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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 같은 지도자 나타나기를!

선배 언론인 :
정종식 전 연합통신 사장
대담 기자 :
고승철 나남출판 사장

대담 날짜 :
2015.6.17
조회수 :
18,720

 

 

드골 같은 지도자 나타나기를!

대담 = 고승철 나남출판 사장

 

정종식(鄭宗植) 선배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어떤 단어가 적합할까? 인터뷰 전에 내내 이 화두로 고민했다. 언론인, 공직자, 재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오래 활동한 정 선배의 삶을 단어 하나로 요약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클래식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가진 문화예술인이기도 해서 직업 특성에만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불현 듯 떠오른 키워드가 신사(紳士)’였다. 정 선배는 점잖고 교양 있는 남자를 뜻하는 상투적인 신사를 뛰어넘는 진정한 신사의 아이콘이 아니겠는가. 우선 그는 외양이 단정하다. 언제나 말끔히 빗은 머리칼, 잘 어울리는 정장 차림이 돋보인다. 어느 원로 선배가 청장년 시절의 정종식 선배에 대해 언급하기를, ‘한국 언론계 최고의 미남자’ ‘한국의 클라크 게이블(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연 남자배우)’이라 했다. 외모로 먹고 사는 직업인이 아닌 언론인에게 이런 칭호가 적절한지 의문이나 아무튼 그런 평가 자체는 틀리지 않다고 본다. 그의 청년 시절 사진 몇 장만 보면 누구나 이에 동의하리라.

진정한 신사는 겉모습이 깔끔해야 할 뿐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도 정 선배는 신사에 잘 어울리는 분이다. 아랫사람에게도 경어를 쓰며 늘 남을 배려하는 행동이 몸에 뱄다. 신사라면 영국 신사라는 말이 연상되겠으나 정 선배는 한국 언론인 가운데 파리특파원으로 최장 기간 체재(19684~197510월 한국일보, 19914~199710월 경향신문, 통산 14년간)했으니 프랑스 신사가 더 어울리겠다. 아니, 좀 고풍스러운 불란서(佛蘭西) 신사가 더 그럴듯하겠다.

2015617일 오후 4시에 서울 종로구 구기동 소재 정 선배의 자택에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빌라의 거실과 서재에서,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숲향기를 맡으며 대화를 진행했다.

인터뷰이 정 선배와 인터뷰어 필자의 인연을 잠시 소개하겠다. 필자는 1990년대 초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했는데 그때 경향신문 구주(歐洲)본부장으로 활동한 정 선배를 3년 가까이 모셨다. 정 선배의 고향은 경남 통영. 필자도 통영의 충렬초등학교라는 데 잠시 다닌 적이 있어 약간의 지연(地緣)이 있기도 하다. 또 필자가 동아일보에서 퇴사한 후 몸담은 나남출판사에서 정 선배의 명저 <파리특파원의 소묘첩>이 나오기도 했다.

 

부정선거 취재언론인 사명 깨달아

 

-왜 기자가 되셨는지요?

대학생(서울대 정치학과) 시절에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자연스레 명동성당에 자주 가게 되었지요. 1955년 당시에 천주교재단은 경향신문을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경향신문에 와서 기자로 활동하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정치학계의 석학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교수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할까 했는데 뜻밖의 스카웃을 받은 셈이지요. 자유당 정권이 발췌개헌안, 사사오입 개헌안 등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이를 비판하는 데 경향신문이 선봉에 섰습니다. 학자와 언론인, 두 가지 길을 놓고 고민하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일에 일조하겠다는 정의감에서 기자의 길에 뛰어들었습니다. 기자 초기에는 대학원에 다니며 학업도 병행했습니다.”

 

-입사 절차는 어땠습니까?

논설위원 몇 분과 면접을 보았지요. 어느 분이 영문 시사잡지를 건네주며 어느 대목을 읽어보라고 하더니 뜻을 물어보더군요. 즉석에서 해석했더니 만족하신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것으로 합격한 것입니다. 경향신문 소공동 시절이었습니다.”

 

-입사 초기에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셨는지요?

교열부에 배속되어 기사 교정 일부터 배웠습니다. 얼마 후에 정치부에서 일했는데 그때 민완 정치부 기자로 송원영 선배가 계셨습니다. 송 선배와 함께 국회를 출입하며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려고 노력하였지요.”

 

-정치부 기자 시절, 기억에 남는 취재 현장은 무엇입니까?

영덕 보궐선거 취재를 갔습니다. 독재 정권 비판에 앞장 선 경향신문에서 온 기자에 대해 자유당 후보 측은 냉담하더군요. 부정선거를 감시하러 간 셈인데 여기저기 건장한 청년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습니다. 야당인 민주당 선거사무소에 가니 사람 대접을 하더군요. 투표가 끝나고 밤에 개표할 때 사단이 벌어졌습니다. 9시경에 개표소 전기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때는 흔히 어둠을 틈타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하는 이른 바 환표(換票)’가 성행했습니다. 15분간 정전된 동안에 부정선거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난리통이 벌어졌지요. 결국 전등이 다시 켜지고 개표가 진행되었는데 자유당 후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어요. 부정선거 현장을 똑똑히 목격한 것이지요. 이런 부정을 비판해야 민주주의가 바로 설 것이라 믿었고 그런 언론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자유당 정권은 4·19 혁명으로 붕괴되었는데요. 그때도 정치부 기자였지요?

그렇습니다. 수도사처럼 구도(求道)하는 정치가인 장면(張勉)박사가 제2공화국의 총리로 집권하지 않았습니까. 자유당 독재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는 점에서는 기뻤지만 오래 한 솥밥을 먹은 송원영 정치부장이 장면 총리의 공보 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신문사를 떠난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 장면 정권이 1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1961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정 선배께서는 장면 박사가 영면한 후 시신도 볼 정도로 각별한 관계로 알려졌습니다. 장면 박사의 인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196664일이었습니다. 장 박사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혜화동 자택으로 황급히 달려갔더니 그분은 대청마루 중앙에 반듯이 누워계셨습니다. 미처 수의(壽衣)도 입히지 않아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누워계신 그 자태에는 어디 하나 흐트러진 데가 없더군요. 손에는 묵주(黙珠)를 가지런히 쥐고 계셨고.

선종(善終)하시기 전 자택을 처음 찾은 것은 하야(下野) 후 이른바 이주당(二主黨)사건이 나던 때였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의 군사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장 박사가 음모한 것이란 내용이었지요. 어느 날 혜화동에서 전화가 걸려와 받았더니 장 박사였습니다. 곧 오라는 것이었지요.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장 박사는 그 사람들이 어쩌자고 알지도 못하는 일을 꾸며서 사람을 또 못살게 구는데하시며 소문의 내막을 물으시더군요. 저도 들어서 아는 것만 말씀 드렸더니 장 박사는 몇 번이고 혀를 차며 고개를 옆으로 내젖더군요. 장 박사는 당시 성당 다니는 일 외에는 일체 바깥세상과 소식을 끊고 조용히 칩거하고 있었습니다.”

 

-정치가 장면 총리를 평가하신다면?

장면 총리는 재직시 부패하지도 않았고 무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국토개발을 해서 경제재건을 하려고는 했어도 국민을 기아선상에 몰아붙이지는 않았지요. 625 전쟁이 터지던 날 주미 대사였던 장 박사는 잠자리에 든 미국 트루먼 대통령을 일깨워 그의 무릎을 붙들고 흔들면서 한국을 도와주시오하고 자유우방의 지원을 요청했던 애국자였습니다. 백만 시민이 운집한 한강 백사장에서 독재와 부정을 몰아내고 참된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외치던 장 박사는 진정한 민주투사였습니다. 장 박사에게 지금도 한 가지 한이 있다면 왜 516 군사쿠데타가 났을 때 그 쿠데타 세력과 싸우려 하지 않았던가 하는 점입니다. 훗날 장 박사는 무수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게 되므로라 말했다더군요.

장면 총리는 우리에게 경건한 민주주의를 심어 주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 경건한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청년 시절 정종식 기자의 활동상을 취재하다 <경향신문 40년사>에서 정종식 선배가 직접 집필한 나의 경향시절이란 글을 발견했다. 아래에 옮긴다.

 

== 폐간 덕분에 난생 처음 실업자 생활 ==

경향신문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 대학을 갓 나온 1955년 봄이다. 그때 벌써 정국은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었다. 입사 바로 전 해에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 철폐개헌안이 나와 국회에서 일단 부결 선포까지 되었던 것이 하룻밤 사이에 사사오입을 해서 통과된 것이라는 기상천외의 정치극이 벌어진 직후였다.

입사 후 한달쯤 교정부에서 글을 좀 익혔을까, 어느날 갑자기 사에서 국회에 나가라는 지시가 내렸다. 그때만 해도 국회는 두 사람이 출입하도록 되어 있었고, 두 사람은 국회 뿐 아니라 원외의 각 정당, 정치단체까지 커버해야만 했다. 당시 같이 나간 나의 선임자는 문장에 빼어나고 언제나 열정에 넘쳐있는 송원영(宋元永).

정치기자로서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그 무렵의 정국이 격동에 격동을 거듭했던 탓인지 종내 정치기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어느날 저녁 야근하다 화재가 났다는 말을 듣고 현장에 뛰어 나갔으나 그 간단한 불 취재가 어찌나 어려운지 쩔쩔매던 기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마감시간이 되면 국회 본회의 기사를 정오현재(正午現在)’하고 말미에 달고는 끊고, 본회의를 취재하면서 써놓은 원내 교섭단체와 상임위원회의 움직임, 원외 각 정당의 동향 등 기사와 선배가 쓴 기자석같은 가십과 해설기사를 똘똘 뭉쳐 쥐고 태평로의 국회의사당에서 소공동의 신문사까지 대로 한 복판을 뛰는 것이다. 그때는 한길에는 지금의 평양 거리만큼이나 차량통행이 적어 그런 난폭한 레이스가 가능했던 것 같다.

당시 사회의 일각에서는 부정부패가 잇달아 터져 나왔고, 국회는 국정감사권을 잘도 휘둘렀으며, 또 언론도 웬만큼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던 때라 정치기사도 그야말로 신바람이 나는 지경이었다. 선거라고 치르기만 하면 부정선거가 돼버려 몇몇 군데는 재선거를 실시해야 했고, 재선거를 하면 또 환표·올빼미·피아노하는 부정이 재연되곤 했었다.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유세할 때 한강 백사장을 백만의 시민이 꽉 메우던 일, 그 해공(海公) 선생이 졸지에 서거했을 때의 충격, 장면(張勉) 부통령을 저격하던 사건,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선거 중 급서, 그리고 4·19 의거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경향신문은 그때 먹칠만 해도 팔린다고 말할 정도로 장안의 인기가 대단했다. 한창 때는 경향의 정치부도 기라성 같은 인재들로 보강되어, 이웅희, 권오기, 이환의, 방일홍, 김진배, 윤상철, 조규진 제씨로 찬란하였다. 결국 그 인기 탓이었는지 4·19 조금 전에 경향은 폐간이란 가혹한 조치를 당하고 말았다. 나의 생애 중 직장을 잃고 놀아보기는 그때가 처음이다. 

 

불타는 한국일보, 연기에 질식하다 

 

-경향신문을 떠나 한국일보로 가신 계기는?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천주교재단의 경향신문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결국 언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준구라는 기업인에게 신문사가 넘어갔지요. 제가 정치부장일 때였는데 이준구 사주가 어느날 천주교를 비판하는 내용의 무슨 원고를 건네주며 실어라고 하더군요. 서랍에 넣어두고 묵살하였지요. 2~3일 후에 왜 싣지 않느냐고 다그치더군요. 못 싣겠다고 거절하고 사표를 던지며 떠났습니다. 경향신문 정문 앞에 마침 한국일보 편용호(片 鎔浩, 1928~1978) 정치부장이 회사 차를 갖고 와 대기하고 있더군요. 아마 한국일보 측에서 제 신상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차를 타고 갔더니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께서 제 손을 잡고 외신부장으로 함께 일합시다!’라고 외치더군요.”

 

-언론계 인재를 모으던 한국일보 초기 시절이군요. 한국일보 사주인 백상(百想) 장기영(張基榮, 1916~1977) 선생은 초인적 에너지의 소유자로 알려졌는데요. 백상과 관련한 일화를 소개해 주십시오.

그분은 통이 엄청 크면서도 세심한 측면이 있습니다. 종이 한 장도 아끼는 근검절약형이지요. 외신부에서 쓰는 텔레타이프 용지가 그때는 값비싼 외제품이어서 아껴서 사용하였답니다. 어느 날 한국일보 편집국에 불이 났습니다. 저는 텔레타이프실로 뛰어 들어가 텔레타이프 프린터 3~4대를 꺼내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들어가 용지 뭉치도 손에 닿는 대로 갖고 나왔지요. 자욱한 연기 속을 빠져나오는 순간 저는 질식하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눈 앞에 장기영 사주의 모습이 어른거리더군요. 누군가가 인공호흡을 한 모양인데 눈을 떠보니 장기영 회장이 한국일보 화재사고를 빨리 기사로 작성하라고 호통을 치더군요. 그분은 한국일보의 모든 기자 가운데 가장 부지런한 기자였습니다. 암튼 텔레타이프 구출 업적 덕분에 저는 표창을 받았답니다.”

 

-이력서를 보니 한국일보 외신부장 다음에 경향신문 문화부장으로 가셨더군요.

거기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부산일보에서 필명을 떨치던 황용주 주필이 1964년 문화방송 사장으로 부임하여 저와 함께 일하자며 보도국장직을 제의했습니다. 방송의 시대가 도래하리라고 짐작한 데다 황용주라는 걸출한 언론인과 신생 방송사를 이끌겠다는 포부가 있었기에 수락했지요. 묘하게도 19641111일 문화방송에 출근하는 날에 황 사장이 구속된 겁니다. 황 사장이 월간 <세대>에 기고한 남북한 통일론이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와중에 제가 문화방송에서 일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 당혹한 사정을 안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 발령을 내더군요.”

 

황용주(黃龍珠, 1918~2001) 주필은 1950년대,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겸 언론인이었다. 주로 부산에서 활동하였기에 전국적인 명성은 얻지 못했지만 영남 지역에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이라는 학연으로 언론인 황용주와 군인 박정희는 막역한 관계였다. 훗날 소설가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국제신보 이병주(李炳注, 1921~1992) 주필도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난세(亂世)의 전복(顚覆)을 꿈꾸었다.

 

-1965년 중앙일보 창간 멤버로 동참하셨지요?

정치부장으로 갔습니다. 새로운 신문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넘쳐 며칠 밤샘을 하고도 피곤한 줄도 모르던 때였습니다. 이원교 편집국장, 유인호 편집부장, 박남규 경제부장, 이강현 사회부장, 김용호 지방부장, 예용해 문화부장 등 유수한 신문에서 활약하던 쟁쟁한 데스크진이 합류했지요. 창간 직후에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습니다. 삼성이 창간한 중앙일보에 몸담고 있으니 곤혹스러웠지요. 그때 특히 이른 바 야당지라는 동아일보가 날선 비판을 했습니다. 국회에서 야당은 연일 정부와 삼성을 질타했지요. 정치부장으로 참 난처했습니다. 고민 끝에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그러고 서울신문 편집부장을 잠시 지내다 1967년 한국일보로 돌아가 부국장 겸 외신부장으로 일했습니다.”

 

프랑스 ‘68 학생 혁명때 파리특파원 부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으로 부임하신 때가 19684월이군요.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유럽의 ‘68 학생 혁명이 터진 때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특파원으로 부임하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한 것이 1968419, 419 혁명 기념일이었지요. 학생 혁명에 대한 상념에 잠기며 파리에 도착했더니 그곳에서도 학생 혁명이 벌어졌어요. 파리에서 기거할 곳도 채 마련하기 전이었는데 학생가(카르티에 라탱)의 소요는 날로 심해가고 있었습니다. 뭘 정리할 틈도 없이 우선 거리로, 대학으로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게다가 5월에 접어들 무렵부터 월남(越南)평화회담이 파리에서 열린다고 하여 이것 또한 맡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

사회가 고루 발전하지 않든지, 손을 써야 할 곳에 미리 손을 쓰지 않으면 이 사회의 사각지대에 무서운 폭풍우가 밀려닥친다는 사실을 그때 절감했습니다. 니체의 말대로 대사건은 비둘기의 발에 묻어오는 법이지요.

프랑스 전국이 마비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시내의 택시, 버스, 지하철조합이 스트라이크를 단행하여 모든 교통이 두절되어 저도 취재를 하기 위해 발이 퉁퉁 붓도록 온 거리를 종일 뛰고 걸어야 했습니다. 이따금 다니는 개인 승용차도 주유소가 덩달아 파업에 들어가는 통에 뚝 끊겼지요. 시골에서 시내에 들어오는 식료품공급 트럭이 가끔 다닐 뿐이었지요.

공항에서도 비행기 이착륙이 멎었고, 체신노동자가 스트라이크라 편지와 전보마저 다 끊겼습니다.

방송국이 파업에 들어가 처음에는 TV에서 영상이 사라지고 음악만 나왔고 나중에는 라디오도 끊겼지요.“

 

-프랑스 문화장관을 지낸 문호(文豪) 앙드레 말로(1901~1976)에 대해 제가 관심이 있어 자료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국일보에 실린 정 선배의 앙드레 말로 인터뷰기사를 발견하고 심층적인 질의 응답에 매우 놀랐습니다. 인터뷰에 얽힌 일화를 소개해주십시오.

당대의 거장인 만큼 몇 번인가 편지를 낸 끝에 회견이 이루어졌습니다. 해외여행, 와병 등이 그때마다 이유였으나 19746월에는 때마침 한국일보 창간 20주년이라 이를 기념한 특별회견이라고 우기다시피 하며 응낙을 받아내었지요. 말로가 그때는 일본 여행중이었지만 파리에 돌아오면 만나 줄 것이라고 소피 드 뵐모랭 여사(말로의 연인 루이즈 드 뵐모랭의 여동생)가 알려주더군요.

말로는 약물과용으로 언어장애의 증상을 때때로 보여왔고 이따금 텔레비전에 나타났을 때 보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목청을 훑어서 나오는데 여간 고생스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과연 인터뷰가 제대로 이뤄질까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한 시간 남짓 계속된 회견에서 별 고통을 느끼지 않은 듯해서 정상적으로 진행됐습니다.

만날 때, 회견 도중에, 헤어질 때, 말로 옹은 한 번도 웃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정에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지요. 그렇다고 화가 난 얼굴도 아니었습니다. 웃지 않는 데서 오는 신비감이랄까요, 그런 느낌을 받았지요. 드골 장군이 처세의 잠훈(箴訓)처럼 지니고 다닌 말이지만 말로한테도 이런 구석이 바위처럼 도사리고 있다는 데서 그는 영락없는 드골 사람이었습니다.

질문을 하면 그의 형형한 동공(瞳孔)이 더 빛을 내며 뚫어지게 저를 쳐다보곤 했지요. 그러고선 엄정한 표정 그대로 또박또박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이 던지는 상()과 의미는 얼핏 포착하기가 어려울 만큼 때로는 밀도 높은 시어(詩語) 같았고 때로는 한갓 예언가의 점사(占辭) 같기도 했답니다. 어디까지 내려가야 바닥에 닿을지 모를 해구(海溝)와 같은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고 형용하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그때의 회견에서 가장 강렬하게 받은 인상은 말로가 기계(機械)에 대해 무한하게 경의를 나타내면서도 심히 경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프랑스 대통령선거 때는 분명히 지스카르 데스탱 후보의 적수였던 샤방 델마스를 지지하고 나섰고 그를 위한 찬조연설을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 유권자들에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거 찬조연설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말을 했고 결국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이 시간을 통해 거지반 해버린 것밖에 되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의 말은 전파미디어가 정보문화의 새로운 총아로 등장한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고 전파미디어에게 대담하게 교육의 기능을 양도하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문명관(文明觀)이 튀어 나왔기 때문에 선거에는 소용이 닿지 않았을지라도 연설치고는 드물게 찾아지는 가치를 지닌 한 시대의 예언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전파미디어라는 기계와 현대문명에 대한 상관관계론을 제가 만났을 때는 어떤 경고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기계가 인간을 좀먹는다는 것이 그의 제일성이었습니다. 텔레비전 연설 때와 견주어 보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반()기계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 프랑스 국내기자들과 회견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기계의 인간파괴를 쉬지 않고 선언했습니다. 오늘날의 컴퓨터 발전과 보급의 속도를 보면 사실 새로운 기계반응 시대가 개막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이미 컴퓨터는 어느 일면에서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머나먼 지적(知的) 프런티어에 다다랐지요. 인간이 컴퓨터가 내뱉은 데이터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관리된다는 점에서 말로의 우려 또한 옳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터뷰이 가운데 앙드레 말로 이외에 기억나는 거물급 인사는 누구입니까?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1975) 박사이지요. 토인비 교수와 처음으로 상면한 것은 내가 파리특파원으로 상주하기 전인 1964년이었습니다. 그해 4월 런던 서북쪽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시에서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그때 저는 프랑스 중부의 비시에서 열린 세계기자연맹(IFJ)에 한국의 관훈(寬勳)클럽을 회원으로 가입시키기 위해 한국대표로서 혼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IFJ에서 한국 언론단체의 가입이 처음으로 실현되자 본사에서는 곧 발길을 돌려 스트랫퍼드로 달려가 기념행사를 취재하라고 독촉해 왔습니다.

런던에 들렀을 때 제 대학 동기생인 이남기(李楠基) 영사(전 필리핀 대사)를 만나 토인비 교수 취재 주선을 부탁하고 스트랫퍼드로 떠났습니다. 스트랫퍼드에서는 음악회, 연극공연 등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여담이지만 마침 제가 트리니티 교회에 닿을 무렵 예후디 메뉴인이 바로크 실내악단과의 연주를 시작하더군요. 연주를 마치고 성당 뜰을 나올 때 저는 메뉴인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그와 뜰에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생면부지의 이방인을 취재기자라는 한마디에 친근한 지기(知己)처럼 대해 주더군요.

런던으로 돌아와 보니 이남기 영사가 토인비 교수와의 회견일자를 약속해 놓았더군요. 그 날에 속기사 아가씨를 대동하고 토인비 교수의 연구소로 찾아갔습니다.

이것이 토인비 교수와의 첫 회견입니다. 그의 유명한 역사의 연구한국에도 잘 알려졌으나 그와 직접 대면하여 우리의 입장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은 없었습니다. 선뜻 인터뷰에 응해준 것이 진심으로 고마웠지요. 토인비 교수와 메뉴인은 자상하고 순박한 점에서 매우 닮은 인물들이었지요.

그 후 토인비 교수와 다시 만난 것이 1968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 만난 것이 1972. 4년마다 토인비 교수와 회견을 가진 셈입니다. 1972년에 만났을 때는 다음 회견이 1976년이 되겠노라고 서로 웃으며 말하고 헤어졌습니다. 1975년 정초 토인비 교수는 이사를 했다고 새로 옮긴 주소를 담은 엽서를 파리의 제 집으로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그해 9월 저는 파리를 떠나 서울에 돌아왔고, 1022일 뜻밖에도 토인비 교수가 장서(長逝)했다는 부보(訃報)를 접했습니다. 1976년으로 잡아두었던 박사와의 정기회견은 영영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질문을 하면 바싹 다가앉아 듣고선 높은 소나무 가지에 바람이 스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눈에 광채를 띠며 대답을 해주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1964년 처음 회견했을 때는 나나 동행한 친구 이 영사는 두말할 것도 없고 속기사인 영국 아가씨까지 두 손을 들 만큼 박사의 말씨는 무척 빠르더군요. 그러던 것이 1968년에는 상당히 느렸고, 1972년에는 말이 더욱 처졌습니다. 1976년에 회견이 이루어졌다면 아마 토인비 박사는 빙그레 웃기만 했을지 모릅니다.”

 


 

남북한 통일을 꿈꾸며언론인, 정치학도 경륜 활용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신 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일간스포츠 편집인 겸 편집국장을 지내셨더군요. 그러다 1978년 통일원 정책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기셨지요. 통일원에서 남북총리회담 실무회담 대표로 활약하셨고요.

대학 은사 이용희 교수께서 통일원 장관으로 부임하시면서 자신 곁에 와서 도와달라고 요청하시더군요. 학교 연구실을 지키지 않고 언론인의 길로 나간 죄책감이 있었기에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갔습니다. 언론인 경력, 정치학도로서 남북한 통일에 기여하자는 소명의식도 있었고요. 남북 총리회담을 열기 위해 북측 대표 3명과 여러 차례 만나 줄다리기 협상을 벌였으나 북한의 무성의로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남북한 통일에 관한 전망, 어떻게 보십니까?

한반도 운명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어디에도 편향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등거리 외교를 펼쳐야 합니다. 통일의 당위성은 말할 필요 없이 중요합니다. 북한의 개방이 무엇보다 선결조건입니다. 개방을 통해 북한 인민들의 생활의 질과 인권 상황을 개선해야 합니다. 북한의 선군정치는 곤란합니다.”

 

-연합뉴스의 전신인 연합통신의 사장으로 1983~1986년 재임하셨습니다. 당시가 5공화국 시절이지요. 군부세력은 언론통폐합을 강행하면서 여러 통신사들을 하나로 묶어 연합통신을 설립했습니다. 이 무렵을 회고해주십시오.

동양통신, 합동통신 등이 통합해 연합통신이 출범했습니다. 라이벌 회사들이 한 지붕 아래에 살게 되었으니 불협화음이 있었습니다. 인화를 중시하고 근무여건을 개선하려 노력했습니다. 독자적인 사옥 부지를 마련하려고 백방으로 다녀보니 한국일보 옆 중학교 자리가 최적지더군요. 안타깝게도 그 얼마 전에 그 땅이 대우그룹에 팔렸더군요. 서울역 앞 대우빌딩으로 달려가 김우중 대우 회장을 만나 되팔라고 통사정을 했지요. 그랬더니 김 회장이 어려운 일 맡으셨네요라 말하며 제 제의를 받아들였답니다. 대우가 매입한 직후 땅값이 꽤 많이 뛰었고 더 많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는데 대우는 매입가로 되팔았습니다. 대신에 조건을 하나 붙였는데 사옥 건설공사는 대우건설이 맡는 것으로 해달라고요. 그후 그 땅이 노른자위로 주목 받자 모 언론사 측에서 탐을 냈습니다. 저희에게 팔라고 제의해 거절했더니 권력층 인사를 앞세워 압력을 넣더군요. 저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연합통신 사장직 재임에서 제가 탈락했는데 아무래도 사옥부지 건 때문에 그런 것 같았습니다.”

 

정종식 선배는 그후 한진그룹 상임고문, 대한준설공사 사장, 한국공항 사장 등을 역임했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자가 정 선배를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상 파리에 자주 들르는 조 회장은 불어, 영어, 일본어에 두루 능통한 데다 국제정세를 읽을 줄 아는 눈을 갖춘 정 특파원을 지켜보다가 발탁한 것이다.

이렇게 재계에서 5년간 활동한 정 선배에게 언론인 자리에 컴백할 기회가 왔다. 1990년 경향신문을 인수한 한화그룹이 1991년 봄에 정 선배를 구주본부장으로 영입한 것이다.

1991년 무렵엔 유럽은 격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독일이 통일되고 유럽통합이 추진되기 시작했으며 동유럽 여러 국가에 민주화 열풍이 불었다. 19912월엔 이라크에서 걸프전이 발발했다. 유럽에 온 한국인 특파원들이 유사 이래 가장 바쁜 날을 보낼 때였다.

1992년 이후엔 오스트리아 빈에서 북한 핵문제를 다루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가 수시로 열려 국제 이슈가 됐으며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위한 협상이 줄곧 진행되었다. 이런 세계사의 큰 변혁 흐름의 현장에 정종식 선배는 트렌치 코트 차림에 가방 하나 들고 무시로 달려갔다.

이 무렵 파리특파원으로 활동한 한국 언론인들의 면면을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새삼 떠올려본다. 특파원 가운데 최연장자 좌장은 시사저널 진철수 선배였다. 그 다음은 정종식 선배와 주섭일 선배(세계일보, 중앙일보). 다른 분들을 언론사별로 열거해보면 동아일보(김기만, 방형남), 중앙일보(배명복, 고대훈), 조선일보(임동명, 김광일), 한국일보(김영환, 한기봉), 서울신문(김진천, 박강문), 매일경제(박감묵), 광주일보(박향구), 연합통신(유영준, 신기섭), KBS(한중광, 이홍기, 지종학, 박원훈, 이병순, 이상만), MBC(이상욱, 김종오, 송재종, 이상노), SBS(김형민) 등이다. 현지사정과 불어에 정통해 여러 특파원들에게 취재 도움을 많이 준 인사로는 박재선 당시 참사관(훗날 모로코대사 등 역임), 한영란 한어소시에이츠 대표를 꼽을 수 있겠다.

 

재독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선생을 취재하려 여러 특파원들이 경쟁할 때가 있었다. 19947, 한국에서 열리는 윤이상 음악축제에 주인공인 그가 귀국할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때였다. 정종식 선배는 그때 발군의 취재 솜씨를 후배들에게 보인 모양이다. 당시 경향신문의 손동우 독일 본 특파원의 전언에 따르면 윤이상 선생 자택에 여러 특파원들이 몰려들어 취재하고 있는데 파리에서 날아온 정 선배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크게 반전되었다고 한다. 당초 윤 선생은 한국 언론인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곤 했었는데 정 선배가 들고온 통영 멸치한 봉지가 판세를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통영 출신인 윤이상 선생에겐 통영 현지에서 온 마른 멸치에서 풍기는 꼬릿꼬릿한 냄새가 바로 고향의 원초적인 갯내음이었던 것이었다. 윤 선생은 눈시울을 붉히며 마음을 활짝 열었다고 한다.

필자도 언젠가 독일에 가서 그곳 공영 TV 채널을 틀었다가 윤이상 특집을 방영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윤 선생은 독일에서 음악 대가(大家)로 존경 받고 있었다. 독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윤이상 선생이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그들은 한결같이 윤이상 작곡가의 작품은 현대음악이어서 음조가 생소해 난해하다면서 어느 바이올리니스트가 윤 선생 작품 공연을 연습하다가 도저히 소화를 못해 잠적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대타(代打)로 급히 구한 연주자가 한국인 강동석 님이었다고.

그런 독일 기자들에게 필자가 윤 선생이 작곡한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줄 안다!”고 호기를 부렸다. 그들의 박수 소리 속에 필자는 마산고등학교 교가를 독일 베를린 하늘 아래에서 독창으로 우렁차게 불렀다.

 

정종식 선배가 다시 파리로 부임한 직후에 한국에서 터진 무기밀매 사건에 프랑스인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한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 프랑스인이 파리에 산다기에 그의 집 앞에 파리특파원들이 몰려들었다. 문이 잠겨 있었고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밤늦게까지 뻗치기를 했다. 현장에 나타난 정 선배. 대충 훑어보고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후배 기자들과 함께 계속 남아 계시는 게 아닌가. 외유내강(外柔內剛) 성품을 새삼 확인했다.

필자는 정 선배 덕분에 프랑스의 최상류 인사들이 들락거리는 사교 살롱에도 가보는 호사를 누렸다. 국립 바스티유극장 정명훈 음악총감독은 당시 프랑스 음악계에서도 명사였다. 정 감독이 어느 살롱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갖는데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정 선배에게만 초청장이 온 모양인데 주최 측에 필자의 자리까지 부탁하셨다. 정 감독이 살아있는 작곡계의 전설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에게 정명훈 연주를 헌정하는 자리였다. 노구(老軀)의 메시앙이 나타나 정 감독을 친자식처럼 따스하게 포옹해주는 모습을 보고 내 가슴이 뭉클했다. 나도 거장(巨匠) 메시앙 선생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의 원고를 받으라는 회사 데스크의 지시가 떨어졌다. ‘나의 삶, 나의 음악이라는 주제였다. 필자가 백 선생에게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그는 번번이 정중히 사양했다. 회사에 사정을 전했으나 막무가내로 무조건 받아내란다. 인터뷰해서 대필(代筆)하면 되지 않느냐고 데스크는 우겼다. 이런 상황을 정 선배에게 털어놓았더니 친히 백건우 선생을 만나 다시 원고 집필을 요청하셨다. 정 선배를 존경하는 백 선생은 차마 그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장문의 원고를 보내왔다. 청소년 시절에 한국을 떠나 한국어 글쓰기가 서투를 텐데도 백 선생은 최선을 다해 정성껏 육필 원고를 작성한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 구도자 같은 연주활동을 하는 그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매우 아쉽게도 이 원고는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아마 세속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부인인 영화배우 윤정희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데스크는 기대했던 듯하다.

 

결단력·통찰력 겸비한 드골정치지도자 이상형

 

-오랜 언론인 생활을 통해 국내외 국가지도자 여럿을 직간접적으로 만났을 텐데 이상형은 누구일지요?

전후 프랑스를 이끈 샤를 드골(1890~1970) 대통령입니다. 그는 원래 깨어있고 선진적인 군인이었지요. 그는 군사기술 면에서 출중했으며 2차대전 후에 미국, 영국, 러시아에 맞서 당당한 프랑스외교정책을 펼친 거물이지요. 2차대전 때까지 불구대천으로 지내던 독일과 손을 맞잡는 일까지 했습니다. 동서냉전을 완화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고 유럽통합의 초석을 깔기도 했습니다.

드골이 사관학교를 13등으로 졸업하고 아라스의 33연대에 배속되었을 때의 연대장은 앙리 필리프 페탱 대령이었습니다. 페탱은 1차 대전의 영웅이요, 훗날 원수 계급에 오르고 2차 대전중 비시정권에서는 정부수반인 인물입니다. 페탱과 드골의 이상한 만남은 줄곧 평생을 두고 계속됩니다. 2차 대전 중 드골은 런던 망명정부에서 페탱에 대해 맞서지요.

영국의 벽보들은 드골의 대() 프랑스 방송 이후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지만 전쟁에는 지지 않았다라고 대서특필했고 영국정부는 드골 장군에게 자유 프랑스인의 우두머리라고 승인했습니다.”

 

-드골 전문가이시네요. 드골의 레지스탕스 활동과 전후 프랑스 통치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194465일 새벽부터 연합군의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613일 드골 장군은 쿠레 등 몇몇 막료만을 대동하고 노르망디 캉 시 북쪽의 바닷가에 상륙했습니다. 그는 그곳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요. 목소리만 들어오던 드골 장군을 실제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드골은 미국을 방문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프랑스에 대한 지원을 촉구했고 프랑스를 독일로부터 되찾자 파리 시청 광장 앞에 섰답니다. 군중 속의 어느 레지스탕스 대원이 이렇게 모인 사람들 앞에서 엄숙하게 공화국을 선언해 달라고 요청하자 드골은 공화국을 그만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비시 정부는 언제나 가치 없는 존재이며 존재하지 않았다고 쏘아붙였지요. 그는 내 자신이 공화국 정부의 수반이다. 내가 왜 공화국을 선언해야 하는가?’하고 반문했습니다. 대단한 자존심의 소유자이지요?.

전범 처리 과정에서도 추상 같았습니다. 나치 부역자들을 과감히 처단하는 등 프랑스 민족정기를 보였지요. 국무총리 자리에 오른 드골은 정쟁에 휘말리자 총리 자리를 내놓고 고향마을 콜롱베로 돌아가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194747자유 프랑스의 구호 아래 불어닥친 위기와 긴장의 시대를 맞아 드골은 정계 복귀를 결심합니다. 1950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새로운 세계대전에 대한 그의 위기감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드골의 전반적인 집권 행태는 어땠는지요? 특파원으로 계시던 1970년에 드골이 서거했는데 당시 프랑스 추도 물결은 어떠 했습니까?

그의 뚝심과 통찰력으로 위대한 프랑스를 만들었지요. 그러나 ‘68 학생 혁명등 자신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간파했습니다. 결국 1969년 국민투표로 국민의사를 확인한 후 미련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콜롱베로 돌아갔지요. 여기서 집필, 여행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 1970119일 월요일 저녁 오후 725분에 별세했습니다.

저는 드골의 서거소식을 1110일 아침 뉴스시간에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즉시 한국의 신문사에 알리고 드골의 자초지종에 관해 취재를 하고 송고했습니다. 아무래도 현장을 보아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11일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콜롱베로 향했습니다. 콜롱베까지 2시간 30분쯤 걸렸는데 마을에 들어서니 벌써 인산인해였습니다.

사람들 틈을 젖히고 성당이 있는 나지막한 산에 올라서니 거기도 사람들로써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겨우 산꼭대기로 향해 사람들을 헤집고 올라갔는데 그곳이 바로 드골 관이 놓일 자리였지요. 그 주위에서 또 사람을 밀쳐서 올라가 보았는데 좀 사람이 뜸했다. 거기가 드골의 유해가 묻힐 곳이라고 옆사람이 가르쳐 주더군요.

그 장소는 깨끗이 구멍이 파져 있는데 그 구멍에 기대어 커다란, 붉은 꽃 뭉치가 여럿 놓여 있었습니다. 그 조화에는 검은 리본이 부는 바람에 흐느적거렸고 그 글씨는 한문이라 곧 눈에 띄었습니다. 거기에는 毛澤東(모택동)’周恩來(주은래)’라는 두 글자가 유난히 크게 보였습니다.”

 

-근황은 어떻습니까?

독서, 음악 감상으로 주로 시간을 보냅니다. 요즘 즐겨 읽는 책은 <논어> <시경>을 비롯한 동양고전과 프랑스 혁명사 서적들입니다. <논어>는 여러 번 독파했는데 읽을수록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어 좋습니다. 고승철 씨가 쓴 장편소설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음악은 언제 들어도 귀에 익숙하면서도 참신한 베토벤, 리스트, 슈베르트 곡을 선호합니다.”

 

정종식 선배의 서재에 들어가니 사방 서가에 동서양 고전이 빽빽이 꽂혀 있다. 그는 불어, 영어, 일본어 원전을 번역본 없이도 해독할 수 있는 지식인 언론인이다. 서가 하단부는는 넓적한 LP 음반들이 차지하고 있다. 수십 년간 애장품이어서 음반 재킷 모서리가 너덜너덜하다. 정 선배의 음악에 대한 DNA는 클라리넷 연주가인 2녀 정은원 님(서울시향)에게 유전된 듯하다. 장녀 정혜원 님, 3녀 정희원 님은 미술과 사진에 재능을 보여 아버지 저서에 실을 프랑스 풍경 사진을 찍어 헌정했다. 정 선배는 언제 가족과 함께 파리에 한번 더 가보고 싶단다. 음식 솜씨 좋은 부인 고영자 여사도 음악 애호가이다.

 

연락처

- 정종식 전 연합통신 사장 전화 02-395-7628

- 고승철 나남출판 사장 songcheer@naver.com

 

정종식 전 연합통신 사장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경향신문 정치부장

-한국일보 외신부장

-중앙일보 정치부장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일간스포츠 편집국장

-한국일보 프랑스특파원

-국토통일원 정책기획실장

-남북총리회담 실무회담 대표

-문화공보부 자문위원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연합통신 사장

-국제신문협회(IPI) 국내위원장

-대한준설공사 사장

-한국공항주식회사 사장

-경향신문 구주본부장

-한진그룹 고문

-한국독립신문상 수상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저서

-North Korean Communism

-Major Powers and Peace in Korea (공저)

-파리특파원의 소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