하면서 공격을 해대곤 합니다. 저는 이 같은 가차 저널리즘을 ‘좀 손봐주기 저널리즘’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만, 어찌 됐든 이렇게 정치보도가 특정정파를 손봐주려 하고, 공격하려는 경향을 띠는 것은 그만큼 언론이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있다는 역설을 말하는 것 같아 결과적으로 독자들이 언론과 공감하는 데 어떤 벽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 정파적 언론의 벽은 소위 언론전쟁의 벽입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 언론계 선배님 세대에는 아마 진보언론에 계시든, 보수언론에 계시든 개인적으로 반목하거나 그런 일이 없었을 겁니다. 제가 지난 노무현정부 때 기자실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정부부처 기자실에 들어가서 기자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요즘 기자들은 기자실 내에서 소위 정파가 다른 신문사 출신 기자들끼리 밥도 안 먹는 그런 풍토가 생겨났습니다. 같은 출입처에서의 그 같은 기자들의 반목은 결국 지면에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서로 다른 정파적 언론들간에 척을 지고 벽을 치는 일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정파적 언론의 벽이라는 건 내부의 벽인 것 같습니다. 소위 모든 신문이 ‘正論紙’, 바를‘正’ 자의 정론지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치‘政’ 할 때 ‘政’자의 정론지가 되면서, 그것도 편파적으로 정치를 논하는 정파지가 되면서 이른바 옳은 언론, 정론지로 가는 길에 스스로 큰 벽을 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작금의 한국언론의 정파성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언론의 큰 문제 중 하나가 ‘언론의 정파성’이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저는 과연 언론의 정파성 자체가 문제인가라는 데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 그리고 오늘 발제에서 지적했던 많은 한국언론의 문제들이 정파성 문제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유럽의 많은 신문은 정파지입니다. 미국의 특정신문이나 방송은 정파언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파적 언론이 가지고 있는 3가지 언론의 벽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죠. 이것은 한국언론의 문제는 정파성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저널리즘 기본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언론의 정파성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현실적인 추세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발제에서 나왔습니다만 미국언론의 흐름을 보면, 초창기 정당이 신문 인쇄예산까지 지원해주는 그야말로 정당과 신문이 완전히 결합된 정파 저널리즘(partisan press) 시대를 거쳐 19세기말 정도 되어서 뉴욕타임스 같은 정론지들이 등장하면서 소위 객관주의 저널리즘 시대가 100여년 정도 진행되다가 최근 들어서는 상당부분 새로운 정파언론이 등장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저는 그것을 네오파티셔니즘(neo­partisanism)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미국에서 9ㆍ11 이후 폭스뉴스 또는 토크라디오를 보면 도저히 객관주의 언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새로운 정파언론 형태의 등장을 목격하는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은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 특성상 정파언론을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언론의 정파성 문제가 반드시 언론의 문제라고 볼 수 없는 것은 한 사회의 언론 수준은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최근에 왜 정파적 언론이 등장하는가? 이것은 미국 정치가 90년대 이후로 상당히 분열의 정치, 다시 말해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화의 벽들이 형성되고 있고, 국민 사이에서도 정파적 분열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언론에 반영되는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우리 언론의 정파성 문제도 국회에서 여야의 대화 양태, 즉 단절과 분열의 모습이 언론간 반목과 갈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정치가 반목과 분열, 파벌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이 중립지대를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에 특정정파와 유대관계를 맺는 정파적 언론이 등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정파적 언론이 대두될 수밖에 없는 데는 다매체ㆍ다채널, 다양한 형태의 언론매체를 가능하게 한 미디어기술의 발전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인터넷미디어의 보급으로 인한 포털사이트, 다양한 뉴스사이트가 등장하는 상황에서 수백 개의 뉴스매체가 모두 중립에 서서 객관적 사실만을 보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의견을 서로 다른 매체들이 개진하고, 그럼으로써 의견의 다양성, 표현의 자유를 구현하는 체제로 가고 있는 것은 매체기술 발전상 당연한 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소위 정파적 언론이라는 건 필시 ‘의견 저널리즘’ 또는 ‘주관적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60년대, 70년대부터 ‘뉴저널리즘’이라고 해서 주관적 저널리즘 운동이 일었는데, 운동의 큰 테제는 주관적 저널리즘이야말로 더 사실적 보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식적인 객관적 저널리즘보다는 주관과 입장을 가지고 어떤 사안을 보도할 때 더욱 심층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보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파성이라는 것을 반드시 우리가 극복하고 허물어야 되는 그런 단단한 벽, 문제의 벽이라기보다는 그걸 잘 활용하면 더욱더 심층보도, 사실보도에 충실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사회 내 다양한 의견을 다양한 매체들이 드러낼 수 있는 참민주적인 공론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문제는 왜 한국언론의 정파성이 문제되는가입니다. 이것은 오늘 발제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해 주셨습니다만 한국언론이 근본적으로 지켜야 될 저널리즘의 기본, 즉 사실보도, 객관보도, 공정보도와 관련된 기준, 원리를 쉽게 저버린다는 것입니다. 한국언론은 정치권력과 밀착 또는 대립 같은 정파적 교합과정에서 저널리즘 원칙을 뒤로 물리고 심지어 도구화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언론이 정치권력과 반목하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정치권력에 얽매이고 종속되는 현상이라고 해석해볼 때, 오늘날 한국언론의 정파성 문제는 결론적으로 정치권력과의 관계에 매몰된 저널리즘 원칙의 문제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한국언론의 정파성 문제는, 첫째 정파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신문이 사실보도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상당히 공격저널리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거고요, 두 번째는 민주화 이후 한국언론이 정파적 언론으로 구조화되면서 보수신문은 보수신문대로, 진보신문은 진보신문대로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경쟁하고 그러면서 결국은 김민환 선생님이 지적하신 대로, 정파적 날개 언론만 있고, 몸통, 중간지대의 언론이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있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오늘은 언급이 안 됐습니다만 저는 신문들이 정파화하는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보수신문이 과중하게 신문시장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보수신문 대 진보신문 비율을 남시욱 선생님은 4 대 4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9 대 1 정도로 지나치게 보수언론이 신문시장을 지배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선진사회에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 연원이야 어찌 됐든 과중하게 보수언론, 보수신문이 신문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언론에 의한 의견의 다양성 추구, 민주주의 가치 추구 차원에서 한국언론의 정파성 문제 가운데 큰 해결과제 중 하나라고 봅니다.

시간관계상 한국언론의 정파화 과정에 대해서는 간단히 제목만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는 한국사회 민주화과정에서 언론이 민주적 언론으로 부활하기 위해서 또는 전환하는 그런 과정에서 실패한 거 아닌가입니다. 대선과정에서 편파보도 문제도 있고, 정치권력과의 야합문제, 또는 지나치게 반목하면서, 반목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정치적으로 종속되는 그런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편파적 정파성을 띠게 됐다는 거고요, 둘째는 한겨레 효과가 있을 텐데요, 조중동 등 보수신문들의 시장지배현상은 한겨레 등장과 무관하지 않은데, 가령 동아일보의 경우, 역사의 가정은 없겠지만, 한겨레가 없었다면 중도 진보 신문 정도로 자리매김해서 신문시장에서 이념적, 정파적 균형을 이루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는 것인데, 한겨레가 등장하면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그런 현상들이 있었다는 거지요.

결론적으로 제가 보기에는 정파성이라는 것은 어떤 극복대상이 아니고 관리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 해결방법으로, 공자님 말씀입니다만, 저널리즘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언론계와 학계의 양심 있는 사람들이 많은 글도 쓰고 그렇습니다만, 이것이 과거 민주화 직후 언론자정운동처럼 하나의 실천운동 차원으로 가야 될 것입니다. 미국의 PEJ운동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현재 구도에서는 신문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조중동의 역할이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조중동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려 있거든요. 쏠려 있는 게 정파적으로도 쏠려 있지만 저널리즘의 기본으로부터 이탈해 있는데, 다시 돌아오는 그런 노력들, 예를 들면 중앙일보가 지금 흐지부지된 것 같습니다만, 사실과 의견 기사의 분리운동이랄지, 요즘 조선일보 보면 어떤 이유에서든 상당부분 정치권력과 거리를 두려는 노력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좀 더 강화돼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다양한 뉴미디어들, 방송에서 뉴스채널 나오죠, 종편 나오죠, 그다음에 포털을 비롯한 인터넷뉴스매체, 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같은 뉴미디어들이 등장하면서 지금 상당부분 저널리즘의 기본으로부터 일탈해 있는 한국언론의 정파성 문제가 언론매체환경의 틀이 깨지면서 뭔가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거기서 우리가 한번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이목희:예, 감사합니다. 토론순서를 아까 말씀 안 드렸는데요, 최 교수님이 먼저 해주셨기 때문에 교수님, 언론인 그리고 교수님, 언론인, 이런 식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김민배 조선일보 편집국 부국장이 하시고,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님 하시고, 마지막으로 이승철 경향신문 논설위원께서 하시겠습니다. 그럼 김민배 부국장 토론해 주시죠.

 

김민배(조선일보 편집국 부국장):방금 소개받은 김민배입니다. 남시욱 대선배님, 그리고 김민환 교수님, 김경호 기자협회장님의 좋은 말씀에 대한 저의 짧은 소견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한국언론에 있어서 2009년 그리고 2010년이란 과연 무엇인가, 또 이 땅의 언론인에게 올해와 내년은 어떤 의미가 있나 생각해 봅니다. 지금 국내에 공통적으로 기성언론과 언론계에 사상최대의 위기국면이 진행되고 있다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미국, 유럽, 일본이라고 예외가 아니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성언론의 위기는 다름 아닙니다. 인터넷, PC, MP3, 휴대폰, 캠코더, TV, 신문 등 여러 매체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정보전달 수단, 즉 신매체가 하루 평균 한 개씩 생겨나고 있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런 신매체는 기성언론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습니다. 오늘까지는 인터넷이 기성언론을 흔들었지만 내일 또 어떤 신매체가 기성언론을 흔들지 아무도 모르는 실정입니다. 이 같은 현실은 아까 김민환 교수님께서 지적하셨지만 국내 언론시장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습니다.

작년 국내 TV광고시장은 1조 8,997억원 규모였습니다. 2007년에 비해서 약 9.9% 줄어든 액수입니다. TV광고시장은 2006년 그리고 2007년 약 2조 7,000억을 피크로 해서 해마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난해 신문광고시장은 1조 6,581억원 선이었습니다. 이 또한 2007년에 비해서 6.9% 줄어든 액수입니다. 신문, 방송, 라디오, 잡지, 인쇄매체를 포함한 소위 올드매체의 지난해 광고 총합은 4조 3,000억 정도입니다. 이에 반해서 지난해 온라인광고시장은 1조 1,900억입니다. 전해에 비해서 17% 정도 늘어난 액수입니다. 케이블TV시장 역시 8,600억 정도로 전해에 비해서 3.6% 늘었습니다. DMB, PTV까지 포함한 소위 뉴매체의 광고시장은 지난해 2조 760억 정도입니다. 올드매체의 거의 50%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한 리딩사의 경우, 한 해에 1조 수천억이 넘는 매출액을 올리고 있습니다. 또 그런 포털사가 운영하는 인터넷공간에서는 올드매체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섹스나 도박, 심지어 마약 등 사회적 금기들이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그리고 그걸로 돈을 법니다. 그들이 주머니를 불릴 만큼 기성언론의 파이는 알게 모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성 올드매체들은 정신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정말로 싸워야 할 상대는 누구인데, 왜들 그러는지 알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학의 전장은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작년에 제가 신문사에서 언론담당 부국장을 하면서 지방언론사에 근무하다가 제가 근무하는 신문사에 입사를 지원한 한 기자의 면접을 위해서 어느 도시에 간 적이 있습니다. 입사 4년차 정도의 기자였는데, 월급을 물어보니 100만원이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느 정도 받기를 원하느냐 물었더니, 한 달에 20만원 내지 30만원만 더 주면 정말 열심히 몸을 던져서 뛰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지방도시라지만 월급 100만원으로 어떻게 갓난애를 기르고 생활할 수 있는지 정말 잘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또 몇 개월 전 실직한 후배기자가 편집국에 찾아왔습니다. 돌아갈 때 어려울 텐데 버스비나 하라고 정말 소량의 액수를 주머니에 찔러준 적 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그 후배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도는 모습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저는 올해 신문사에서 인터넷ㆍ동영상담당 부국장을 하면서 느꼈던, 하루하루 지각변동하고 있는 언론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지켜보면서 또 엄동설한에 사정없이 바깥으로 내몰리는 언론인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몸을 추스르기에 또 언론인으로서의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같은 직종의 동료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정말 우리는 이런 엄청난 현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뭔가 1957년에 대선배님들이 관훈클럽을 만들었던 그런 정신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할 때가 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이목희 총무를 비롯한 관훈클럽 임원들이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벽을 허물자’라는 슬로건 아래 몸부림이라도 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될지 대안을 제시해보라면 저도 뾰족한 묘안은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구조적 문제도 있고, 소속사의 문제도 있고, 개인의 문제도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언론간 서로 겨누고 있는 소모적인 정쟁적, 이념적 비판의 칼날을 당장 거둘 수 없다면 서로 비판은 하되, 소송만이라도 최대한 자제할 수 있는 길은 과연 없는 것일까? 이런 조그만 생각을 선후배는 물론 언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화두 삼아서 한 번쯤 고민해보면 뭔가 길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언론사간 경계선을 뛰어넘어서 정말 관훈클럽 회원끼리만이라도 또 오늘까지 세 차례 이어진 ‘벽을 허물자’ 행사에 참석했던 선후배끼리만이라도 서로 흉금을 터놓고 고민을 얘기하고, 우리만이라도 어제와 달리 접근해보자고 할 수는 없는 걸까,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인터넷 특히 포털은 기성언론의 콘텐츠로 적게는 수십 배, 많게는 100배 가까운 이익을 내면서 쥐꼬리만 한 헐값 보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치의 불균형 분배에 대해서 기성언론이 손잡을 수는 없는 걸까, 생각해 봅니다. 포털에 대해서는 무제한의 언론자유가 허용되고 있습니다. 기성언론은 조금만 잘못하면 가차 없는 비판의 칼날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불공정게임을 시정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걸까도 생각해봅니다. 이런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 언론계 대선배님들 그리고 현역들이 어떤 시도를 해야 할 건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에 내몰린 실직 언론인이 아내 눈치 안 보고, 매일 지하철표라도 사고 자장면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뭔가를 시도해야 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남시욱 대선배님, 김민환 교수님, 그리고 김경호 기자협회장께서 주제발표를 통해서 이런 의문들에 접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건설적인 해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언론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업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된다, 그리고 저널리스트들이 집단지성을 통해서 한 차원 높은 저널리즘을 구현해야 된다, 또 우리 김경호 후배께서는 언론인공제회 같은 언론인의 직업적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세 분의 말씀 속에 다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가 서로를 깊이 되돌아보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고 자평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언론계 대선배님과 현역언론인들이 정말 지혜를 모아서 실천가능한 조그만 일을 선택해서 결실을 맺어나가는 결의를 다지는 자리였다고 되새기면서 오늘 토론을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목희:김민배 부국장 감사합니다. 저와 같이 관훈클럽 임원을 하고 있는데요, 날이 갈수록 논리정연하게 얘기를 잘하네요. 김 국장의 생각이 저희 임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이재경 교수님 토론해 주실까요.

 

이재경(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안녕하십니까? 이화여대 이재경입니다. 우선 제가 몇 가지 숫자를 말씀드리고 그다음에 남시욱 선생님, 김민환 선생님, 김경호 회장님 발표에 대한 질문 몇 가지 드리고, 그리고 또 제 생각을 조금 정리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것은 미국 얘기인데요, 최근에 어느 보고서에 나온 자료인데 저희가 한번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적어 갖고 왔습니다. 신문사들이 인력감축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정리한 보고서가 있는데 볼티모어선이라는 신문의 취재인력이 400명이었는데 지난 몇 년 사이 150명으로 줄었답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600명에서 300명,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500명에서 200명, LA타임스는 1,100명쯤 하던 인력이 지금 600명, 워싱턴포스트가 900명 수준이었는데 이번에 인력구조조정을 하면 700명 정도로 조정된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문기자가 제일 많을 때가 1992년이었는데요, 그때 6만명 정도였는데 미국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현재는 4만명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추산합니다. 이 보고서를 보면 발행부수도 지금 대폭 줄어들고 있습니다. LA타임스가 2000년에 110만부까지 찍었는데 지금 65만부, USA투데이도 230만부 정도가 피크였는데 요새 호텔 부수가 많이 줄어서 190만부, 뉴욕타임스는 100만부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었는데 최근에 92만부 정도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희가 지금 정파투쟁 가지고 얘기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이게 우리만의 위기가 아니고 산업 전체가 무너지는 상황 같은데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 참 안타까운 느낌이 들어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미국에는 그래도 이런 자료들이 공개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문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혀 투명성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라서 그런 부분도 사실은 좀 바뀌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는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조금 다른 말씀이지만 저희가 지금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삼성, LG는 세계 최고기업으로 컸습니다. 그런데 이 두 회사가 엄청나게 경쟁했지요. 지금 신문들의 경쟁을 보면 그 두 회사 경쟁보다 훨씬 치열합니다. 그런데 저널리즘 수준은 좋아지는 게 아니라 훨씬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게 신문시장의 특성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지식산업의 특성일 수도 있는데 제 생각에는 우리 저널리스트들이 너무 자기 속에만 함몰되어서 바깥을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좀 하면서 선생님들 말씀에 제가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저는 남 선생님 전부 다 옳으신 말씀이고 그래서 따로 붙이거나 이럴 내용은 없습니다. 남 선생님의 핵심주장은 직업정체성이 중요하고 직업정체성이 지금 훼손돼 있는 게 문제고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이런 말씀이 가장 중요한 요지로 제가 판단했는데요, 여기서 제가 하나 걸리는 문제가 우리나라의 신문과 방송이, 제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신문은 발행인의 매체가 되어버렸고, 아니면 소유주의 매체가 되어버렸고 방송은 정부의 매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기자들의 위치가 과거에 비해서는 지금 형편없이 떨어져 있는데 이것을 회복하지 않고 어떻게 직업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가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KBS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든지 MBC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보면 제도적으로는 정권을 잡으면 방송을 잡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놔두고는 사실 아무 논쟁의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회사에 있는 분들은 권력에 줄을 대려고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저널리즘은 사라지는 거지요. 생존을 위한 줄 대기밖에 남는 게 없는데 이제 그게 바깥으로 나올 때는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이 되고 이런 구조가 되니까, 더 큰 문제는 시민들이나 시청자들은 이제 보기도 싫은 거예요. 기자들이 하는 얘기는 전부 자기이익만 반영하는 거지, 이게 무슨 시민을 위한 또는 독자를 위한 서비스가 아닌 거지요.

이 악순환 구조를 깨려면 직업정체성이 빨리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관훈클럽이 그나마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고, 하실 일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부분하고 연결해서 저는 남 선생님의 말씀을 조금 더 듣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또 한 가지는 남 선생님 주장 중에 ‘댓글은 모두 실명제로 하는 게 좋다’ 저는 100% 찬성입니다. 그런데 편파왜곡보도가 문제인데 이것은 언론윤리에 반하는 일이고 그래서 제재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페이퍼에 보시면. 문제는 이것을 현실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지금 우리의 언론윤리규정이나 시스템 갖고는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하여튼 좀 구체적인 생각이 있으실지 몰라서 그 문제를 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김민환 선생님은 사실 몸통론은 익히 여러 차례 들은 이야기고 저도 100% 공감하는 이야기고 그래서 따로 사족을 붙일 생각은 아닌데요, 페이퍼 맨 뒤에 보시면 오늘 발표하실 때는 빼신 것 같은데 ‘신문합병을 빨리 추진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사실은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문매체들이 너무 영세하고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미국 매체들을 보면 워싱턴포스트가 줄었다고 그래도 편집국 인력이 700명이거든요. 워싱턴의 지역매체가 이 정도인데 우리 신문 가운데 700명 되는 신문은 없지요. 그러니까 지금 세계화되는 이 상황에서 제 생각에는 저희가 국제경쟁력을 유지하려면 결국 사이즈를 키워야 될 필요도 있는데 이제 이런 쪽에 현실적인 접근방안이 뭐가 가능할지 그런 말씀을 좀 해주셔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경호 회장님은 정말 백화점처럼 많은 제안을 내놓으셨습니다. 그중에 프레스카드는 사실 오해의 소지도 좀 있어 보입니다. 기자인증제, 인증이 필요하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사실은 지금 누가 기자인가, 이런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기자가 될 수는 있는데 모두가 기자는 아니다”는 얘기도 있고요. 그런데 기자에게 누가 자격증을 줄 거냐, 이 부분은 이제 그쪽 사람들은 얘기를 안 하는 요소인데, 우리 같은 경우 그런 제안들을 하는 편이라서… 그런데 지금 대안으로 제시하신 게 IFJ 쪽인데요, 사실 IFJ가 그렇게 영향력이 큰 집단은 아닌데 아마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건지, 또는 영국 같은 경우는 실무능력을 평가해서 등급을 지정해주는 자격증 비슷한 게 있습니다. 바깥에서 ‘이 사람이 기자다, 아니다’ 하는 게 아니고 ‘이 사람은 어느 수준의 실무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정도인데요, 혹시 그런 것을 대안으로 검토할 수는 없을지 그런 말씀을 한번 드려보고 싶습니다.

프레스센터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하셔서 사실은 저도 지금 언론진흥재단인가요, 이런 게 만들어지고 있는 구조인데 거의 100% 문화부에서 주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정부 프로젝트대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마 이 언론지원사업이 모두 정부의 손에 들어갈 텐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거고 태생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는 이 부분은 기자분들이 다시 생각해보셔야 될 요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잠깐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저널리즘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좀 무리가 있는 주장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치기사를 잘 쓰면 정치가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정치기사를 보고 있으면 정치를 따라가고 있는 거지, 정치를 감시하거나 정치에 대한 뭔가 비판을 하거나 이런 것들은 굉장히 드문 처지입니다. 그리고 조금 말을 바꾸면 저는 정치인보다 기자가 훨씬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기자 하시다가 정치인이 되시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게 현실 아닌가요? 그게 아까 남 선생님 말씀하신 직업정체성, 자존심 이런 것하고 연결될 것 같은데요, 이런 것을 회복하려면 제 생각에는 관훈클럽의 역할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아무리 봐도 한국언론계에 관훈클럽만한 비중과 위치 그리고 인적자원을 갖고 있는, 도덕성도 갖고 있고요, 그런 집단이 없고, 오늘 또 보니까 기자협회도 와 계시고 이제 언론학회에서도 힘을 합치고 그러면 비교적 상당히 중립적인 그런 모임이 될 수도 있고, 김민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중도적인 지식인집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서 아까 두 분 선생님이 똑같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남 선생님은 2010년 보고서 같은 것을 준비하면 어떠냐, 그런 말씀을 하셨고요, 김민환 선생님도 PEJ 프로젝트를 소개하시고 그랬습니다. 제가 제안드리고 싶은 것은 힘을 합치셔서… 사실 이것 미국에서 계속 진행되는 디베이트인데 ‘저널리즘이 도대체 뭐냐? 그러니까 우리가 생산하고 있는 기사가 제대로 된 저널리즘이 맞는 거냐?’ 이런 질문들을 아주 유수의 언론학자와 기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도 그 안에 지금 상업적인 이해관계라든지 정파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거지요. 그래서 그런 프로젝트를 하시게 되면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설명을 기자분들이 좀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면 같이 하셔도 좋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 기자들이 생각하는 저널리즘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한겨레가 생각하는 저널리즘, 오마이뉴스가 생각하는 저널리즘, 조선일보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이 많이 다른 것 같고요, 또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생각하는 저널리즘일 텐데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기본적으로 저널리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좀 했었습니다. 그분을 지지하고 이런 것을 떠나서 이 사회에서 저널리즘이 해야 할 역할이 뭔지 이런 부분에 관한, 저는 한국판 설명이 현장에 있는 분들로부터 제공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누가 기자고 누구는 기자가 아닌가?’ 이런 질문도 사실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은데요, 매일 기사를 쓰기는 하지만 나는 정말 기자인지, 이것에 대한 답을 같이 만들어내고 공유하기 시작하면 상당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떻게 독자하고 시청자를 위해서 봉사할 것인가. 사실은 아까 김 선생님도 사실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독자를 위한 봉사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기사를 읽고 있으면 이게 회사를 위한 기사거나 기업체를 위한 기사거나 또는 생계를 위한 기사거나 아니면 정파를 위한 기사거나,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런 문제들을 아까 말씀드린 중요한 집단들이 모여서 같이 답을 찾아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갖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이목희:감사합니다. 주제발표자께 질문드렸는데 답변은 나중에 종합해서 하시는 것으로 하고 다음은 이승철 논설위원 토론해 주시지요.

 

이승철(경향신문 논설위원):우선 오늘 토론을 통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평소 언론분야의 벽 문제에 대해서, 갈등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왔는데 이번 토론을 통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남시욱 사장님께서 제가 몸담고 있는 신문사, 특히 그중에서도 제가 소속한 논설위원실의 글을 가지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시할 때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 토론회에서 발표자들께서는 언론의 대립상에 대해서 대립원인, 대처방안 등을 다양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아마 누가 이야기하더라도 오늘 제시된 진단과 대처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새 언론계에서 늘 나오는 말로 선택과 집중을 하기 위해 김민환 교수님 발표에 대해 코멘트를 좀 하고 질문드리고자 합니다. 교수님께서 벽의 원인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정파성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면서 원인으로 사실의 왜곡 현상, 정치중립적 지적 공중의 부족, 인터넷매체의 등장을 열거하셨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정파성 문제 원인의 전부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고에서 교수님은 ‘우리 언론은 사실의 윤곽을 파악하고도 정파성에 맞춰 사실을 각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소속사 가릴 것 없이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후배기자들이 “주문생산 때문에 죽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김 교수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인터넷매체의 등장이 정파적 대립에 기여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기존매체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인터넷매체의 경우 ‘보수’ 또는 ‘진보’라는 꼬리표를 공개적으로 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론’이라는 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발표자 또 토론자들께서 많은 처방책을 제시해주셨는데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질문하고자 합니다. 김 교수님께서는 원고에서 의사처럼 진단을 분명히 해서 그것에 맞는 처방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 방법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방법이겠지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접근법을 바꿔서 인터넷매체시대 도래와 같은 주어진 환경을 고려할 때 앞으로 언론산업이 아닌 언론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를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조금 전 이것과 관련해서 이재경 교수가 정의(definition)에 관련해 말씀하셨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앞으로 10년, 20년 지나면 언론이나 기자의 개념이 상당히 바뀔 것 같습니다. 인터넷 등장 이후 이미 기사화 과정, 기사형식, 심지어 뉴스판단 기준까지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10년, 20년 후 언론이나 기자에 대한 개념이 진짜 바뀐다면 기존 개념들은 사라지고 언론은 정파지 또는 기관지만 남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김 교수께서는 인터넷매체 도래와 함께 언론 또는 기자들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갈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오늘 ‘사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어제 남시욱 사장님께서 “사실의 포로”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쓰레기통을 뒤져 휴지조각을 이리저리 맞춰보면서 사실을 찾느라 헤맸습니다. 그런데 ‘사실’이라는 말이 참 어렵더라고요. 사실을 수집하기도 힘들지만 뭐가 사실인지…. 최영재 교수께서 말씀하셨는데 60, 70년대에 주관적 저널리즘이 등장하면서 사실개념이 다양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김경호 회장이 잠시 이야기했지만 지금 신문들을 보면 1면에 종종 해설이란 이름으로 쓴 글이 사설과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주제에 대해 과연 사설이 필요한가를 논의하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태가 점점 유행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런 경향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김 교수님께서 코멘트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나름대로 평소 생각하던 것을 제안 겸 말씀드리겠습니다. 벽을 허물기 위해서 여러 분들이 구조적인, 제도적인 방안을 말씀해주셨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그래서 이른 시간 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벽 문제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도출해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관훈클럽 등이 주체가 되어 편집책임자들이 벽을 허물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신사협정을 맺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요즘 각 언론사들의 의견란을 보면 공통적으로 같은 성향의 필진만 동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뉴욕타임스는 중도 좌파를 지향하지만 닉슨 전 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 출신인 윌리엄 사파이어, 데이비드 브룩스 등에게 칼럼을 맡기고 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보지, 보수지 구별할 것 없이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작태도가 우리 언론의 정파성 강화에 기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얘기지만 논설위원실에서 수습기자 응시생들의 논설을 채점하다 보면 격문들을 참 많이 봅니다. 어떤 답안지는 저희들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보수언론에 적개심을 나타냅니다. 다른 보수언론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 대학에 언론고시반이 있는 만큼 학교에서 기자 지망생들에게 기자가 뭘 중시해야 되는지, 사실의 개념이 무엇인지, 이런 것을 제대로 가르쳐 주시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학생들에게 답안을 그렇게 쓰면 저희가 도저히 합격할 수 없는 점수를 매긴다는 사실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목희:감사합니다. 여러 가지 제안도 많으시고 아이디어도 많으신데, 토론회 사회를 보니까 제일 중요한 게 시간 맞춰서 제시간에 끝내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조금씩 시간을 독촉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이제 주제발표자 세 분한테 답변을 듣겠는데요, 한 2~3분씩만 해주시죠. 우선 김 교수님부터 답변해주시죠.

 

김민환:2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소위 신문합병 문제인데요, 70, 80년대에 우리 언론이 자본규모가 커졌습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광고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책적으로 시장진입을 철저히 막았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광고시장은 커지는데 더 이상 못 들어오게 하니까 언론사 자본규모가 커졌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케이블TV, 위성, IP, DMB, 인터넷 이런 식으로 쏟아지고, 신문시장에 대한 진입장벽도 완벽하게 철폐됐습니다.

그런데 보면 광고가 창출되지 않습니다. 덜 효과적인 매체에서 더 효과적인 매체로 이동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방지가 맨 먼저 죽고, 지방방송 죽고… 이런 식으로 된 겁니다. 그래서 지금 신문사 같은 경우, 제가 신방과 선생인데 어디 회사 합격했다고 찾아오면 ‘다니지 마라’ 이렇게 말합니다. 최저생계비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저는 지방대 교수 하다 올라왔습니다만 지방지 가서 보면 사주는 전부 다 토호 건설업자입니다. 그리고 언론이 몽둥이입니다. 월급도 안 줍니다. 100만원 준다고 그랬는데, 100만원 주는 데가 한 도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 겁니다. 광주 가보니까 일간지가 13개예요. 그런데 파이는 더 이상 늘지 않고, 이제 종편 나오고 보도채널 나오고 그러면 광고 또 더 쏠립니다. 지금 서울 마이너신문의 월급은 생계비가 안 됩니다. 그러나 비리문제는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지방지 가서 보면 생계가 안 되니까 출입처에서 다 먹여살립니다. 이건 언론의 비리와 직결됩니다. 이건 정말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옛날처럼 통폐합하고 이러면 안 되겠지만, 정책적으로 지원책을 강구하면서 M&A를 아주 대대적으로 권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참 큰일 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 이승철 위원께서 미래 얘기를 하는데, 저는 언론사를 연구합니다만 원시공산제, 고대노예제, 중세봉건제, 근대자본주의, 이런 식으로 우리 역사가 발전해왔습니다. 중세봉건제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입니다. 근대자본주의, 이건 상공업사회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봉건적인 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다 탈락합니다. 지금은 이제 인터넷시대로 갔습니다. 인터넷시대의 생산양식에 맞추지 않으면, 저는 전통매체의 경영위기가 앞으로 계속 가속화된다고 봅니다. 방송시대도 끝납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금 나타나고 있는 포털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매체의 생산양식에서 두드러진 것이 뭐냐? 첫 번째는 협업입니다. 기자를 400~500명 데리고 하는 거 아니거든요. 소비자가 만들어냅니다. 그게 생산품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문사도 모든 걸 기자나 논설위원이 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논설위원 한 3분의 1로 줄여야 됩니다. 그리고 원고료 제대로 주고, 교수나 바깥에 있는 문필가한테 부탁하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프리랜서 제도 등 다양한 협업체제 쪽으로 가야 될 것이고, 두 번째는 수입원의 다양화입니다.

구독료와 광고 가지고 먹고살고 있는데, 지금 포털매체는 그것이 아니라 지식검색에서 엄청난 이익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문사에서는 생생한 지식을 날마다 생산하는데, 신문사 기자들은 전부 다, 여기 계시는 원로 선배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마감시간이 끝나서 딱 보도되면 그다음에 쓰레기입니다. 그런데 그거 모아놓으면 엄청난 지식이고, 포털 같은 데서 그것 모아서 돈 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수입선을 다원화해야 됩니다. 광고파이가 늘어나지 않으니까요.

검색시장은 어마어마합니다. 고대민족문화연구원이 있는데요, 네이버한테 1년에 2억 몇천만원을 받습니다. 무엇 때문에 받느냐? 한중관계가 긴밀해지니까 중국어 검색을 하면 좋겠는데 민족문화연구원의 한중사전, 중한사전 가지고 자동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민족문화연구원에서 한중사전, 중한사전 인쇄한 것으로 1년에 한 2,000만원 버는데, 인터넷 포털에서 이용하는 대가로 2억 이상 받습니다. 시대가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수입선을 포털에서 하고 있는 그런 생산양식, 협업적 생산으로 다변화해야 합니다. 저널리스트가 검색 이런 쪽으로 저널리즘적 시각을 대폭 옮기지 않으면 저널리즘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목희:그러면 남시욱 선배님하고, 김경호 회장님 순서로 해주시죠. 조금만 짧게 해주세요. 죄송합니다.

 

남시욱:예, 되도록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재경 교수가 아주 좋은 말씀을 하셨는데요, 지금 언론산업 전체가 위기에 빠져 있는데 무슨 벽 허물기 그것만 얘기할 거냐?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 두 문제는 우리 한국언론이 당면하고 있는 복합적인 위기의 요인이죠. 선택적인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산업 전체의 위기, 이건 우리가 굉장히 따져야 될 문제인데, 오늘의 이 토론회 주제하고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에 제가 언급을 안 했습니다.

그 다음에 정체성 문제인데, 직업언론인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테마로 오늘 토론회에서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될 부분입니다. 그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건국 이후 지난 87년 민주화 때까지의 한국언론사를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 언론자유를 찾기 위한 그런 시기라고 보면,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것은 언론이 자유는 획득했는데 독립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그럼 독립성이란 뭐냐? 언론이 갖고 있는, 언론인이 갖고 있는 자율성, 또 자기 완결성, 이런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언론사 또는 언론인이 과거와 같은 정파신문 또는 정당 대변지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 위치를 유지한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거죠. 독립적인 위치에서 정치를 해설하고 보도하는 것과 정치세력의 앞잡이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죠. 요새는 그런 얘기 잘 못 듣습니다만, 60년대 미국 가면 ‘뉴욕타임스와 커피 한 잔’이라는 얘기를 많은 지식인들이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뉴욕타임스가 어느 건지 모르지만 하여간 우리나라의 어느 신문과 커피 한 잔, 이런 정도의 독자성, 자율성을 갖고 있는 언론이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다음에 공영방송 문제인데요, 공영방송 문제를 보면 BBC도 문제가 있고, NHK도 문제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문제의 수준은 우리하고 큰 차이가 납니다. KBS나 KBS에 근무하는 본부장이라든가 국장이라든가 이런 간부들이 언론인으로서의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걸 안 지키고 남의 탓을 하면 안 됩니다. 과거에 우리는 검열을 받았습니다. 그땐 언론자유가 없을 때예요. 그에 비하면 월급이 적고, 100만원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자율성은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도 월급 없는 취재 많았습니다.

개별 신문사, 언론사 문제와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아까 이 교수가 말씀하신 대로 미국의 경우 미디어 복합그룹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대량해고 사태,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사실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거대한 미디어혁명의 와중에 앉아 있는 겁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혁명이지만 총소리 안 나오는 혁명일 뿐이지, 그런 와중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언론인은 원칙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원칙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기자정신이 없는 거죠. 제가 느끼는 것은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인터넷시대 직업언론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다는 거예요. 이건 전문가도 아니고, 비전문가도 아닙니다. 제가 어제 어떤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기자를 해보니까 언론이라는 게 굉장한 전문적인 게 없으면 안 되는 직업이더라고요. 물론 의사나 변호사나 교수처럼 일정한 자격요건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문성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또 어떤 분은 언론인을 전문직이 아니고 유사 전문직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새는 각계마다 굉장히 학력이 높기 때문에 지금 우리 언론인은 많이 공부해야 됩니다. 많이 공부하고, 필요하면 학위도 따고, 전문분야의 학자나 연구원 못지않은 지식이 있어야 돼요.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일을 다 합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미디어혁명의 와중에 있기 때문에 제가 그런 얘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이 교수 지적한 것은 전적으로 다 옳습니다. 그러나 그건 절대로 선택적인 게 아니고 복합적인 위기상황이기 때문에 그건 그것대로 또 우리가 연구해야 될 문제라고 봅니다.

이승철 경향신문 논설위원께서 제가 경향신문을 언급했다고 말씀하셨는데, 뭐 구체적으로 지적은 안 하셨습니다만 경향신문은 제기 보기에는 이념적으로는 그렇지만 좋아진 게 많이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하면, 아까 경향신문을 읽어봤어요. 동료기자로서 내가 볼 때는 톱에 문제가 있어요. 거기 보면 제목이 ‘세종시 원안대로 하는 것이 66%다’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여론은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까 이게 있어요. 교육 등의 도시로 수정하는 데 찬성한다는 대답이 또 50 몇% 나와 있어요. 그러면서 2개를 연관시켜서 설명을 안 하니까 참 이해를 못 하겠어요. 어떻게 질문했기에 그런지 좀 설명해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그거 독자가 볼 때 굉장히 혼란스럽거든요.

 

이목희:답변하실 건 아니죠? 그럼 김 회장님 짧게 1분만 하시죠.

 

김경호:네, 그러겠습니다. 다행히 저에게는 질문이나 그런 게 없으셨습니다. 다만 이재경 교수님께서 아까 말씀하신 2가지 부분, 프레스카드 부분하고 언론진흥재단 그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제가 가칭 저널리즘스쿨이라고 말씀드렸는데, 학회나 관훈클럽이라든지, 어떤 언론단체와 협업 시스템으로 하면 언론인에 대한 어떤 평가라든가 이런 게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재는 출입처라는 데를 보면 그냥 어떤 매체 또는 협회 이런 데 들어간 걸 기준으로 해서 기자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것이 관행인데, 지금 워낙 매체가 많이 늘어나다 보니까 그건 곤란하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건 저널리즘스쿨 같은 것을 만들어서 거기서 기자로서 기본적인 코스를 거치면 그런 카드를 내주는 것으로, 결국 이수를 했느냐에 따라서 기자로 인정해주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프레스카드 말씀을 드렸는데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해명드립니다.

언론재단이 이제 언론진흥재단으로 개편됐는데, 그 부분에서 우려스러운 것은 이건 그야말로 아주 중립적이고 언론을 지원하는 기관이 돼야 하지 않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현재 들리는 소문으로는 결국은 문화부라든가 정부기관의 결정적인 어떤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언론에 대한 지원 자체를 결국 정부가 지원하는 꼴이 된단 말이죠. 그럴 경우 과연 언론인들이 그걸 받아야 될 것인가? 예를 들어 기자한테 기자상을 주는데 언론진흥재단에서 지원해서 한다면 결국 정부가 기자들한테 ‘너희들 특종했으니까 상 준다’ 이런 논리가 된단 말이죠. 그런 부분에서 우리 관훈클럽을 비롯해서 언론단체들이 고민해야 된다고 봅니다. 특히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실은 저널리즘스쿨 같은 것을 관훈클럽 같은 데서 주도해서 이미 만들었어야 되지 않았을까, 그런 차원에서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이상입니다.

 

이목희: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대선배님들 모시고 자꾸 짧게 하라고 이러니까 정말 진땀 많이 나네요. 원래 5시 반에 끝나기로 돼 있었는데, 그래도 플로어 질문은 몇 개 받아야 하니까 한 10분만 더 하겠습니다. 양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질문에 앞서서 차기 언론학회 회장으로 선출된 서울대 양승목 교수님이 잠깐 인사를 하고 한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론학회 회장은 1년 전에 미리 뽑는 것 같아요.

 

양승목(한국언론학회 차기회장):지난 10월 17일 한국언론학회 정기총회에서 차기회장으로 선출된 서울대학교 양승목입니다. 오늘 관훈클럽과 언론학회가 공동주최하는 이 귀한 토론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쁘게 생각하고요, 제가 오늘 차기회장으로서 이 자리에 오는 것이 당연하겠습니다만 그보다도 주제 자체가 언론학자로서 저에게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여서 제가 차기회장이 아니었더라도 기꺼이 참석할 만한 토론회였다고 생각합니다. 토론회를 보면서 얼핏 생각나는 게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보면 우리 언론계가 옛날부터 엘리트들이 늘 진출하던 분야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한 10년간, 아마 제가 보기에는 대한민국에서 이토록 우수한 인재들이 언론계에 진출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무렵 각 대학 신문방송학과는 법대, 상대 이런 데보다도 커트라인이 높았고, 최고로 우수한 학생들이 언론고시라는 이름을 붙여서 기자가 되고, PD가 되고 했습니다. 그 최고의 인재들이 진출했는데, 지금 한국언론계는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이라는 제도 자체가 지금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연구한 바로는 1993~95년, 정권으로는 아마 YS정권인데, 이 무렵 언론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제일 높았고, 언론의 사회적 영향력이 제일 컸고요, 언론계에 대한 학생들의 선망이 제일 컸습니다. 그 절정의 순간을 넘기자마자 바로 97년 IMF를 맞고 정권교체와 함께 진보­보수 간의 갈등이 심하고, 언론계는 그냥 곤두박질쳐서 온 게 또 지난 10년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절정의 순간에 언론계가 도취해 있었는지, 아니면 다가올 위기에 둔감했는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고, 오늘 주제이기도 합니다만,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현재 와서 오늘 이 주제가 너무나 적절한 것은 언론인 스스로가 상호 존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언론인이 더 이상 존경받는 보람찬 직업이 아니라는 거죠.

지금 저희 학교 학생들이 아무도 언론계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울대학교 저희 학과 학생들이 PD가 되는 등 방송에는 아직까지 진출하려고 하지만 신문사에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아요. 몇 년 전 제가 대학신문사 주간 하고 있을 때 조선일보 고위간부가 저랑 법대학장, 경영대학장, 사회과학대학장 등 네 사람을 만나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때 조선일보 고위간부가 ‘이거 시험 쳐서 학생들 뽑아봤자 훌륭한 기자 되는 거 아니더라. 학장님들이 정말 저 친구는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있다고 추천해주시면 무조건 뽑겠습니다. 추천해 주십시오’ 했어요. 그렇게 해서 한 학생이 들어갔습니다. 그 학생은 과거 제가 대학신문 운영할 때 학생편집장 출신으로 지금 조선일보에 가서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과로 돌아가서 ‘자, 조선일보에서 학교 추천을 받으면 바로 뽑겠다니까 갈 사람 있느냐?’고 물어도 아무도 손을 안 들었어요. 그게 3~4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지금 대학 3학년의 정치커뮤니케이션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신문사에 갈 사람 손 들어봐라’ 하면 정치커뮤니케이션 수업 받는 한 40명 중 우리 언론정보학과 학생이 태반이고, 그 외에 정치학과, 외교학과, 사회학과 학생들이 있는데 한두 명 손을 들까 말까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언론을 가르치는 학자들에게도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죠. 관훈클럽을 비롯한 언론계가 앞으로 공동으로 많이 노력해야 할 분야로 생각해서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목희:양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럼 플로어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박진서(관훈클럽 회원):오늘 주제가 언론계의 갈등극복의 대안을 찾는 것인데, 결론적으로 저는 2가지 이유로 해서 이 갈등극복이 머지않아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언론계의 아웃풋은 역시 상품이라는 개념을 내놓아야 될 것 같습니다. 상품이란 소비자가 선택하고, 좋은 상품은 자연히 팔리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각 언론계에서 좋은 상품을 만들면 자연히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만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이 상품은 다른 상품과 달리 진실성을 앞세우고 계도성, 공익성이 있어야만 된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앞으로 5년 이내에 적어도 이 언론계에는 경이적인 변화가 있다고들 보고 있습니다. 아까 이재경 교수께서 말씀하셨지만 미국의 각 언론사가 여러 명의 인원을 해고하고 줄였습니다. 그러한 추세는 점차 심화되어서 앞으로는 언론사의 중요부서만 남겨놓고 모든 기자가 아웃소싱으로 바뀔 전망이라고들 합니다. 때문에 각 기자들은 나름대로 자기 블로그를 만들어서 전문적인 기사를 신문사나 방송국에 파는 그러한 시대가 옵니다. 그러면 자연히 갈등, 그러한 단어 자체도 사라지리라고 봅니다. 때문에 저는 이 문제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목희:예, 그러면 질문 다 받으신 다음에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선웅(목사ㆍ전 서울신문 기자):저는 옵서버로 왔습니다만, 김민환 선생님께 짧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제가 전반적으로 느끼는 게 많은데요, 인터넷매체의 왕성하고 다양한 발전이 기존 신문을 대표하는 메이저언론의 정파성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정치인보다는 인터넷매체가 오히려 기존 메이저언론의 정파성을 더 심하게 강화시키는 게 아닌가, 이런 느낌이 드는데, 이 시점에서 언론이 중립성을 확립하려면 어떤 대안이 있겠습니까?

 

이목희:한 분만 더 질문 받고 답변 듣겠습니다. 마지막 질문 해주시죠. 마지막 질문 없으시면 답변 듣겠습니다. 김민환 교수님 우선 답변하시죠.

 

김민환:인터넷매체는 속된 말로 말씀드리면 그냥 아무나 만듭니다. 사진도 올리고, 글도 올리고 그러니까 그 출처가 불분명입니다. 그러니까 믿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주 복잡한 체계적인 게이트키핑 과정을 거치는 신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문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뭐냐면 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신문의 신뢰도가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신문의 신뢰도는 방송한테 완전히 뒤졌습니다. 지금은 누가 만드는지도 모르는 인터넷매체가 신문의 신뢰도를 앞서고 있습니다. 이게 참 한심한 일입니다. 신문이 왜 살아야 되느냐? 신뢰도 있는 매체가 필요하기 때문에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정파성 때문에 신문이 믿을 게 못 됩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정파성을 극복하고 신뢰도 있는, 믿을 수 있는 매체가 되면 신문은 반드시 살아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이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신문의 신뢰도 이게 알파고 오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목희:남시욱 선배님께서 짧게 한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남시욱:박진서 선생이 지금 좋은 지적하셨는데요, ‘앞으로 언론은 아웃소싱을 주로 하는 체계로 바뀌기 때문에 지금 같은 내부갈등이 없을 것이다, 낙관적이다’ 좋은 말씀이라고 봅니다. 저도 앞으로 어느 때인가는 지금과 같은 반목이 없어지리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이유입니다만 우리나라의 이념갈등 또 정파간 갈등은 사실 굉장히 특이한 거예요. 예를 들어 이념갈등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한반도가 분단돼 있기 때문에 대북정책, 남북정책을 둘러싸고 말하자면 대한민국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이런 세력들로 인해서 특이한 이데올로기 갈등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진국형은 아니죠. 선진국에는 공산혁명이다, 사회주의혁명이다, 그리고 김일성, 뭐 이게 없죠. 그래서 말하자면 좌우의 이념체제, 대립 자체의 양상이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이 쓴 거 보면 미국 언론인들의 이념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다원적인 이념에 예민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기껏해야 미국 같은 경우 복지문제, 요새 같으면 의료보장 같은 문제를 가지고 하는데 굉장히 냉정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시대가 금방 올 거라고 봅니다. 지금의 우리 이념대립이란 게 아주 불건전한 후진적인 분단국가의 상황인데, 나는 이건 언젠가는 해소되리라고 봅니다. 그때 가면 이념대립은 적어도 없어질 거고, 다만 정파성은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기관지가 아닌 한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언론인은 자율성, 자기 완결성, 독자적인 판단력, 자존심까지 가진 기자로 우뚝 서서 언론이 하나의 사회적인 인프라, 사회적인 제도의 기능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래야 언론이 민주주의 보루라는 이유가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법부, 국회 꼴 보세요. 언론이 바로 서지 않으면 민주주의 자체가 위기에 빠지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런 점에서는 낙관하고 있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목희:감사합니다. 장시간 주제발표해 주시고, 토론해주시고, 또 플로어에서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플로어에 더 많은 질문기회를 드려야 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시간관계상 오늘 토론회는 이 정도로 하고요, 오늘 논의된 내용은 저희가 전력을 다해서 후배기자들한테 알리고, 대안을 찾는 데 도움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이게 실천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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