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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저널

[특집Ⅱ] 무너진 객관보도, 실종된 진실탐구

필자 : 강병태 한국일보 논설위원

발행 : 2001년 겨울호(통권 81호)

 

특집 II / 테러·전쟁보도


무너진 객관보도, 실종된 진실탐구

-미국 테러참사 관련 한국 신문보도의 문제점-


姜秉泰(한국일보 논설위원)


우리 언론은 경제발전과 냉전종식, 민주화 등 언론환경 개선에 힘입어 외형은 독자적 국제보도 역량을 갖췄으나 국제질서와 국익에 영향이 큰 중대사태일수록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객관적이고 다원적 관점에서 사태를 분석하기를 포기한 채 흔히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미국과 서구의 논리를 추종하는 것이다.

우리 언론은 미국 테러참사의 충격을 실감나게 전달하는 데 매달린 나머지 감정이입 행태까지 보였다. 사회가 미국 지향적인데다 언론이 선정성에 길든 마당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미국 사회의 격정에 휩쓸리는 정서와 안목으로는 냉철한 객관보도와 진실탐구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에 따른 폐해는 언론이 본연의 진실보도 임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원론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국제보도는 국민이 복잡한 국제사태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 국익과 어울리는 여론을 형성하여 국가전략 선택을 균형있게 이끄는 길잡이 노릇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사태를 독자적 안목과 국익의 틀에서 분별할 기회를 스스로 봉쇄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가 깊은 천착없이 정치·경제적 영향만 걱정하는 무지하고 수동적 처지에 갇히는 데 이바지했다.

이런 전제에서 이 글은 언론의 미국편향 또는 언론의식의 미국화가 객관보도와 진실탐구를 지레 포기하도록 작용한 구체적 실태를 살피는 데 초 점을 맞췄다. 언론환경과 관행 등의 근본문제를 논하기에는 취재보도의 기본과 상식조차 외면하는 잘못을 깨닫는 것이 훨씬 급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태 인식


미국 언론은 테러범들이 미국의 심장부를 노린 사실을 들어 미국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했다. 또 세계무역센터를 표적삼은 점에 비춰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에 대한 도전으로 풀이했다. 여기에는 테러가 외부 소행이란 예단과 고상한 가치가 공격받았다는 일방적 인식이 담겨 있다. 부시 대통령이 문명에 대한 야만의 공격으로 규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테러가 상징적 가치를 겨냥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번 테러는 집단이나 사회에 충격과 공포감`(terror)을 주려는 고유한 의미의 테러의 전형이다. 이런 테러는 집단이나 사회의 의식과 행동, 국가정책에 대한 적대감을 극적으로 표출하고 변화를 강요하려는 확고한 목적을 지닌다. 따라서 미국적 이념과 세계화 등의 추상적 가치를 노렸다는 성격규정은 공허하다.

정치적 동기에 따른 테러를 문명가치를 부정하는 야만집단, 이성적 논리가 결여된 광신집단의 소행으로 격하한 것은 정확한 사태인식을 방해했다. 미국의 편파적 중동정책이 원인으로 논란되거나 테러가 정당한 투쟁수단으로 인식되는 것을 방해하려는 선전에 현혹된 측면이 두드러진다. 우리 언론은 일부 미국의 중동정책 등 대외 개입의 문제를 지적했으나 구색 갖추기에 그쳤다. 미국 언론이 자기반성과 신중한 대응을 거론하면서 조금 달라졌지만, 미국 언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럽 언론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집중조명한 것과 비교된다. 사태 첫날 영국 가디언의 논평 6개는 모두 사태의 근본원인을 천착한 내용이었다.



테러배후 예단


우리 언론은 테러발생 직후 지체없이 오사마 빈 라덴을 배후 주범으로 예단한 미국 언론을 그대로 따랐다. 근거는 이런 엄청난 테러를 저지를 의지와 능력을 지닌 인물은 오직 빈 라덴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언론의 정상적인 기준에 비춰 얼마나 무모한지는 자명하다.

어떤 실마리도 드러나지 않은 사태 첫날 국내 신문이 그를 주범으로 손꼽은 근거는 우선 96년 세계무역센터 테러와 98년 케냐 미 대사관 테러, 지난해 미 구축함 자살폭탄공격의 배후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객관적으로 입증된 증거는 없다. 다음 근거는 그가 막대한 자금력과 함께 중동과 미국 등 60개국에 조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사우디 갑부 가문 출신이지만 미국이 공적 1호로 지목해 전세계에 현상수배한 상태에서 어떻게 자금을 조달하는지, 무슨 수로 미국에 테러조직을 유지하는지 의문이다.

후속보도에서도 아프가니스탄 오지에서 미국을 상대로 정교한 테러를 지휘하는 등의 범행 능력에 대한 의문제기는 없었다. 몇해 전 독일 슈피겔이 빈 라덴 신화를 부정하는 추적기사를 다룬 사실 등도 언급하지 않았다. 단순 살인사건 용의자의 범행 능력을 검증하는 정도의 기본도 무시한 것이다. 오히려 그가 e메일과 위성전화로 테러를 원격지휘한 것은 세계화와 정보화가 초 능력을 부여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소개했다. 그토록 치밀한 테러 지휘에 보안성 없는 e메일과 위성전화를 이용한다는 것은 상식에 반한다.

센세이션을 좇는 우리 언론은 상투적인 역정보`(disinformation)마저 주저없이 인용했다. 빈 라덴이 우라늄을 갖고 있고, 북한인이 화학무기훈련을 시켰다는 주장들이다. 테러 직전 항공사 주식 선물거래로 거액을 챙겼다는 최신형 역정보도 등장했다. 이런 역정보는 결국 낭설로 드러났지만 노린 효과는 이미 거둔 다음이다.



테러범 실체


사태 초기 보도가 재난 수준의 피해상황과 보복공격 예상에 집중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새로울 것 없는 최신 살상무기를 앞다퉈 소개하는 몰지각함도 전쟁놀이에 흥분하는 유치한 언론관행 탓이라 치자. 그러나 수사상황 검증마저 소홀히 한 것은 객관보도와 진실탐구에 치명적인 과오다. 원칙적으로 수사 결과는 테러의 성격과 배후를 확정하고, 보복공격을 비롯한 후속 사태 진전을 좌우한다. 이처럼 중요한 수사 자체에 의문점이 많은데도 검증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언론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미국 언론과 수사당국은 사태 이틀째 중동 출신 승객의 자동차에서 비행교본이 발견된 사실을 곧장 빈 라덴과 연결시켰다. 이어 불과 사흘만에 용의자 수 명의 신원을 공개했다. 그뒤의 수사 결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자료는 이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다. 이런 결론은 먼저 테러범도 여객기와 함께 소멸한 상태에서 무슨 수단으로 용의자를 범인으로 확정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 용의자 가운데 여러 명이 버젓이 살아 있거나 오래 전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사실은 수사의 신뢰성을 한층 떨어뜨린다.

우리 언론은 “범인들이 죽은 사람 이름으로 여객기를 예약한 교활함에 미국 언론이 속았으며, FBI도 혀를 내둘렀다”고 해설했다. 도무지 혼란스런 논리다. 주요 용의자의 범행 결의서가 증거로 제시됐으나 5년 전 작성됐다는 사실에 주목한 언론도 없다. 이들과 빈 라덴이 위성전화로 공격을 논의하고 성공을 보고한 사실이 통신감청으로 드러났다는 보도는 허무맹랑하다.

미국의 아프간 공격이 시작되고 탄저균 우편물 위협이 이어지면서 우리 언론은 테러범의 실체에 관한 의문을 완전히 잊었다. 이는 국제 언론이 새롭게 의혹을 제기하며 사태의 근본을 천착하려는 변화와 동떨어진 것이었다.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대표적 친미 아랍 지도자인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조차 용의자들이 받은 비행훈련 정도로는 대형 여객기를 무역센터 빌딩에 정확히 충돌시킬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 정보당국이 테러 대비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허술했고, 테러공격에 첨단 방공체제가 대응하지 못한 사실은 자연스레 음모론을 낳았다. 우리 언론이 이런 음모론을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은 엄청난 재난을 목격한 마당에 부적절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음모론적 시각으로 보지 않더라도 용의자 가운데 미 공군 공중전 학교 훈련을 받은 인물이 있다는 등의 보도를 아무런 논평없이 옮기는 무감각은 심각하다.



테러리즘과 석유


앞서 살핀 문제점들은 결국 미국이 이번 사태를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에 무리하게 연결시킨 진정한 의도를 천착하는 과제를 외면하게 했다. 영원한 전쟁 동반자 미국과 영국은 반인류적 테러리즘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보복 공격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걸프전을 비롯한 미국과 서구의 중동개입은 석유를 둘러싼 정치·경제적 이익다툼이 근원이다. 걸프지역 다음으로 중요한 석유자원 공급원으로 떠오른 카스피해 연안과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 아프가니스탄의 전쟁도 바탕은 같다. 미국이 장기전을 예고한 것은 아프간에 대한 지속적 개입을 통해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읽게 한다.

우방 미국이 건국 이래 최악의 테러공격에 대한 보복전쟁에 나선 마당에 다른 이기적 목적을 의심한다는 것은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식으로 냉혹한 국익게임을 다루는 국제보도를 수행한다고 자처하는 것은 어리석은 허영이다. 미국은 중앙아시아 지역 개입과 경략을 착실히 준비해왔다. 소련이 후퇴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1997년 이래 미 본토 공수사단이 참여하는 연 합동훈련을 실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번 테러사태에 앞서 아프간과 중앙아시아의 석유 가스 자원과 지정학적 패권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미국과 주변 열강의 ‘Great Game’을 탐구한 연구서는 숱하다. 여기에 관심조차 갖지 않은 채 오로지 빈 라덴의 악마적 면모와 미국의 전쟁합리화 논리를 대비시키는 데 몰두한 것은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를 연상케 한다. 미국 정부의 공식논리만을 좇는 안목으로 국제사태를 논하는 언론과 학자들이 인터넷 여론마당에 잡다한 음모론을 전파하는 일반인보다 식견이 앞서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을 포함한 서구 언론과 석학들이 지정학적 이해와 석유 이권을 미국의 숨겨진 전쟁목적으로 지적한 것을 소홀히 다루는 자세는 향후 개선마저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전쟁보도


미국의 아프간 공습으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 보도는 과거 어떤 국제분쟁 때보다 전쟁 수행자의 선전전`(Propaganda War)에 무비판적으로 현혹됐다고 본다. 공습 초기 탈레반 내부의 분열과 쿠데타 설 등이 난무한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 언론은 경쟁적으로 아프간 접경지역에 특파원을 보냈지만, 이들은 대체로 미국의 공식 선전과 비슷한 내용의 신뢰성 낮은 현지 언론보도와 소문을 전파하는 매개역할에 충실했다.

모든 전쟁의 주변에 떠도는 거짓선전의 진정성을 검증할 생각조차 않고, 현지의 객관적 연구자들의 견해를 찾는 노력도 않는 특파원은 전쟁의 의미와 진상을 그릇 인식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미국의 전쟁수행에 실책과 난관이 많다는 사후평가도 애당초 거짓선전에 언론이 놀아난 과오를 은폐하는 변명이다. 독일의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특파원이 “듣는 것은 많고, 보는 것은 적고, 아는 것은 없다”고 고백한 것은 여러 모로 교훈적이다.



탄저균 위협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을 믿는 것은 미신이고, 이를 조장하는 것은 혹세무민이다. 이 사전적 풀이는 미국의 탄저균 우편물 위협을 보도한 우리 언론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해당된다. 미국 언론이 탄저균 위협을 빈 라덴 조직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북한과 이라크, 러시아 등을 탄저균 공급국으로 몰아간 것은 이해할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이 미국에서 발견된 탄저균의 위험성이 과장됐고, 특히 탄저균 테러위협이 미국 사회의 고질적 병리 현상이란 사실을 언급조차 않은 것은 언론의 선정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미국 정부가 익숙한 탄저균 테러위협에 우왕좌왕하면서 빈 라덴 조직의 생화학무기 테러에 대한 불안감을 높인 배경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빈 라덴의 위협에 대한 경계의식이 지속적으로 고조된 것이 테러와의 전쟁과 아프간 공격에 대한 회의와 논란을 억누른 것은 분명하다. 우리 언론은 미국의 전쟁 동반자 영국에서 먼저 탄저균 위협의 진상, 특히 미국 내 불순세력의 소행이 유력시된다는 보도가 나오는데도 이를 소홀히 다뤘다. 오히려 생화학무기와 핵무기 테러에 관한 허황된 경고를 확대보도하는 데 매달렸다.

탄저균 테러에 관한 숱한 보도는 대부분 미신으로 드러나고 있다. 50년 지속될 수 있다는 테러와의 전쟁과 몇년을 끌지 모를 아프간 공격에 관한 새로운 보도들이 한낱 미신을 전파해 혹세무민한 언론의 과오를 덮을 것이다. 우리 사회까지 백색가루 소동을 낳은 미신을 조장한 우리 언론의 잘못도 진지하게 반성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지정학적 이해관계든 석유 이권이든 미국의 전략적 선택을 따르고 옹호하는 것이 곧 우리의 국익과 일치한다고 믿는 언론인과 학자가 다수인 현실을 마냥 탓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이 새로이 형성하려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반도 긴장완화 후퇴를 걱정하는 이율배반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는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냉전종식 후 국제평화 질서를 역전시킨 걸프전 당시 미국 언론의 추기경으로 불리는 앵커 테드 코펠은 정부의 정보 통제와 조작에 언론이 오도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 오도된 언론이 이기적인 전쟁을 고상한 명분으로 포장하고 참혹한 공습을 컴퓨터 게임처럼 보도한 것을 두고 유럽의 어느 논평가는 언론과 언론인이 미디어 전쟁의 인간무기로 전락했다고 탄식했다. 그 교훈을 이제라도 되살려야 한다는 당부를 이 글의 결론으로 삼는다.


강병태

-영국 웨일스대 언론학 석사

-대구방송 보도국 부국장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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