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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저널

[특집Ⅱ] 미국의 전쟁보도 통제와 국익

필자 : 김광원 문화일보 편집국 부국장

발행 : 2001년 겨울호(통권 81호)


특집 II / 테러·전쟁보도


미국의 전쟁보도 통제와 국익


金光源(문화일보 편집국 부국장)



쿠바사태와 미국언론


1961년 4월 미국당국에 의해 과테말라와 플로리다에서 훈련받은 쿠바 망명군이 쿠바의 피그만(灣)에 상륙,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정권을 세운 지 2년만이었다. 이 침공작전은 곧 비참한 실패로 끝났고 피그만 사건은 미국에 큰 재난이 됐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의미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군사정책의 실패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사건 중 하나였다. 바로 언론과 국가이익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침공사건의 시기 등 매우 중요한 정보를 국가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보도하지 은 뉴욕타임스의 보도자제에 관한 문제는 두고두고 토론의 대상이 돼왔다.

사건발생시 뉴욕타임스 편집국 부국장이었던 클립턴 다니엘은 후에 당시의 상황을 매우 자세하게 전하면서 “피그만 사태는 미국의 대외정책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 언론과 정부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못지 게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뉴욕타임스에서 피그만 사건 보도를 둘러싸고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와 편집국 간부 및 발행인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일련의 논의과정은 과연 언론의 역할과 국익의 문제가 어떻게 처리됐는지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결국 이 문제와 관련, 1966년 6월 1일 세계언론회의에 뉴욕타임스 편집국장으로 참석한 다니엘은 미국의 쿠바침공계획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 후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만약 뉴욕타임스가 이 작전에 관한 사항들을 좀더 많이 보도했더라면 미국의 결정적 실수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던 것으로 다니엘은 적고 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언론이 미국의 국가이익보다 국가적 명예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일들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 충족에 보다 충실했다면 미국의 피그만 침공작전은 취소될 수도 있었다는 지적인 셈이다.

다니엘의 결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언론의 역할을 거론할 때마다 고전(古典) 중의 하나가 되고 있는 피그만 사건과 뉴욕타임스의 보도자제 사건은 그 사건 자체로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초점은 국가이익이 걸린 사안에 대한 정부와 언론 간의 관계설정이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서 1961년 피그만 사건에 이은 1962년 쿠바미사일 위기의 해결방법은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었다.

62년 10월 미국정부는 공중정찰을 통해 구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한 사실을 알게 됐고 미국정부 내에는 심각한 위기감이 조성됐다. 당시 미국언론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지방에 있던 케네디 대통령은 급거 워싱턴으로 귀환했고 보좌관들은 그 이유가 감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 움직임과 낌새가 심상치 않자 언론은 취재의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정부는 쿠바에 대해 경계조치를 취한 것도 아니고 긴급 군사조치를 발동한 것도 아니라고 발표했다. 이같은 발표에도 불구하고 미정부 수뇌들은 쿠바위기에 대한 대책마련에 분주했다. 그리고 미 국무부는 며칠 후 내외신 기자들에게 ‘쿠바해상봉쇄’ 조치를 밝혔다. 미 국방부는 공중사진을 제시, 쿠바의 미사일 존재와 미사일기지 건설현장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서 미 당국자는 이 문제가 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최종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거짓발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문제는 언론의 반응이었다. 이 당시 언론은 오히려 핵전쟁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 정부는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다니엘은 그 배경과 관련, 여러 주요인사들의 언급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주요한 대목이 케네디 대통령의 피그만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피그만 사건에서의 실패가 결국 1962년 미사일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계기가 됐으며, 언론과의 사전대화가 그 요체로 지적됐다. 다니엘은 이때 다시 한번 뉴욕타임스가 여기에 개입됐다고 적고 있다. 케네디는 피그만 사건 때와는 달리 미사일 위기 당시는 직접 뉴욕타임스 발행인인 오빌 드리푸스에게 전화를 해 백악관으로 청했고 안보사항에 대한 보안문제를 토의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드리푸스는 언론에 대한 사전 정보와 사전 협의를 제의했다. 안보사항의 보도문제가 발생하면 발행인들을 불러 그들에게 설명하는 게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케네디는 그같은 방안을 실행, 쿠바미사일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정부와 언론의 우호적 갈등


언론의 국익보도에 관한 문제는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특히 국가간 전쟁이나 분쟁에 있어 당사국의 보도통제와 언론의 보도한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9월 11일 미국의 세계무역센터(WTC)에 대한 전대미문의 테러와 이에 따른 미국의 대테러전이 아프가니스탄으로 확산되면서 전쟁보도에 관한 언론통제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앞서 피그만 사건에 대한 미정부와 언론의 관계를 예로 들었지만 실제로 미국정부의 언론에 대한 쓰라린 경험 중 하나가 피그만 사건이기도 했다. 미국언론이 정부의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한 피그만 침공과 같은 비밀 침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자아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의 특별한 시각 및 경험과 상관없이 당시 미국언론은 피그만 상륙작전 몇달 전부터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와 과테말라에서 훈련받는 쿠바피난민 훈련소의 활동상황 등을 낱낱이 보도했다. 미국신문과 방송들은 또 쿠바상륙과 대중봉기, 그리고 카스트로 축출 후 세울 임시정부 수립절차까지 갖가지 사항들을 전했다. 이러한 보도들은 쿠바당국과 구소련의 미국에 대한 공격자료와 군사정보로 활용되게 마련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정부로서도 비밀유지와 정보관리 등 국가의 안보기밀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을 수 없었다. 그 결과가 피그만 사건에 이은 미사일 위기에서 적용된 셈이다. 미군당국은 비밀유지를 위해 거짓발표를 하는 등 오히려 언론을 이용하기조차 했고, 때로는 언론의 협조를 요청하는가 하면 거짓발표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언론보도와 국가이익 간의 관계는 시각에 따라 여러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쿠바의 피그만 사건과 미사일 위기를 둘러싸고 미국 정부와 언론의 관계 역시 매우 복잡한 현상과 진행과정을 겪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군과 전쟁을 보도하는 기자의 관계는 양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군기자의 역할은 사실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는 군이 기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매우 힘들다. 근본적으로 군은 적군에게 정보가 될 만한 내용을 언론이 보도하는 것을 원치 는다. 더욱이 아군의 사기가 꺾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수행 중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실수 등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게 마련이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대전 중 언론간부들 앞에서 “여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기자들을 자신의 작전수행을 위한 준참모로 여겼으며 기자들도 그같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전쟁보도는 기본적으로 군당국과 기자들 사이의 긴장관계를 수반하게 마련이지만 과거로 갈수록 그 관계는 우호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차대전 중 연합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언행에서도 이같은 우호관계는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1944년 5월 ‘전쟁특파원들을 위한 규정’을 만들고 “특파원들이 자국의 장병들이 적과 전쟁을 치르는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고 전해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장교 및 병사들과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고 작전에 투입된 군사장비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2차대전 당시 기자들은 아이젠하워 장군의 말처럼 준군인이나 다름없었고 기자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군대가 가는 곳이면 군의 규율과 규칙을 준수하는 조건으로 동행했다.

이같은 언론관은 한국전과 베트남전까지 일종의 관례로 지켜져 왔다. 한국전 발발 후 얼마 동안은 아예 검열시스템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기자들은 미군의 절박한 상황과 북한군에 패배한 전쟁 등에 대해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검열이 본격화된 것은 장기간에 걸쳐 휴전회담이 진행될 때로, 회담 당사자들과의 접견 등이 금지되고 정보접근은 유엔 지휘부의 브리핑에 한정됐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군과 기자들의 관계는 갈등보다는 동지적 관계로 귀착되는 시기였다.



베트남전이 남긴 후유증


전쟁과 언론자유를 거론할 때마다 약방의 감 처럼 나오는 전쟁이 베트남전이다. 베트남전이야말로 여론의 전쟁이자 보도통제에서 벗어난 전쟁으로 여겨져 왔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일부 지도층과 군에서는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는 언론 탓’이라는 평가를 여전히 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베트남전이 완전히 언론자유를 보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 정부는 정부 차원의 여론관리와 보도통제를 나름대로 실시했기 때문이다.

존슨 행정부는 이미 60년대 후반 대통령 직속으로 베트남 정보그룹을 만들었고, 전쟁을 홍보하기 위한 강력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보도관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 종군기자들은 대체로 검열로부터 자유로웠다.

더욱이 베트남전은 이전의 전쟁과 달리 전쟁현장을 TV화면을 통해 안방에서 생생히 볼 수 있도록 했고 그것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전달됐다. 이같은 전쟁보도 양상은 그전의 2차대전이나 한국전과는 전혀 다른 충격적인 것이었다.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도성의 상징으로 베트남전은 미국 대중의 뇌리에 파고든 셈이다. 더구나 전쟁이 계속될수록 미국인들은 전쟁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됐고 결국 엄청난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마련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베트남전 취재보도에서 자유쪽으로 넘어갔던 추는 베트남전 종전 이후 통제쪽으로 되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여기에는 베트남전에서 미국 수뇌부가 배운 교훈, 80년대 들어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정권이 들어선 점 등이 매우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83년 카리브해의 소국 그라나다 침공에서 직접 나타났다. 이 전투에서 기자들은 전적으로 배제됐다. 미국언론들은 미군이 공산쿠데타 정권을 무 뜨리기 위해 그라나다에 상륙한 이후에야 그 사실을 통보받았을 정도다.

이 일을 계기로 미 국방부와 언론 사이에는 일련의 협의가 이루어졌고 소위 공동(풀)취재단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 취재단은 특파원과 사진기자 및 기술진을 순번제로 해서 군사작전이 있을 때 현장에 투입돼 공동취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후 이 공동취재단이 전쟁에 투입된 것은 89년 파나마 침공 당시. 그러나 이 취재단은 동행은 했지만 현장접근은 원천적으로 봉쇄당했다.

과연 베트남전은 어떤 특징을 지녔기에 전쟁보도의 통제와 언론의 태도에서 많은 변화를 초래하게 된 변곡점 역할을 하게 됐는가. 여기에는 물론 당시 미국사회의 경향과 기술발전 등 여러 고려요인이 내포돼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베트남전의 언론자유 향유가 2차대전류의 준군인 성격에서 쿠바위기 등을 거치며 발전해온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은 2차대전이나 쿠바위기처럼 미국인들에게 절체절명의 전쟁은 아니었다. 이는 전쟁수행을 위한 국민설득에서 큰 편차를 보이게 마련이다. 이 점에서 베트남전과 2차대전 그리고 쿠바위기는 각기 다른 차원의 대국민 설득효과를 보였으며, 특히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인들의 회의가 깊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여기에 새로운 전자장비 도입 등 기술발전에 따른 전쟁의 생생한 현장전달이 베트남전의 향방마저 결정짓는 역할을 한 셈이다.



걸프전과 9·11테러 및 아프간 전쟁


베트남전 이후 미국의 전쟁보도 통제는 크게 강화됐다. 아예 전쟁현장에서 제외하거나 공동취재단 취재를 허용함으로써 군당국의 의지대로 취재에 임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그 결정판이 걸프전이었다. 여기에는 베트남전 신드롬의 후유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라크가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점령한 것은 지난 90년 8월 2일이었다. 걸프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딕 체니 미 국방장관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것은 8월 5일. 이어 미 해군 함정이 걸프해역에 파견되고 미 공군 전폭기들이 사우디에 도착했지만 기자들은 없었다. 이로부터 며칠 후에야 걸프전 최 의 공동취재단이 사우디에 도착했다. 그리고 미군당국은 이후 이 전쟁에 대한 보도지침을 마련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문서의 작성이야말로 미국정부가 전쟁종결까지 군사작전에 대한 언론보도정책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첫발”이었다고 지적했다.

이 보도지침의 핵심내용은 2가지였다. 하나는 사우디에서 취재하는 기자는 미 중동군사령부의 공동취재단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며 취재시에는 항상 공보담당 장교의 안내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하나는 공동취재한 내용은 군당국의 리뷰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같은 조건들은 그후 91년 1월 시작된 미국 주도하의 다국적군 공격 이후 더욱 힘을 발휘했다.

군당국은 이같은 공동취재 방식과 기사 리뷰제도를 통해 보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기자들은 마치 ‘미 국방부의 무보수 고용원’이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이 전쟁을 취재하던 기자들이 1,500여명이었으나 공동취재단에 속하지 고는 전방에 갈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 취재는 다음 문제고 공동취재단에 끼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것으로 여겼다. 나머지 기자들은 대부분 군당국의 전황 브리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걸프전의 언론통제는 단순히 군부만의 판단은 아니었다. 미정부의 최고위층에서부터 군지휘관에 이르기까지 되도록 언론을 군사작전으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한 결과였다. 더욱이 걸프전을 계기로 명성을 얻게 된 CNN의 전쟁상황에 대한 실시간 방송은 전쟁을 마치 게임처럼 느끼게 하는 데 기여했다.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마치 전쟁영화처럼 보여준 것이다. 화면 어디에도 죽어가는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면에는 온통 크루즈미사일과 레이저 유도탄들이 날아다녔다. 취재기자들은 전쟁은 보지도 못한 채 전쟁기사를 써야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의 주요언론들이 정부에 대해 국민의 알권리에 대한 축소를 불평하면서도 정부의 정책목표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걸프전 발생 10년만에 발생한 전대미문의 9·11테러와 10월 8일 이후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은 걸프전을 상상력의 세계로 옮겨온 듯한 느낌마저 준다. 백악관측은 보복전을 개시하면서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등 제작자들을 불러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할리우드의 상상력을 차용, 예측 부족에서 오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그만큼 이번 전쟁은 걸프전을 업그레이드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미국이 직접 테러공격을 받았고, 그 수법이 무자비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 전쟁은 미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하고 정당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일단 대국민 전쟁설득이 용이하다고 할 것이다.

반면 이번 전쟁은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형식상으로는 초강대국과 테러집단 간의 전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이 개입돼 있는가 하면 이슬람 문명권과 서구문명의 갈등요인도 없지 않다. 더욱이 대테러전이 시사하는 전쟁의 대상이나 종결에 관한 문제는 매우 복잡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당국의 전쟁보도 통제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는 요인을 안고 있다. 부시정부는 이미 전쟁에 있어서의 비밀주의를 밝혔고 언론의 적극적인 협력을 공개적으로 요구했으며, 미국언론과 국민은 아직까지 이에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고통없는 전쟁처럼 보여주는 ‘전쟁게임’의 형식은 걸프전 이후 10년만에 벌어지고 있는 대테러전에서 더욱 강화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이번 전쟁에서는 공동취재단의 취재나 CNN의 피터 아네트 같은 현장보도 기자도 없는 상황이다.

걸프전에서나 이번 전쟁 중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전쟁시 보도통제가 필요하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80%에 달한다.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싸워온 언론에 대해 스스로 알권리를 유보하겠다는 미국민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 미국언론이 처한 또 하나의 고민이 되고 있는 셈이다.



언론의 국익 챙기기와 문제점


지금까지 미국의 전쟁보도 통제를 일별했지만 다른 나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사실 종군 보도통제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사 로 꼽히는 전쟁은 포클랜드 전쟁이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에 벌어진 이 전쟁은 여론의 동향이 매우 중요한 전쟁이기도 했다.

영국은 1만 2,000km 이상 떨어진 포클랜드섬을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출항시켰고 그 자체가 고도의 상징조작이었다. 여기에는 소수의 공동취재단이 동행, 철저한 보도통제하에 기사를 송고했다. 이 전쟁은 실제로 정부에 의해 언론이 철저히 이용된 경우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코소보전쟁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코소보전을 수행한 나토 사령부와 영국 국방부는 매일 기자들을 위해 브리핑을 했다. 미 백악관과 국방부의 언론담당 대변인은 이들과 연락을 취하며 조율했다. 코소보전에는 무려 2,700여명의 기자들이 모여들었고 위성통신 등 최첨단 통신기술 도입으로 전례없이 전반적인 전쟁보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코소보전은 고공폭격을 동원한 공중전이었다. 그래서 희생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는 것. 나토는 전폭기에 기자들의 동승을 거부했고 세르비아 역시 기자들의 코소보 출입을 막았다. 전장에 갈 수 없는 기자들은 브뤼셀에 있는 나토 사령부에서 브리핑을 받거나 코소보 국경에서 취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귀로 듣는 전쟁취재가 코소보 전쟁이었고 나토는 철저하게 보도통제를 이용했다.

이렇듯 전쟁을 치르는 국가의 정부나 당국은 현대에 이를수록 보도통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것이 사실이다. 과거 전쟁들은 뉴스의 수집과 배포 그리고 효과에 있어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물리적 제약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전쟁수행 당사자인 정부나 군관계자들은 언론을 큰 우려의 대상으로 볼 필요가 없었다. 세계 여론이나 대국민 여론에 있어 종군기자의 역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현대전은 이미 여론전쟁으로 변화한 측면이 없지 않다. 전쟁모습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전자통신장비의 발달은 이미 전쟁을 전장에 국한시키지 않고 바로 세계시민의 안방으로 확대시켰다. 전쟁수행 당사자인 정부와 군당국에게 보도통제는 이제 전쟁 그 자체에 못지 않은 중요한 변수가 된 것이다. 언론 역시 전쟁보도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전 패전에서 책임론의 대상이 됐던 미국언론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현대전에서 이미 정부와 언론 간의 관계는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처럼 느껴지기조차 한다. 전쟁보도는 기본적으로 당사국은 물론 관계국의 국가이익이 걸려 있게 마련이다 보니 보도내용이나 방향 역시 일정부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국가이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부와 언론 간에 갈등이 있게 마련이겠지만 큰 틀 안에서의 논란이라고 하겠다.

베트남전을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했던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사회비평가 노암 촘스키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보다 더 큰 범죄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 아프간 공격에 대한 유엔안보이사회의 승인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미국이 수차 나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국제법도 상습적으로 위반했다며 같은 테러행위를 비난할 도덕적 자격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시각에는 미국언론도 마찬가지다. 그에 따르면 국제분쟁을 보도함에 있어 미국언론은 미국의 외교정책 노선에 따른 ‘선전모델’에 철저하다. 촘스키는 그 예로 반공주의 이념을 든다. 촘스키는 미국의 반공주의가 철저히 국가이익 추구에 근거하고, 언론 역시 이를 지원하는 강력한 여과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번에는 미국언론이 반공주의 대신 새로운 ‘반(反)이슬람 테러세력’이라는 선전모델을 따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촘스키의 지적이 옳든 그르든 미국언론의 국익보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보도에 있어 미국언론은 걸프전 때보다 더욱 완벽히 정부의 통제와 협조 속에 정보 여과기능을 충실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11테러 이후 미국언론은 세계언론을 주도했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대한 국제적 공조기반을 조성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해왔다. 내부적으로는 국론을 통일하고 주요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에 대한 신뢰 등 직접 테러와 관련된 국가기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이 앞장서서 CIA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묻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보도통제를 따르고 있다.

미국은 이번 전쟁 역시 걸프전과 같은 승리를 상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프간 공격 한 달을 넘기면서 미국은 거의 탈레반을 붕괴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라크에 대한 공격까지 거론하는 상황이다. 또 아프간 재건을 위한 다자간 회의 등이 이어지고 있어 탈레반 이후 아프간 운명이 논의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을 통해 나타난 언론보도의 문제점은 더욱 커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김광원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

-동아일보 문화부·국제부 차장, 국제부장, 논설위원

-문화일보 편집부국장 겸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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