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사업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어요

선배 언론인 :
황경춘 전 AP서울지국장
대담 기자 :
김균미 서울신문 부국장

대담 날짜 :
2014.11.20
조회수 :
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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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령 관훈클럽 회원 황경춘 전 AP통신 서울지국장한테 듣는다

 

대담 : 김균미 서울신문 편집국 부국장

 

 

‘미국 백악관에 헬런 토마스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황경춘이 있다.’

 

 최고령 관훈클럽 회원인 황경춘 전 AP서울지국장을 만나 뵌 건 초겨울 바람이 매서웠던 11월 20일이었다. 1924년 2월생이시니까 만 90세를 지나 91세를 목전에 두고 있지만 놀라울 정도로 정정하셨다. 

 일제 말기 징집됐다가 돌아와 1957년 AP통신 서울지국 기자로 출발해 평생을 외신기자로 활동한 원로 언론인이다. 장면 총리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 8명의 한국 대통령 취임을 지켜본 격동기 한국현대사의 증인 황경춘 전 AP통신 서울지국장을 만나 근황과 최근 한일관계, 급변하는 언론환경에 대한 소회 등을 들었다. 

 언론계 대선배들에게는 ‘K. C. Hwang’이라는 바이라인으로 더 친숙한 황경춘 전 지국장은 “역사적 소명의식과 지사적 풍모가 넘쳤던 예전과 달리 최근 기자들이 샐러리맨으로 변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한일관계가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자들조차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 일본 관련 글을 쓸 계획이라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황 전 지국장은 요즘도 인터넷칼럼서비스 사이트인 자유칼럼그룹과 네이버 카페인 ‘마르코 글방’에 오솔길이라는 필명으로 한일관계, 일본 관련 칼럼을 정기적으로 올리고 있다. 인터뷰는 서울신문사 3층 소회의실에서 진행됐다.

 

90세 넘었지만 아직도 현역 언론인

 

-‘영원한 현역’이라는 표현은 황 선배님을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자유칼럼그룹에 한 달에 1~2번 글을 올립니다. 회원수가 2만 명 정도 된다고 들었는데, 칼럼을 쓰는 사람 중에 나이가 제일 많고 일제 경험이 있어 일본 관련 글을 주로 쓰고 있습니다. 회원만 보는 카페도 있는데, 거기에는 이틀에 한번 꼴로 한국과 관련된 아사히신문의 사설이나 논설을 번역해 올리고 있습니다. 일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요. 그리고 나서 참고가 될 만한 글들은 네이버 카페인 마르코 글방에 옮겨서 올립니다. 이밖에 노인 건강과 복지, 장수 이야기 등에 대한 글을 씁니다.”

 

- 2002년 한일월드컵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줄곧 영어로 글을 써오셨는데, 자유칼럼그룹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06년으로 기억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자유칼럼을 접하고 게스트칼럼에 두 번인가 글을 썼는데 연락이 왔어요. 그 후로 정식 필진이 돼 10년째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자유칼럼그룹의 임철순 씨가 마르코 글방을 소개해 그곳에도 글을 쓰고 있고요. 학교에서 한글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세대여서 솔직히 한글로 글을 쓰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뒤늦게 한글을 다시 배워 한글로 글을 써보자고 결심했고, 그 결실을 자유칼럼을 통해 맺었습니다. 철자법이나 띄어쓰기 등에 아직도 자신이 없어 처음에는 임철순 씨한테 원고를 미리 보내 교정을 받고 글을 올렸어요. 지금도 때때로 카페에 먼저 올리면 교정을 봐주는데, 아직도 교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황 전 지국장은 1924년 2월 26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까지 그곳에서 살다 ‘우리말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에 이끌려 남해로 왔다. 남해에 있는 초등학교에 1학년으로 다시 들어가 졸업한 뒤 진주중학교(5년 과정)를 마쳤다. 이후 일본 주오(中央)대 법대를 다녔지만 졸업하지는 못하고 1945년 징병돼 일본 도쿄 인근의 소년항공대에 배속됐다가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왔다. 

 

-학창시절부터 기자가 꿈이셨나요.

 “기자나 아나운서처럼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싶었습니다. 해방 직후는 잘 알다시피 좌우투쟁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영어를 조금 한 덕에 1949년 부산에 있는 미국문화원(공보원)에 취직했어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부산에 피난 수도가 꾸려졌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공보처장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씨였는데 11월 부산에서 영자신문인 코리아타임스를 창간했어요, 신문사로부터 취직 제의를 받았는데 미국문화원에서 붙잡아 이직하지 못하고 있다가 1957년 AP통신으로 옮기면서 언론계에 발을 담갔습니다.”

 

-1957년부터 계속 AP통신에서 활동하신 건가요.

 “1957년 1월 20일 AP통신에 입사해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 1월까지 만 30년 동안 AP통신 서울지국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서울지국으로 옮겨 일하다 1992년부터는 스트링거로 바꿔 여리 외신들에 글을 썼습니다. 나이 70이 넘어 현장에 나가면 너무 젊은 친구들만 들어 일종의 위화감도 들고 해서 완전히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AP통신 때처럼 24시간 마감시간이 따로 없는 것도 아니고 낙종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기사를 쓰는 것은 여전히 스트레스더라고요. 그래서 일을 쉬엄쉬엄 하고 있는데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 기사를 미국 CBS방송에 전화로 송고했어요. 그것이 기자로서 마지막 글이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만 78세였죠.”   

  

4·19혁명 발포 현장 취재 가장 기억에 남아

 

-45년간 외신기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꼽는다면.

 “4·19혁명 발포 현장 취재가 기억납니다. 당시는 (통신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송고하기 굉장히 어려웠어요. 당시 국민대로 가는 길모퉁이에 다방이 하나 있었어요. 시위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데 총소리가 나고 시위대가 후퇴할 때 다방으로 뛰어가 전화기를 빌려달라고 요청해 용케도 회사와 연결됐어요. 일본 도쿄지국에서 지원 나온 기자에게 발포사실을 알렸고 1보가 나갔습니다. 5·16군사혁명 때도 장면 총리가 머물던 반도호텔 건너편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사환이 밤을 새다가 총소리를 듣고 한밤중에 저와 진철수 씨에게 연락을 해 기사를 내보냈는데 두 사건이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외신기자로서 어려운 점이 많았을 텐데요.

 “AP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합니다. 마감시간이 따로 없다는 얘기지요. 사건이 터지면, 그리고 기사가 있으면 즉시 송고해야 합니다. 24시간 마감시간이라는 얘기입니다. 항상 긴장하고 있고, 뉴욕 본사와 시차가 있으니까 밤낮이 바뀌어 밤에도 계속 일할 때가 많습니다. UPI와 경쟁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낙종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 못지않게 황 전 지국장을 힘들게 한 것은 언론인, 특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였다고 한다.

 

-보도한 내용 때문에 한국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후락의 방북과 10·26,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국내 언론과는 달리 AP통신은 독자적인 송신만을 갖추고 있어 정부 통제를 받지 않고 기사를 내보낼 수 있었어요. 광주 관련 기사가 나간 뒤 왜 이런 기사를 썼느냐, 국익에 반하는 기사 아니냐. 당신은 한국 사람이냐 아니면 외국 사람이냐며 2박 3일 동안 조사를 받았습니다. NHK, 아사히, 로이터통신 기자들과 함께 새벽에 불려갔는데, 뉴욕에 있는 AP사장이 청와대에 직접 항의해 풀려났습니다.” 

 

-외신기자로서 갈등이 적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국익이 우선인지, 아니면 신문기자로서 정확한 뉴스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먼저인지를 놓고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후 아주 민감한 기사는 외국기자들이 송고하고, 우리는 정보만 알려줬습니다. 동아투위 사건 때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을 지냈는데 외신기자클럽 이름으로 동아일보 1면에 광고를 냈습니다. 외신기자클럽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반대하는 기자들도 많았지만 비상시였고,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설득해서 광고를 실었습니다.”

 

중립적으로 진실만 보도하는 언론 환경이 아니어서 안타까워

 

-최근 언론환경이 놀랄 정도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예전에는 신문기자들 월급이 굉장히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지사적이랄까, 국민들을 계몽한다는, 애국한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있는 신문기자들이 많았습니다. 요즘은 기자들이 전부 샐러리맨 된 것 같은 감이 있습니다. 우리 때는 이데올로기 문제에 그렇게 집착 안했는데. 요즘은 사주, 사시, 상하관계 등 이데올로기로 나뉜 것 같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미국의 뉴욕타임스처럼 중립적으로 진실만 파고 보도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통신수단이 또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예전에는 지면이 한정돼 있어 기자들이 서로 기사를 내보내려고 치열하게 경쟁을 했는데, 요즘은 쓰는 대로 다 나가니까 (내용이) 잘못된 기사, 수준 미달의 글들이 많이 나오는 게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기자들이 물질적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신적으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시간 지나면 차장 부장 되고, 줄만 잘 서면 정치도 하는 시대도 되고. 우리 때는 상당히 정신적으로 언론자유 위해 투쟁해야 한다, 국민들을 위해 올바르게 봉사해야 한다는 사명감 많았는데 요즘은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언론들의 한일 관계 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풍조는 조금 잘못하면 친일파로 몰립니다. 진짜 국익을 위해, 장래 위해 한일관계를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땅을 거쳐 모든 문화가 일본에 전달됐습니다. 지금은 기술적으로 일본이 우리보다 조금 앞서 있습니다. 자동차는 우리가 일본을 바짝 따라갔고, IT는 우리가 앞서 있어요. 기초과학분야에서는 우리가 일본에서 배울 게 많습니다. 얄밉지만 이웃이니까 손잡고 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글 보고 연락을 해와 한일관계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어 걱정입니다.” 

 

-글은 언제까지 쓰실 계획인가요.

 “죽을 때까지,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쓸 것입니다.”

 

-건강 비결이 따로 있으신가요.

 “절제를 하는 편입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요즘도 6시 조금 전에 일어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풉니다. 적당한 운동과 채식 위주로 소식을 합니다.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 이메일 주소

- 황경춘 전 AP통신 서울지국장 : casey24@hanmail.net

- 김균미 서울신문 편집국 부국장 : kmkim@seoul.co.kr

 

황경춘 AP통신 전 서울지국장

 

경력

- 미국 공보원 신문과 근무

- 코리아타임스 기자

- 서울외신기자클럽 초대 회장

-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서울지국장

-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서울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