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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언론학 교수
발행 :
2000년 겨울호(통권 77호)
첨부파일

 

언론사 자료 발굴


해방공간의 좌익언론인들

-조선인민일보, 해방일보, 건국, 노력인민의 출현과 쇠퇴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교수. 언론학)



좌익언론의 개관


8·15로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8월 15일까지 만 3년의 미군정 기간에 발행된 대표적인 좌익신문으로는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해방일보, 건국, 노력인민 등이 있었다. 이들 좌익신문은 광복 직후 한때 언론계의 기선을 장악하면서 이데올로기 선전과 좌익의 영향력 확대에 큰 무기가 되었다. 일제시대에 발행되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아직 복간되기 전 창간되어 언론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처음 개최된 기자대회의 주도권을 잡기도 했다.1)

조선인민보는 1945년 9월 8일 창간되었다. 광복 직후 인쇄시설도 부족했고 용지난이 극심했던 상황에 자격을 갖춘 언론인마저 부족했던 때 제대로 인쇄된 신문으로는 맨 먼저 창간되었고, 난립했던 여러 신문들 가운데서도 출중한 모습으로 주목을 끌었다. 이 신문은 처음에는 좌익신문의 인상을 강하게 풍기지도 않았고, 일반 종합지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 편집이었다. 당시로서는 세련된 편집과 우수한 인쇄가 돋보였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좌익언론의 거물이었던 홍증식이 사장에 취임하면서 좌익 색채를 강하게 띠기 시작하더니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던 1945년말부터는 테러단이 신문사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고 사장이 구속되는 필화사건이 벌어졌으나, 1946년 9월 6일까지 1년 동안 발행되는 동안 좌익지를 대표하였고 수명이 가장 길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는 조선인민보보다 열흘쯤 늦은 때인 9월 19일 창간되었다. 사장은 남로당의 핵심 인물인 권오직이었다. 이 신문은 처음부터 공산당 기관지라는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선동적인 구호와 정치성 강한 기사로 지면을 채웠다. 해방일보는 1946년 5월 18일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위폐사건이 적발되면서 8개월만에 지령 15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남로당은 뒤를 이어 5월 중순에 청년해방일보를 발행하여 1947년 9월 21일 자 지령 63호까지 끌고 갔으나 더 이상의 발행이 불가능했다.

노력인민은 1947년 6월 19일 창간되었다. 해방일보의 뒤를 이은 남로당 기관지였는데 이해 8월 11일 하지 중장이 공산주의 불법화를 선언한 후에는 지하로 잠복하여 발행을 계속하였으나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또 하나의 남로당 기관지 건국은 해방일보가 폐간된 후 7월 9일 창간된 부정기 간행물로 8월 23일까지 겨우 2개월도 계속되지 못하였다.

이들 좌익신문 가운데는 조선인민보가 가장 종합지다운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는 6·25 후 서울에서 다시 발행되었고, 조선인민보는 1·4 후퇴 후 서울에서 세번째로 발간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의 패망으로 미군정이 실시되던 1945년 8월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무렵까지는 좌익지로 분류될 수 있는 신문이 공개적으로 발행되다가 지하로 잠복하여 명맥을 이으면서 좌익의 정치논리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전위기구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신문은 해방공간 언론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좌익이 어떻게 부침했으며 그들의 활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우익과는 어떤 문제로 대립하였는가, 그리고 좌·우익이 시국을 바라보던 이론적 차이는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자료다. 그런 의미에서 광복 후 발행된 대표적인 좌익지의 발행상황과 이에 관련된 인물들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남북한의 언론상황과 좌익지 발행

1) 난립한 남한의 신문


일제가 패망하던 당시 우리말로 발행되던 일간지는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전 신문 정비를 강행하여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켰고, 한국어 신문은 매일신보 하나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매일신보도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물자부족으로 타블로이드 2면의 빈약한 지면을 발행하면서 총독부의 충실한 대변지 노릇을 최후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정치집단이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정치기반 확대와 조직을 뒷받침할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일찍부터 선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말로 신문을 발간할 만한 시설은 많지 않았다.

서울에서 일간신문을 인쇄할 수 있는 시설을 제대로 갖춘 곳은 매일신보사를 비롯하여 총독부의 일어판 기관지 경성일보, 조선상공신문, 그리고 근택인쇄소(近澤印刷所) 정도였다. 전국 각 지방 도청 소재지에도 일본어 일간지가 하나씩 남아 있었는데 광복 후 이 시설을 접수하여 지방에서도 새로운 신문이 나왔다. 서울에서 우리말 단행본을 인쇄할 수 있는 시설을 가진 곳은 한성도서, 협진, 서울일신, 수영사, 대동, 청구, 고려 등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2)

이와 같이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8·15 이후 여러 종류의 신문이 우후죽순처럼 창간되었다. 1945년 말까지 지방에서 발행되던 신문을 합치면 전국적으로 적어도 40종이 넘는 신문들이 새로 나왔는데3) 곧 없어지는 것도 많아서 광복 6개월 후인 1946년 1월 현재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는 약 20여종이었다.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신문 발행을 규제하지 않고 방임상태로 두었으나 신문용지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광고수입도 부진하여 경영의 어려움으로 어느 신문이 언제 폐간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4)

1946년 5월 현재 발행 중인 신문은 자유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독립신보, 대동신문, 세계일보, 조선중앙일보, 한성일보, 민주일보, 경향신문, 현대일보, 중앙신문, 서울 타임스, 유니온 데모크라트의 15개지와`5) 좌익신문 조선인민보가 발행되고 있었으나 해방일보는 폐간되던 무렵이었다. 해방 2년이 지난 1947년 11월 현재 남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서울의 20개 일간지를 비롯하여 일간통신이 8개였고 지방에서도 일간지가 28개나 발행되고 있었다. 극심한 물자부족과 경제난 속에서 과다한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호는 다음과 같다.6)

­중앙일간지(20):공업신문, 조선일보, 한성일보, 서울타임스, 동아일보, 서울신문, 대한일보, 대동신문, 독립신보, 경향신문, 수산경제신문, 자유신문, 부녀신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세계일보, 민중일보, 우리신문, 조선중앙일보, 제일신문

­통신사(8):산업경제통신, 공립통신, 합동통신, 조선통신, 예술통신, 전보통신, 중앙경제통신, 중앙통신

­지방 일간지(28):강원 1, 충남 2, 전북 4, 전남 3, 경북 9(대구에서 발행되는 것이 8개), 경남 9(부산 8개)

이밖에도 수많은 주간지가 발행되고 있어서 조선신문기자협회와 조선신문기자회에 소속된 2개 단체의 회원을 합하면 971명에 달했다.7) 남한에서 많은 신문이 창간된 것은 일제치하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신문발행을 허용하지 않던 억압이 일시에 풀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신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든 신문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신문이 나온 객관적인 이유에 대해 송건호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8)

① 정당으로부터 직접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신문을 창간하여 처음부터 정당기관지 구실을 한 경우

② 사재를 투자하여 신문을 창간하였으나 처음부터 어느 정당을 지지한 경우

③ 신문사업을 하나의 기업으로 알고 투자한 경우:이 경우도 정치적 영향은 저마다 강했다.

전국 각지에서 쏟아져나온 신문, 잡지, 통신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존립할 만한 기반도 없으면서 각양각색의 형태로 발간되었다. 이는 “백출하는 정당들의 혼동상과 발을 맞추어 대립의 예봉을 전개하고 나아가서는 다시 기관지에서 선전 삐라적 역할로 전락하여 상대편 정당과 지도자의 중상까지 매진하게” 된 것이라는 당시의 평가가 언론의 한 단면을 묘사하고 있다.9) 이러한 정론지의 속출과 좌·우익의 정치적인 극한대립으로 반대파 신문을 테러 대상으로 삼는 상황까지 몰고 가게 되었다.

미군정은 10월 31일 군정법령 제19호를 공포하여 「신문 기타 출판물의 등기」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 법령 제5조는 정기간행물 발행을 ‘등기제’로 규정하여 원칙적으로 누구든지 신문 발행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일제치하의 광무신문지법은 신문발행을 ‘허가제’로 묶어 허가 자체를 극도로 억제하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신문발행이 어려웠다. 미군정이 신문발행을 ‘등기제’로 풀어놓은 것은 언론에 대한 자유를 허용하겠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법령을 이용하여 난립했던 신문의 실정을 파악할 수 있고, 언론을 장악, 규제하며 단속을 원활히 할 수 있다는 복선도 깔려 있었다.


2) 당과 행정기관 기관지로 정비된 북한신문


남한에서는 사회·경제적인 여건에 비해 과다한 신문이 난립되어 있었으나 북한은 이와는 사정이 달라서 전국의 신문을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로 정비하고 있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행정부 기관지 「민주조선」이 최정상에 위치하고, 하부 구조의 신문으로 각 지방 도 단위 신문과 청년단, 직업동맹 등의 기관지가 발행되었다.

노동신문의 전신은 「정로」(正路)였다. 1945년 11월 1일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창간될 때는 소형 2면의 주간신문으로 1회 1000부 정도씩 발간되었는데 이듬해 1월 26일부터는 일간으로 발전하였고, 3월 14일부터는 타블로이드 4면으로 발행하다가 5월 28일부터 대판 2면으로 지면을 확장하였다.10) 북한에서는 정로 창간일인 11월 1일을 출판절(出版節)로 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치러 오고 있다.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하면서 9월 1일 「노동신문」이 창간되었다. 「정로」와 신민당 기관지 「전위」(前衛)를 통합하여 제호를 노동신문으로 바꾸고 새롭게 출발한 것이다. 편집국장은 박팔양(朴八陽)이 맡았는데`11) 그는 1924년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하여 조선중앙일보 사회부장, 만선일보 편집부장과 문화부장을 역임했던 언론인이면서 시인이다. 노동신문은 ‘대중적 정치신문’으로 발행부수도 10만 부 이상으로 증가하였으며, 11월 5일부터는 대판 4면으로 체제를 일신하였다.12)

각도에서도 지방 당 기관지가 발행되었으나 평양에서 「노동신문」이 창간된 후에는 모두 ‘도 노동신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방에서 발행되던 「바른말」(평북도 당 기관지), 「정의」(함경남도 당 기관지), 「횃불」(함경북도 당 기관지), 「선봉」(원산시 당 기관지) 등은 모두 ‘도 노동신문’이 되었다.13) 북한 전역의 노동당 기관지가 노동신문이라는 제호 아래 통일된 것이다.

북한 정부의 기관지(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기관지) 「민주조선」은 1946년 6월 4일 창간되었다.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기관지 「평양민보」(1945.10.15)를 발전시켜 제호를 민주조선으로 고친 것이다. 비평가 안함광(安含光)이 잠시 임시주필을 맡았으나 초대 책임주필에 소설가 한설야(韓雪野)가 정식으로 취임하였다가 9월 북조선노동당 중앙본부 문화인부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한효(韓曉)가 임시주필을 맡았다. 한효는 편집국장이었는데 한설야의 후임으로 임시주필이 되면서 김정도(金正道)가 국장에 취임하였다. 그후 한효가 조소(朝蘇)문화협회 서기장으로 전출하면서 한재덕(韓載德)이 책임주필을 맡았다.14)

「민주조선」이 창간된 후에는 지방 행정기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들은 모두 ‘시, 도 인민보’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방에서 발행되던 「새길신문」(함북) 「함남인민일보」 「평북신보」 「자유항해」(황해도) 「원산인민보」 등은 모두 ‘인민보’가 되었다. 정부기관지 민주조선의 역할이 높아짐에 따라 지방정권의 기관지로 발행되던 신문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강화하고 지방 행정기관의 신문과 중앙신문이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한 조치였다.15) 당과 행정기관이 신문을 직접 관장하면서 명칭을 통일하고 전국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체제로 만든 것이다.

이 시기에 창간된 북한의 당보(黨報)들은 이른바 “당적 신문발전의 기초”를 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북한 언론은 남한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데올로기 아래서 당의 노선을 선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북한의 공식 역사에 기록된 신문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당의 노선과 정책의 집행자인 인민정권의 시책을 널리 선전하고 인민대중을 그 관철에로 조직동원하며 정권기관을 공고히 하고 그의 경제조직자적, 문화교양자적 기능과 역할을 높이는 데 적극 이바지하였다.”16)

그밖에 조선민주당 기관지 「조선민주보」를 비롯하여 주간신문으로 「노동자신문」(직업총동맹), 「농민신문」(농민총동맹), 「민주청년」(민주청년총동맹)이 있었고,17) 노동당의 이론잡지 「근로자」는 1946년 10월에 창간되었다. 이들 신문은 “항일혁명 출판물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 토대 위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으로, 남조선에서 발간되는 우익신문들을 해방 전의 부르주아 신문의 전철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규정했다.18)


3) 미군 상륙일에 창간된 조선인민보


조선인민보는 1945년 9월 8일 창간되었다. 남한에 주둔할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날이었다.

창간호는 1면 머리에 “WELCOME ALLIED FORCES!”라는 영문 환영사를 내걸고 박세영(朴世永)의 시 「연합군을 환영함」과 함께 「미군 상륙개시/인천해(仁川海)에 함선 24척」 「적군(赤軍) 진주하의 북선(北線) 풍경/일인가(日人街)에 태극기」 등의 기사를 실었다.

창간 초기에는 발행인과 발행장소의 표시가 없었고, 지령도 붙이지 않았다. 창간호 1면 제호 아래는 ‘특보’(9.8)로만 표시하였고, 이튿날부터는 2특보(9.9), 3특보(9.10) 순으로 호수를 매겼는데, 9월 12일자 제5호(9.12)부터 제호 아래 판권란에 발행인 김정도(金正道)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처음부터 사장 또는 발행인 등의 직제를 갖추어 창간한 것이 아니라 경성일보에 재직하던 언론인들이`19) 미군 진주에 맞춰 특보형식으로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성일보는 광복 후 곧바로 폐간되지는 않았고, 일제 패망 후 약 3개월이 지난 12월 11일까지는 일어판 발행이 계속되었다. 경일의 마지막 사장 요코미소 미쓰테루(橫溝光暉)는 자신이 겪었던 사실을 토대로 경성일보 최후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있다.20) 그의 회고에 따르면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있자 경성일보에 종사하던 좌익 사원들이 들고일어나 일본인들은 즉각 편집국을 비롯한 각 부서에서 나가라고 요구했다. 건국준비위원회 지령에 따라 경성일보를 관리하기로 되었으니 사무실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장은 이를 거절했고, 16일 밤과 17일 아침까지는 긴박한 사태가 계속되어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으나 17일부터는 일본 군대가 진입하여 경성일보는 정상적으로 발행되었다.21)

그런데 경성일보 지면에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이튿날인 9월 9일 하지 중장 휘하 부대가 서울로 진주하여 오후 4시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되는 광경을 보도하려는 과정에서 마찰이 일어났음을 보도하고 있다. 경성일보는 이날 오전부터 공무국 직원들이 출근을 저지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보도의 목적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고’를 ‘경성일보사 인쇄대대장 나카노 다카오(仲野鷹雄)’의 명의로 게재했다. 짧은 ‘사고’ 기사만으로 구체적인 사태의 경위를 소상히 알기는 어렵지만, 바로 조선인민보가 창간된 이튿날이기 때문에 조선인민보와 경성일보 간의 공장시설 사용을 둘러싼 마찰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9월 25일부터 경성일보는 미 군정청의 관리로 넘어갔고, 일인 사장이 정식으로 물러난 것도 이때였다. 경성일보 10월 31일자 지면에는 일인 종업원 일동의 명의로 「경성일보 독자에 고함」이라는 작별의 글이 실렸다. 이튿날인 11월 1일에는 ‘경성일보 조선인 종업원 일동’의 이름으로 신문을 조선인들이 만들고 있음을 알렸다.22) 그러고도 당분간 신문은 일어로 발행하였는데 12월 4일부터는 제호 아래 “본지는 미 군정청 관리하에 조선인 종업원이 발행하고 있습니다” 라고 명시하면서 12월 11일까지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인 사장이 아직 물러나지 않았고 일어판 경성일보도 폐간되지 않고 계속 발행되고 있는 약 2개월 동안 경성일보와 조선인민보는 동시에 발행된 것이다. 미군이 진주한 지 2주일 후인 9월 24일 제24군단의 주간 정보 요약보고에 따르면 일어신문 경성일보는 10만부를 인쇄하고 있었고, 조선인민보는 발행부수가 약 5000부였는데 박정선이 재정을 맡아 인민보 발간에 100만원을 내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23)

조선인민보는 제7호(9.14)부터 인쇄인이 추가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 김정도, 인쇄인 오영소

(吳永甦)가 함께 게재된 것이다. 오영소는 출판노조 중앙위원이었던 인물인데 1948년 5월 8일 서울신문과 자유신문의 공장에 침입하여 활자 케이스를 뒤엎고 시설을 파괴한 주동자로, 이 사건으로 7월 20일 징역 1년을 선고받게 되는 사람이다.

조선인민보는 10월 17일자 ‘사고’를 통해 지금까지의 특보 성격을 버리고 강화된 기초 위에서 편집과 영업 기타 전 부문을 쇄신강화하겠다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해방 이후 처음 나온 신문 조선에 있어서 ‘검열’을 받지 않고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야 탄생한 최초의 신문인 조선인민보는 젊은 동지들의 열과 힘의 응결로써 창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투쟁을 계속하야 어언 40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사고는 43호를 호화로운 기념특집으로 꾸미겠다고 약속했다. 이전까지는 타블로이드 2페이지 가운데 기사나 광고를 채우지 못한 백지 부분이 아래쪽에 흔히 나타나는 등 지면에 빈구석이 간혹 있었는데 43호 이후에 빈 공간이 완전히 사라졌다. 10월 28일부터는 공장시설 확충을 위해서 휴간에 들어갔다가 2주일 후인 11월 11일 을지로(황금정) 2가 20번지에서 속간하였다.24)

이때까지는 아직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복간되지 않았고, 새로 창간된 다른 신문은 열악한 인쇄시설과 재료 부족으로 사진 동판을 사용하기가 극히 어려웠으나 조선인민보는 사진을 과감하게 게재하는 등 세련된 편집으로 독자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 편집진도 신문제작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손색없는 신문을 만들었다.


4) 언론인들


사장 김정도가 물러나고 홍증식(洪增植)이 사장에 취임한 날짜는 대략 11월 11일 속간 때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49호(10.26) 이후부터 62호(11.21)까지의 지면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확실한 날짜를 알 수는 없지만, 지면이 남아 있는 제62호부터는 편집 겸 발행인이 홍증식, 인쇄인 김경록(金景錄)으로 바뀌어 있다. 김정도는 2개월 남짓 재직했던 것이다. 조선인민보에 관계했던 인물들로는 김정도, 홍증식을 비롯하여 편집국장 김오성(金午星), 편집위원은 김정록(金正錄), 유중렬(柳重烈), 한상운(韓相運)이었고`25) 고재두(高在斗), 한효(韓曉), 임화(林和) 등이 있었다.

김정도는 1945년 10월 23일 개최된 전조선기자대회에서 조선인민보 사장 자격으로 선언문을 낭독하였는데 이듬해 4월 19일 창간된 중외신보(中外新報)의 편집국장이 되었다가 9월 20일자로 퇴임하고 월북하여 평양에서 발행된 민주조선의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편집국장 김오성은 1946년 4월말 군정포고 위반으로 사장 홍증식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90일과 벌금 3만원의 실형을 언도받은 뒤 편집고문으로 물러앉으면서 인민당 선전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형 집행이 유예되어 있다가 9월 1일 구속되어 12월 1일 만기 출옥하였다. 그는 20일 후인 다음 해 1월 19일 또다시 구속되었으나`26) 이번에는 민전(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으로서 포고 제2호와 군정법령 19호를 위반한 혐의였다.27)

한효는 무슨 직책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제1회 기자대회 때 조선인민보 소속으로 참석했는데 오래지 않아 평양으로 가서 민주조선 편집국장이 되었다. 한상운은 정리위원이었다. 1946년 7월 1일 임화가 주필이 되던 날부터 판권에 정리위원으로 한상운의 이름이 기재되었는데 편집국장 역할이었던 것 같다. 20일 후인 7월 20일부터는 주필 임화의 이름이 판권에서 사라지고 발행인 고재두와 정리위원 한상운의 이름만 기재되었다. 김정록은 1935년 1월 일본상업통신사 진남포 지국장이었고, 조선인민보가 폐간된 뒤인 1947년 4월에는 공립통신취재부장으로 재직하였다.28)

홍증식은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 언론인의 중심인물로 3개 민간지의 영업국장을 역임한 경력을 지녔다.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보통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공부했다. 1915~20년에는 주로 북경에 체재하였으나 서울 상해 등지를 왕래하면서 이시영, 이동녕, 조성환 등과 접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2월 노동문제연구회에 참가했고 4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창립회원으로 교육부 간사가 되었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창립위원을 거쳐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총간사를 맡았는데 이해 9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다가 1924년 5월 이상협과 함께 퇴사하여 1925년 조선일보 영업국장이 되었다. 그동안인 1925년 4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복역하고 나온 후 1934년 6월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를 주식회사로 만들 때 취체역 영업국장이 되었다.

홍증식이 조선인민보 사장에 취임한 후 신문의 논조는 극좌로 기울었다.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임시정부와 우익을 공격하는 기사를 게재했다가 여러 차례 우익 데모대의 습격을 받았고, 미군정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된 일도 있었다.

임화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평론가이면서 시인이었다. 그는 잠시 이 신문의 공식적인 주필을 맡았고, 노력인민이 창간될 때는 박헌영을 극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12월 14일자 조선인민보에 「헌시-전국청년단체 총동맹대회에」라는 시를 실었다.

죽얻도 /썩지 않을/하나를 지닌/가슴과 가슴은/공처럼 부푸러 올라드는 손/마듸마다 매친 피/발을 구르면/따뜻이 흘러내려/너른 회장은/온전히 한 심장//여기 인민공화국의/수도가 있다/노래에도/연설에도/임의 살길은/명백하고/우리는 단지/죽는 법을 배워/도라가면 그만이다.

그는 일제 때 카프(KAPE)에 가담하여 프로시인으로 활동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문인보국회에 참여한 일도 있었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 외곽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여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47년 11월 월북하기 전까지는 박헌영, 이강국 노선의 민전 기획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6·25 때는 낙동강 전선에 종군까지 하였으나 1953년 8월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미제 간첩 혐의로 처형당하였다.

유중렬은 사회부장이었는데 1946년 9월 6일 조선인민보가 정간당할 때 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13일 석방되어 그후 조선통신 사회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조선언론협회의 선전부 차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5)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해방일보는 1945년 9월 19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광복 이튿날인 8월 16일 조선 건국준비위원회가 매일신보를 접수하여 해방일보를 발행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제지로 실현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한달 후 공산당중앙위원회 기관지로 해방일보가 창간되었던 것이다.

창간호는 “선전 선동뿐만 아니라 조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고 해방일보의 역할을 밝혔다.29) 처음에는 발행인 또는 편집인 표시 없이 제호 아래 ‘발행소 해방일보사’와 함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서울시위원회 기관지’라고만 기재했다가 1946년 2월 23일자(제69호)에 가서야 편집 겸 발행인 권오직(權五稷), 발행소 서울시 장곡천정 75번지 해방일보사를 판권에 기재하였다.

그러나 권오직은 창간 당초부터 사장이었다. 판권에 발행인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던 창간 직후 11월 22일자(제13호)에 실린 「해방일보사 멧세이지」에는 해방일보 대표로 권오직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같은 날짜에 실린 「조선청년동맹 멧세이지」에는 권오직이 조선청년동맹 중앙위원회 대표로도 기재되어 있다. 그는 조공청년동맹 대표이면서 창간 때부터 해방일보 사장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이기도 하였다. 편집장은 조일명(趙一明)으로 알려져 있으나, 판권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1946년 3월 20일(제92호)부터는 판권의 변화가 나타났다. 편집인 권오직, 발행 겸 인쇄인 김계호(金啓鎬), 발행소가 서울시 소공동 14번지 해방일보사로 되었다. 인쇄시설이 우수했던 근택 인쇄소로 발행 장소가 바뀐 것이다. 공산당은 이곳을 접수하여 본부로 삼는 동시에 출판사는 조선정판사로 개칭하고 위조지폐 발행장소로 사용하였다. 해방일보가 폐간된 뒤 경향신문이 창간되는 장소다. 판권에 나타난 권오직의 직책은 ‘편집인’이었는데 4월 13일(제116호)부터는 주간(主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창간호는 제호 오른편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라고 쓰고 “조선공산당의 통일재건 만세!”라는 구호를 1면 머리에 실었다. 매호 1면 머리에 “만국 무산자는 단결하라”는 공산주의 구호를 내걸고 기사도 당시에는 생소하게 들렸던 ‘노동자 동무들’ 같은 공산당식 용어를 사용하였다. 창간호부터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진영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김성수의 무식 송진우의 음모」(45.9.19 창간호), 「이승만, 김구의 매국적 흉계를 보라!」(46.3.3)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해방일보가 지탄하는 최대의 표적이었다. 이승만과 김구가 처음 귀국할 무렵에는 호의적인 보도를 했으나 신탁통치 문제 등으로 공산당과 정치적인 노선이 달라지자 격렬한 비난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의 귀국에 대해서는 “삼천만 민중의 기대절대”(45.10.25, 6호)로, 김구는 “김구 선생 일행 환국”(45.11.25, 15호)으로 보도하다가 정치적 이해관계로 의견이 갈리자 비난하는 논조로 바뀌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김구를 향해서는 「김구씨 성명에 대하야-임정의 비민주주의적 성격 지적」(46.1.12)이라는 글과 「이승만씨의 방송을 박(駁)함」(朴健, 46.1.31.), 「이승만, 김구 양씨를 임시정권에서 방축하라-가공할 이들의 비행을 보라」(46.3.13, 1면 톱) 등의 기사를 대서특필하였다. 안재홍을 향해서도 「안재홍의 무망(誣妄)을 배격함」(李太石, 46.4.7~14, 6회 연재) 같은 글로 공격하였다. 안재홍은 1946년 2월 6일 「한성일보」(발행인 양재하, 주필 이선근)를 창간했는데 동아, 조선과 함께 대표적 우익지였으며 반탁에 앞장섰다.30)

좌익지가 우익을 공격한 가장 큰 이슈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옹호한다는 주장이었다. 「일제 잔존세력과 반동언론의 도량」(조선인민보, 46.4.9 사설) 등을 통해서 우익과 이승만·김구를 공격했다. 미군정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가리지 않고 기용했기 때문에 그 인사정책의 난맥상은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은 친일파 숙청에 소극적이었으므로 좌익은 선전구호로 민족반역자 처단을 들고나왔던 것이다.

좌익신문은 우익을 공격하는 반면 박헌영과 김일성에 대해서는 「조선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동지 만세!」(46.2.13), 「조선이 나흔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權勇浩, 46.4.8~9)같은 구호와 기사로 칭송하였다.

 

좌익지의 찬탁과 우익지에 대한 공격
1) 좌경화한 기자대회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 대강당에서 전조선신문기자대회가 개최되어 조선신문기자회를 결성한 것은 10월 23일이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아직 속간되지 않았고, 매일신보는 좌경화한 자치위원회가 신문의 운영권을 놓고 발언을 강화하고 있던 때였다. 중요한 좌익신문으로는 조선인민보와 더불어 중앙신문도 있었다. 중앙신문은 조선상공신문의 사옥과 시설을 50만원에 매수하여 창간하였는데 발행인 김형수(金亨洙)를 중심으로 황대벽(인쇄인), 이상호(편집국장) 등의 진용으로 광복 후 대판(타블로이드 배판)으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었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좌익 성향 신문들의 독무대나 다름없던 시기였으므로`31) 기자대회의 주도권은 좌익계 언론이 쥐었으나 아직 좌·우익이 첨예한 대립을 보이지는 않았다. 기자대회에는 우익계 신문과 언론인도 참석하여 전국 24개사 150여명의 현역기자와 언론 현업에 복귀하지 않은 100 여명의 전직 기자가 모였다. 내빈으로는 미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을 대리하여‘뿌스’대령이 참석하였고, 뉴욕타임스, AP, UP 등의 외신기자와 각 문화단체 대표들도 나왔다. 2층에 마련된 방청석에는 많은 방청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32)
대회는 조선통신사 이종모(李鍾模)의 사회로 양재하(梁在廈·신조선보)가 개회사를 하였고 김진기(金鎭基·해방통신)의 조선신문기자대회 준비 경과보고, 의장의 조선신문기자회 결성 선언 순으로 진행되었다. 정진석(鄭鎭石· 자유신문)이 강령규약을 발표한 다음 조선인민보 사장 김정도의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허헌(許憲)과 조선공산당 김삼용(金三龍)의 축사가 있은 후 이승만이 등장하였다. 이날은 이승만이 각 정당 대표 200여명과 회합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한 날이다. 자유신문은 “만장의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이승만이 입장하여 약 15분간에 걸쳐 언론의 진정한 자유에 관하여 사자후를 토하니 일동 감명 깊게 경청하고 그의 강연은 서울방송국의 손으로 전 조선에 중계방송이 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이승만은“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내가 배재학당에 있을 때 협성회 회보를 발행하여 당시의 부패한 관리와 무능력하고 완고한 정부를 탄핵하고 다시 매일신문으로 이름을 고쳐 정부의 압박을 물리치니 민중의 절대한 지지 아래 신문발행을 계속하던 기억이 새롭다”라고 자신이 초창기 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서“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곤란을 겪지 않아도 언론의 자유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여러분은 이 신문의 자유를 공명정대하게 활용하여 사회의 진보발달에 공헌하여 주기를 빌어 마지않는다”고 말했다.33)
이승만에 이어서 건국동맹의 여운형(呂運亨)과 여운홍(呂運弘), 조선학술원 윤행중(尹行重), 조선문화건설중앙협회 이원조(李源朝) 등의 축사가 있었다. 이날 채택된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반세기 동안이나 우리 동포를 야만적으로 강압하고 착취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철쇄는 마침내 절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반으로 우리 동포의 살과 배속에는 아직도 그 악독한 쇄편(鎖片)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며 지방으로 일본제국주의자의 조선사정에 대한 기만적 선전은 연합국으로 하여금 조선의 현하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곤난케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로서 남아있는 흔적은 우리의 힘찬 건설로서만 퇴치될 것이요 이에 대한 모든 지장이 완전히 배제되고서야만 씩씩한 건국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 붓을 든 자 진실로 우리의 국가건설에 대한 제 장애물을 정당히 비판하여 대중 앞에 그 정체를 밝힘으로써 민족진로에 등화가 될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 단순한 춘추의 필법만으로서는 우리는 만족치 않는다. 때는 바야흐로 우리에게 필봉의 무장을 요구한다. 모든 민족적 건설에 한 개의 추진이 되고 다시 민중의 지향을 밝게 하는 거화(炬火)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붓(筆)은 꺾어진 붓이며 연약한 붓이며 무능력한 붓이다. 민중이 갈망하는 바는 우리의 힘있고 바르고 용감한 필봉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중적 요망에 저버림이 없도록 진력한다. 민중의 진로에 대한 찬란한 거화를 이루어 조선사정을 국제적으로 정확히 보도하는 침로(針路)가 되기를 기도한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이러한 목표를 수행함에는 먼저 우리들의 결속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우리는 철석같은 단결된 힘을 가지려 한다. 그리고 참된 민족해방을 위한 역사적 정의를 발양하는 강력한 필봉을 가지기를 기도한다. 진정한 언론의 자주를 확보함으로서만 민족의 완전한 독립에의 길이 열릴 것이다. 신문이 흔히 불편부당을 말하나 이것은 흑백을 흑백으로써 가리어 추호도 왜곡치 않는 것만이 진정한 불편부당인 것을 확신한다. 엄정중립이라는 기회주의적 이념이 적어도 이러한 전민족적 격동기에 있어서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우리는 용감한 전투적 언론진을 구축하기에 분투함을 선언한다.
綱領
一. 우리는 민족의 완전 독립을 기한다.
一. 우리는 언론 자주의 확보를 기한다.

 

이와 같이 조선신문기자회는 신문이 지니는 불편부당과 엄정중립이라는 자세를‘기회주의’로 규정하고‘용감한 전투적 언론’을 지향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제2일 대회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매일신보 자치위원회를 격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34)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기자대회가 열린 지 한달 후인 11월 23일과 12월 1일 각각 속간되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언론계의 일반적 풍조인 진보적 민주주의와는 달리 반탁의 선봉역을 담당하여 정치적으로 우익에 섰으며, 이미 창간된 극우익지 대동신문과 더불어 반공언론의 구실을 했다. 후일 조선일보는 김구 노선의 대변지로, 동아일보는 한민당의 사실상 기관지가 되었다. 속간 당시 두 신문의 영향력은 별로 크지 못했다.35)
조선신문기자회 초대 위원장은 이종모였으나 이듬해 4월 28일에는 제2회 전국신문기자대회를 열고‘위원장단’으로 기구를 바꾸었다. 새 위원장단은 문동표(조선일보), 양재하(한성일보), 정진석(자유신문), 김기림(공립통신), 이상호(노력인민)였다. 사무국은 을지로(황금정) 2가 199번지 공립통신사에 두고 있었는데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좌익을 지지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결성된 조선신문기자협회(1946.8.10 창립)는 위원장 고재욱(동아일보), 부위원장 이헌구, 이건혁으로 동아일보사에 사무국을 두었다.36)

 

2) 미군정의 규제와 언론사 테러
언론이 좌·우익으로 나뉘어 그 대립이 첨예화되고, 언론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난 것은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에서 신탁통치 결정이 발표된 뒤부터였다. 12월 28일 열린 독립촉성청년총연맹과 각 단체에서 신탁통치 배격을 결의하자 이튿날인 12월 29일 조선인민보가 가장 먼저 습격당했다. 이날 신원을 알 수 없는 폭력단 약 20명이 침입하여 인쇄공장을 파괴하고 사원들을 폭행하자 국군준비대와 미군 헌병대가 출동하여 진정되었다.37)
이때부터 보복적인 신문사 테러가 빈발하여 1월 한 달은 신문사 습격과 테러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12월 30일에는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宋鎭禹)가 암살당했다. 동아일보가 중간되고 송진우가 세 번째로 사장직을 맡은 지 한달 뒤의 일이었다.38) 해가 바뀐 1월 2일에는 테러단이 신문사에 수류탄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39) 서울신문과 중앙신문이 습격당한 것은 6일이었고, 7일 오후에는 대동신문사 인쇄공장에 50여명의 테러단이 침입하여 시설을 파괴하고 배달부 1명을 데려간 사건이 일어났다. 8일 오후 7시에는 자유신문사 공장에 괴한이 침입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는 소동을 일으켰다. 인명 피해는 없었고 신문도 종전대로 속간되었지만 언론에 대한 테러와 협박, 위협, 공갈사건이 자주 일어난 것은 좌·우익의 정치적인 대립이 언론에 파급된 것이다.40)  18일에는 반탁학생성토대회가 끝난 뒤 시위군중들이 또다시 조선인민보를 습격하였다.41) 18일 밤 반탁학생총연맹이 주최한 반탁학생성토대회는 탁치 절대반대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벌였는데 무기를 휴대한 반대단체의 습격을 받아 4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유혈 참사를 빚었다.
시내 남녀 전문대학생, 중학생 약 1000여명은 오후 5시경 성토대회를 마친 후 소련 영사관을 방문하여 결의문과 성토문을 전달한 뒤 미국 영사관을 방문하였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하자 반도호텔을 거쳐서 조선호텔로 가서 미군측에 결의문과 성토문을 수교하는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시위행진 도중 을지로 1가 조선인민보 편집국과 인민당 서울인민위원회를 차례로 습격하였다. 이들은 그 길로 임시정부를 방문하려고 서대문 쪽으로 행진하던 중 돌연 권총과 장총을 든 청년들의 습격으로 탄환을 맞아 피를 흘리며 거꾸러졌다. 부상당한 학생은 판명된 숫자가 40여명에 달하였다.
이같은 사태로 경찰관이 신문사 문앞에서 호위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까지 발전하자 테러를 근절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 한동안은 과격한 테러는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42) 그러나 1946년 전반기의 여러 차례에 걸친 테러사건 가운데서도 미 – 소 공동위원회가 휴회된 직후인 5월 12일 독립전취국민대회에 참가했던 군중들이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중앙신문 등을 연달아 습격하여 인쇄시설을 파괴하는 대규모 사건도 일어났다.43) 1947년에도 언론테러는 빈번히 일어나서 이해 9월부터 1947년 8월까지 1년 사이에 테러단에게 습격, 파괴된 언론기관은 11개소, 피습당한 언론인 55명, 당국에 검거된 언론인 105명에 이르렀다.44)
미군정 당국도 이러한 사태에서 언론에 대한 자유방임적 방침을 바꾸어 신문발행을 정지시키는 행정처분과 언론인 구속의 사법처분 그리고 언론규제의 법규 강화 등으로 대처했다.

 

3) 홍증식과 김오성 구속
1946년 4월 하순 군정청은 조선인민보 사장 홍증식과 편집국장 김오성을 군정포고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하였다. 문제된 기사는 조선인민보 3월26일자(제186호) 사설「식량과 우리의 요구」, 4월 2일자 사회면 쌀을 달라고 시청 앞에 모여든 군중 가운데 부인 한 사람이 총에 맞아 부상하였다는 기사(쌀 대신 총부리 응수 - 어제 시청 앞에 유혈의 참극), 인민위원회 발표 기사, 공산당 발표 기사 및 쌀 사건에 대한 서대문 우편소장 담화 등 5건이었다.45)
문제가 된 3월 26일자 사설은“일본제국주의의 포학(暴虐)도 능히 조선민중에게 최소의 호구량을 보장할 수 있었나니 조선 해방의 은인이며 조선독립의 원군인 미군정 당국이 어찌 이에 무관심할 수 있으랴”라면서 미곡수집과 배급과를 인민의 손을 통하여 실시할 것을 굳게 주장한다고 결론지었다. 미군정청 공보국장 뉴맨 대좌는 이 사설 가운데 과격한 부분에 대해서 편집국장 김오성에게 취소를 요구하였다. 조선인민보는 3월 29일자 지면에“미군당국이 어찌 이에 무관심할 수 있으랴”라는 부분은 취소한다고 밝혔다.
이 무렵 폭등하는 물가고에 쌀 부족으로 생활에 위협을 받은 국민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공산당은 민생문제를 가장 좋은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인민보는 연일 쌀을 달라고 시청에 몰려드는 시민들의 불만을 보도했다. 3월 20일 출판노동조합 서울지부는 식량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조합원의 식량대책에 전력을 쏟기로 하였다. 군정장관 러치는 이같은 사태에 대해 난립한 언론이 사실무근의 허위보도로 치안을 교란하고 있다면서 언론계에 경고를 발했다. 그는 지난 2주동안 완전한 허위기사를 공포하여 치안을 교란한 2가지 사건이 있기 때문에 현재 진상을 규명 중이며 범죄사실이 명백해지면 구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46) 
조선인민보는 식량문제를 가지고 우익과 임시정부까지 격렬하게 비난하는 재료로 삼았다. 2월 5일자(제137호)의 경우 임시정부와 우익정당이 연합한 2월 1일의 국민회의는“반민주주의적이고 정권획득의 정치적 투기”라고 규정하고 국민회의는 식량부족으로 굶주리는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삼척에서는 지난 12월 26일에 5600명의 절식자(絶食者)가 생겼고 이들은 석탄을 파던 삽을 가지고 초목뿌리를 캐러 산곡간을 헤매고 있으며, 서울에서는 쌀 한말 값이 200원으로 폭등했고 120만 시민은 쌀을 달라고 절규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임정을 비난했다.

 

“임정의 대감들은 하계(下界)의 한국 인민의 생활을 모르는가. 안다면 그 해결을 위하야 구체적으로 어떠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고 또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가. 모리배들을 동원하야 지방에 유세하고 공산주의자를 격렬분자라 하고 농민이 일을 안하고 있다고 애망한 농민을 모욕함으로써 해결할 방도를 강구할 수 있을까.”

 

조선인민보는 임정을 비난하는 동시에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주장을 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조선인민의 모든 경제적, 사회적 난관을 해결할 가능성을 부여했는데 임정 중심의 반동세력은 삼상회의를 반대하여 조선의 참된 협력자인 미소를 배격하고, 국내에 있어서 민중과 접근하여 자주독립을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하려는 공산주의자에게 가장 모욕적인 악선전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47) 같은 날짜에는 박헌영의「신탁(후견)제와 조선」이라는 글을 실었다. 한편 좌익 또는 공산당과 동조하는 정치인은 1면에 싣는 고정란으로「지도자 군상」을 마련하여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 1946년 4월 9일부터「지도자 군상」에 실린 정치인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필자).

 

呂運亨(李康國), 朴憲永(金午星), 金日成(徐重錫), 許憲(金桂林), 金若山(李如星), 金枓奉(李淸源), 李舟河(金台俊),

 

이같은 상황에서 미 군정청은 조선인민보의 홍증식과 김오성을 구속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5월 4일 10시 반 종로경찰서에서 열린 공판에서 재판장 안도레리 대위는 두 사람에게 징역 90일과 벌금 3만원을 각각 언도하였다. 다만 형 집행은 경기도지사를 경유하여 하지 중장의 최후 결정이 있을때까지 유예하도록 단서를 붙였다. 공판이 열리기 전인 4월 25일 명동 천주교당에서 열린 제2회 전국신문기자대회는 두 사람을 재판에 회부한 사건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사장과 편집국장의 유죄가 확정되었으나 수감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조선인민보는 5월 12일자(232호)‘사고’를 통해 직제개편을 발표하고, 편집 겸 발행인을 고재두(高在斗)로 바꾸었다. 직제 개편 이후에는 편집에 관한 일체 책임은 편집주간이 갖게 된다는 것으로, 홍증식은 명예사장, 김오성은 편집고문으로 물러앉고 고재두가 편집주간에 취임하였다. 고재두는 부사장이었는데 2월 말 일간신문 대표들이 독립선언 기념행사 통일을 위한 교섭위원을 선임했을 때 조선인민보 대표로 출석했었다. 그는 9월 6일 이 신문의 정간으로 더 이상 발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발행인을 맡게 된다.

 

4) 임정 비난에 김구의 질책
임화가 조선인민보 판권에 주필로 정식 기재된 것은 7월 1일(제282호)이었다. 그러나 판권에 이름이 기재되기 전부터 그는 이미 주필로 활동하고 있었다. 약 한달 전인 6월 9일자 6·10 만세운동 20주년 기념 좌담회에 주간 고재두와 함께‘주필’로 참석하였는데 이 좌담회는 6·10 만세운동을 조선공산당이 투쟁한 결과라고 성격을 규정지었다. “자본가는 일제의 품안에 있었고,‘ 조공’(朝共)만이 불굴의 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홍남표가 집필한「6·10 만세운동의 교훈」(6월 7, 8일자)도 이 운동은“불사신 조공이 총지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판권에 임화가 주필로 기재된 날인 7월 1일자 신문은 제1면에 조선공산당 서기국이 발표했다는「테로 괴수 이승만, 김구를 국외로 추방하라」는 기사와 사설「이승만씨의 용렬하고 파렴치한」등으로 임정과 우익을 격렬히 매도했다.
이같은 논조에 대해서는 김구도 그냥 묵과할 수가 없었다. 김구는 귀국 후 아무런 공식적 견해를 표명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왔으나 7월 4일자에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으로 조선인민보를 질책하였다. “애국자니 반역자니 左니 右니 하는 데 있어서 먼저 말하고자 한다. 과연 무엇을 가리켜 좌라 하고 우라 하며 또 누구를 가리켜 애국자라 하고 반역자라 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공산당의 주장을 통박하였다.

 

“`7월 1일 공산당 서기국에서 조선인민보를 통하여「분열 책임자를 추방하라」는 제하에 나를 괴수라 하였으니 나는 이것을 볼 때 과연 국중(國中)에 우국의 지사와 혁명의 투사가 얼마나 있는가를 십분 생각하여 보았다. 적이 납항(納降)하던 전석(前夕)까지 적의 진두에 서서 성전(聖戰)이라고 찬양하고 적의 전승을 위하여 맹서하고 청년학도를 일으켜 전지로 내몰고 적의 주구가 되며 적의 기관에 암약하여 적을 위하고 동포를 고압(高壓)하던 자와 적이 납항하고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적의 통치기관인 총독부에 출입한 자는 모두 애국자이며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다.”

 

적이 항복하던 전날 저녁까지 적의 진두에 서서 성전이라고 찬양하고 적의 전쟁 승리를 위하여 청년학도를 전쟁터로 내몰고 적의 주구가 되며 적의 기관에 암약하면서 적을 위하여 동포를 압박하던 자가 누구인지 김구가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조선인민보 제작진 가운데 일제 때 경성일보에 종사했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음을 은연중 지적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을 테러의 괴수라고 비난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김구는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를 자신이 사주하였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라고 말하고 이렇게 통탄하였다.

 

“친애하는 동포여! 절역(絶域)에서 전전할 때 고국의 산하를 바라보면서 그리운 동포를 연상할 때에 어찌 오늘과 같은 경우를 뜻하였으랴? 동포여 반성할지어다. 동포여! 단결할지어다.”48)

 

김구의 성명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은 그 전해 10월 23일 전조선신문기자 대회가 개최되던 날‘임시정부지지 조선청년단체’의 이름으로 살포된「악덕 기자에게 경고함」이라는 전단에서도 나타난다. 전단은“사기적인 소위 인민공화국은 배격하고 우리 혁명열사들의 혈투로써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유일의 우리 전통정부로서 지지”한다면서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한 인민공화국을 비난했다. 일부 악덕 기자와 신문사가 자칭 인민대표회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정의를 옹호하는 신문기자의 양심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인민공화국에 매수된 추악한 행동이라고도 규탄했다.

 

“오등(吾等)은 신문기자 중에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주구로써 황도(皇道)주의를 선전하고 총독부 관리들의 공사충견이던 자로써 소위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자가 있음을 숙지한다. 여등(汝等)이 전비를 회개한다는 의미에서 인민공화국을 지지한다면 여등의 죄악은 일층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등은 속죄의 의미로서 공정한 필봉을 들어야 할 것이다. 불연이면 정의의 쾌도 너희를 분쇄할 것이다.”49)

 

임시정부 요인들이 아직 귀국하기 전 좌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좌익언론이 기선을 잡고 있음을 경고한 내용으로 여러 단체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앞으로 있을 언론의 대립을 예고하는 내용이었다. 좌익언론에 대한 성토문은 이듬해 3월 3일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연맹 명의로 살포된 것도 있는데“일제시대에는 황민화 운동 제일선 부대로 활동하여 오다가 의외로 8·15를 당하여 낭패한 나머지 자신의 호신책으로 공산계열에 가담하여 공산당을 민중을 농락한다”고 주장했다.50)

임화는 조선인민보 주필 취임 1주일만에 서울 마포구에서 발생한 호열자 기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서울시장의 고발로 종로경찰서에 잠시 유치되었다. 미군정은 7월 8일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대한독립신문의 3사 간부를 구속했다. 서울시장이 세 신문의 호열자 관련기사가 사실과 다르다고 고발했기 때문이다. 구속된 언론인은 임화·김경록(조선인민보), 정인익·정진석(자유신문), 오장환·고영환(대한독립신문) 등이었는데 이들은 이틀 후 5만원씩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군정청 출입기자단은 군정 장관 러치 소장과 하지 중장에게 이같은 언론간섭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는 건의문을 전달했다. 임화의 공식적인 주필재임기간은 20일에 불과했다. 7월 20일자(302호)까지 판권에 주필로 기재되어 있다가 22일자(303호)부터는 이름이 빠지고 정리위원 한상운만 남았다. 그러나 조선인민보의 운명은 다하고 있었다.
8월 8일 경찰은 홍증식을 또다시 검거하였다. 지난 5월 4일의 재판결과에 따라 90일간의 징역형을 집행하기 위해서였다. 편집국장이었던 김오성은 9월 1일 구속 수감되었다. 김오성은 조선인민보를 떠나 여운형의 인민당 선전부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두 사람을 구속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한 직후 군정당국은 9월 6일자로 조선인민보를 비롯하여 현대일보, 중앙신문에 정간처분을 내렸다.
세 신문의 정간 이유는 미태평양 점령군사령부 포고 제2호(1945. 9. 6)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태롭게 했다는 규정에 저촉되었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조선인민보 편집인 고재두의 자택을 수색하여「9월의 선전활동 급 투쟁계획」이라는 문건을 압수하였다. 9페이지 분량의 이 문서는 조선공산당의 상세한 일과(日課) 지령으로 포고 제2호에 저촉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간당하던 때 조선인민보 발행부수는 3만 5000부였다.51) 이로써 조선인민보는 정확히 2일이 모자라는 1년만에 종언을 고했다. 현재 볼 수 있는 지면은 8월 30일자 제342호까지다. 조선인민보사에서는 이강국의「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이강국),「 지도자론」(김오성),「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방향」(민전 사무국 편) 같은 책도 출판하였다.
미군정은 세 신문사의 정간과 함께 신문 관계자 여러 명을 체포하고 수사를 계속했는데 조선인민보의 유중렬(사회부장), 이장영(보급부장), 정우식(서무부장) 3명과 중앙신문의 이상호(편집국장), 황대벽(영업국장 또는 총무국장), 김용진(정치부), 유택규(사회부), 김덕규(사회부), 진수돈(사회부), 오재동(서무부장)이 구속되었다. 구속자 가운데 유중렬, 이장영, 유택규, 김덕규는 13일, 진수돈, 김용진, 오재동은 20일에 석방되었으나 정우식, 이상호, 황대벽은 군정재판에 회부되었다. 경기도 경찰부는 7일 아침부터 시내 각 교통기관을 검색하여 통행인을 심문하는 등 비상계엄망을 치고 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이강국(李康國), 이주하(李舟河) 체포령도 내렸다.
홍증식은 11월 8일 3개월의 징역을 마치고 석방되어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8월 2일 또다시 검거되었고, 김오성은 이에 앞서 1947년 1월 19일 재차 검거되었다.

 

5) 해방일보의 조직과 운영
해방일보는 과격한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고「공산당의 주장」(창간호 제2면)을 펼치면서 정치적인 글을 많이 싣는 반면, 사회의 일상적인 뉴스와 정보는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일반 신문과는 인상부터 달랐다. 따라서 신문이라기보다는 공산당 기관지로서 주목을 끌었다.52) 그러므로 구독료와 광고료만 가지고 운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자금의 일부를 노조나 공산당원들의 성금에 의존하였다.
1945년 12월 20일자(제33호)에는 신문발행을 지원하는‘근로 동무들’이 낸 성금 내역이 실려 있고 이듬해 2월 7일자(제58호)에는「해방일보 기금모집」사고가 실려 있다. 적은 금액이라도 공장에서, 광산에서, 농촌에서, 학교에서, 가두에서, 기금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이어서 2월 10일에도 기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실렸다. 3월 10일자(제81호)는 해방일보사 편집위원회 명의로「해방일보를 직히라」는 사고와 함께 기금 납부자의 명단을 실었다. 4월 4일(제107호)에는 역시 해방일보사 편집위원회 명의로「해방일보를 키워라」는 구호로 기금조성 캠페인을 벌이면서 기금납부자의 명단을 실었다. 그러나 기금 납부자는 많지 않았다. 해방일보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자료로는 통신망과 운영에 관한 지침이 있다. 1946년 4월 12일자(제115호)에는「해방일보 통신망은 이러케 조직하라!」는 제목으로 노동당 북조선 북국의 요강을 게재하였다. 8개항으로 된 이 요강 가운데 제1항은 당 기관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당 기관지는 당의 정책, 주장, 결의를 대중 가운데 침투 실천케 하며 대중의 절실한 문제를 적확히 반영하고 해결함으로써 근로대중의 선봉이 되고 그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이 임무를 완수하자면 당 기관지는 대중 속에 광범히 통신망을 조직하여야 한다.”

 

기관지의 통신원[기자]은 당 기관지와 군중 사이의 교량이며“통신망 조직은 당 기관지의 혈맥이다”(제2항)라고도 정의했다. 당 기관지 통신망의 영도와 조직은 각급 당이 직접 책임진다. 각 도당 비서는 도 선전부를 통하여서 각 군당 비서에게 지시하여 직접 통신망을 조직한다.
각 군당 비서는 군 선전부장에게 지시하여 각 면, 리 또는 각 행정기관급 학교, 노동조합 등에 통신원을 1인씩 배치하여 각종 사건의 발생과 기타소식을 보도케 한다.(제3항) 기관지의 통신원은 공산당원이어야 하며 당의 입장을 견제하며 당의 정책에 충실하고 투철한 사상, 의식의 소유자라야 한다.(제6항) 군당 비서와 선전부장은 원고의 종류와 내용에 대하여 정세(精細) 치밀한 계획적 지시와 독촉과 검사공작(원고 검열과 통과)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상급 간부와 당 기관지에 대하여 일체를 책임져야 한다.(제8항)53)
이와 같이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투철한 사상으로 무장한 통신원이 취재를 담당하고 당의 방침에 따라 운영되었다. 4월 14일자(제117호)에는 「기관지 배포망과 통신망 조직에 대한 구체적 지시」가 게재되었다. 편집위원회에서 결정한 내용을 대표자 권오직의 명의로 공표한 것이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해방일보는 서울시를 비롯한 각 시, 도에 지사를 설치하고 시, 도 지사에는 반드시 통신원 2인 이상을 두도록 한다. 또한 도내 각구에도 통신원 1인이상을 배치하며 공장, 직장, 농조(農組) 기타 대중조직 가운데도 통신원을 둔다. 시와 도지사는 각 지국을 독려하여 신문을 확장한다. 통신원은 자신이 소속된 당부(黨部)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의무가 있다. 신문대금이 수납되지 않을 경우에는 각 구군 공장 등의 당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해방일보의 기금모금과 신문 확장을 위해서도 시, 도, 구, 군, 당 책임자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무가 있다. 이 지시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두 조항이었다.
1. 각 통신원은 일반 신문기자를 지도하야 우리 영향 밑으로 흡수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1. 만일 일반 신문기자가 반동적 행위를 할 때에는 또한 대중의 앞에서 용감하게 이를 폭로할 필요가 있다.

 

좌익지의 몰락
1) 위조지폐 사건과 해방일보 폐간
해방일보는 1946년 5월 18일까지 150호를 발행한 후 폐간되었다. 3일전인 5월 15일, 미 군정당국은 공산당 본부인 동시에 해방일보사 사옥으로 되어 있는 조선정판사에서 900만원의 위조지폐가 제조되었는데 그 가운데 50만원이 해방일보 제작에 사용되었다고 발표했다. 위조지폐 제작은 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고, 위폐는 현대일보에도 28만원이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정판사 위폐사건은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 등 조선공산당원 7명이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이다. 위폐발행의 목적은 남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당의 자금 및 선전활동비를 조달하는 동시에 경제를 교란시키려는 것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近澤) 빌딩을 접수하여 건물을 공산당 본부로 사용하면서 인쇄소는 조선정판사로 개칭하여 해방일보도 같은 건물에서 발행하였는데 여기서 위조지폐를 발행하였다. 공산당은 재정난으로 당 활동자금 조달방책을 모색하고 있던 중 조선정판사에 지폐 원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원인 사장 박낙종에게 위폐 발행 계획을 알렸다. 박낙종은 정판사에 근무하던 공산당원 김창선에게 당 재정부장이 관술과 당 중앙집행위원이며 해방일보사 사장인 권오직의 지령을 전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10월 20일 서울시 소공동 74번지 근택빌딩에 있는 조선정판사 사장실에서 사장 박낙종을 비롯한 간부와 기술자 몇 명이 비밀리에 위조지폐를 인쇄하여 공산당에 제공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공장 종업원들이 퇴근한 뒤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1200만원을 위조하여 이관술에게 제공하였다.
출처불명의 위조지폐가 나돌아 경제를 혼란시키자 경찰은 수사에 착수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하고 범인체포에 나서 1946년 5월 4일과 5일 중부경찰서(당시 本町경찰서) 형사대가 관련자 7명을 체포하였다. 이어 그들의 자백에 의하여 5월7일 관련 공산당원 중 간부 3명을 제외한 14명을 체포하였다.
권오직과 이관술은 사건이 일반에게 알려지자 5월 16일자로「삼천만 동포에게 소(訴)함」이라는 성명서를 해방일보 1면톱에 실어 경찰의 혐의를 부인하였다. 이와 함께「당 중앙서기국 앞」으로 다음과 같은 공개편지를 발표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우리 두 사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곤란이 있는 것은 미안합니다. 그러나 사건은 너무나 명명백백하니 안심하시고 분투하소서. 작일 발표를 보고 별지와 같은 2종의 서류를 제출하오니 선처하여 주소서.”

 

이 공개편지는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내비치고 있는 것 같다. 신문도 이 날짜로서 더 이상 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일보는 정간당했고 하지 중장의 명령으로 미 헌병대가 출동하여 사옥을 폐쇄하였다. 해방일보는 구속된 정판사 직원은 신문사와 관련없다고 주장했다. “지폐위조로써 건국과정에 있는 조선의 경제를 교란하야 민중생활을 파탄식히는 역도는 조선민족에 대한 최대의 죄악으로써 우리는 이들 역도를 가장 미워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우익 반동파의 모략이며 음모”로 규정했다. 폐간된 날짜 1면 머리에는 권오직과 이관술 명의로 이같은 주장을 담은「삼천만 동포에게 소함」과 함께 같은 지면에「이승만 김구의 반동적 선동이 통일 달성에 장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7월 29일 서울지방법원 제14호 법정에서 주심판사 양원일과 최영환·김정렬 두 판사의 배석으로 제1회 공판을 연 후 30여회의 공판이 진행되었는데, 공산당은 사건을 담당한 판사와 조재천·김홍섭 두 담당검사들을 협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판 때 방청석은 물론 판·검사석과 서기석을 점령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특히 제1회 공판 때는 새벽부터 정동 일대에서 수백명의 공산당원들이「항쟁가」를 부르며 소란을 피워 기마대와 수백명의 경관이 동원되었다. 사태 악화를 우려하여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청장 장택상 두 사람이 법정에 나타나자 방청석에 있던 공산당원들이 소란을 피워 법정은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재판은 개정되자마자 10여명에 달하는 좌익 변호사들의 재판기피로 폐정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28일의 선고공판에서 이관술·박낙종 등 주범에게는 무기징역을 비롯하여 관련자들에게 징역 15년과 10년이 각각 선고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당국은 공산당의 불법행동에 강력한 조처를 취하게 되어 공산당은 지하로 잠입, 파괴공작을 벌이게 되었다.

 

2) 해방일보 제작진
해방일보가 폐간되었기 때문에 공산당 대변지 역할은 조선인민보가 맡았는데 사건의 명칭도 우익지들이 사용하던‘조선공산당 위폐사건’이라 하지 않고‘정판사 사건’으로 지칭하여 국민들의 선입견을 배제하려 했다.54) 동아일보와 한성일보에 대해서는‘반동신문’의 날조보도라고 비난했다.55) 한편 동아일보와 극우익지 대동신문도 좌익신문을 비난하여 좌·우익지는 원색적인 비난전을 벌였다.56)
해방일보가 폐간당하던 때의 진용은 사장(주간) 권오직, 발행 겸 인쇄인 김계호, 논설부위원 이우적(李友狄) 등이었다. 권오직은 홍증식과 함께 일제시대부터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일제시대의 골수 공산주의자 권오설(權五卨)의 동생이다. 권오설은 1925년 4월 18일 박헌영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던 사람이고, 권오직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후 1928년 귀국하여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가 체포되어 8년간 복역한 뒤 석방되었으나 재차 체포되어 또다시 8년간 복역한 경력이 있었다.57) 권오직은 해방일보 폐간 뒤에 월북하여 194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52년 2월 중국대사를 지냈으나 1953년 초 소환되어 같은 해 8월 남로당계로 몰려 숙청당했다.
권오직 외에 주필 조두원, 편집국장 정태식(鄭泰植), 영업국장 윤형식(尹亨植), 정치부 기자 박갑동(朴甲東), 편집국 강병도(姜炳度), 문예부 이상운(李相運), 그리고 제주도 출신 이신연(李信衍)도 있었다. 조두원은 권오직과 같은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이며, 정태식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박갑동과 이상운은 일본 와세다대 출신이었다.58) 정화준(鄭和濬)은 1946년 4월 조선신문기자가 주최한 전 조선신문기자대회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었으나 신문사에서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해방일보가 폐간된 뒤 권오직과 조두원이 피신하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정태식이 신문 발행의 중심인물이 되었다.59) 정태식은 7월 11일자 조선인민보에 실린「참된 애국자 이관술 동지」라는 글에서 이관술이 일제시대부터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해온 애국자라면서“이런 애국자가 민중생활을 파탄시키는 지폐를 위조하였을 것인가? 이런 동지야말로 그런 반인민적 범죄에 대하여 가장 증오를 갖는 것”이라면서 이관술을 옹호하였다. 해방일보사는 4월 10일「해방주보」를 창간하였지만 해방일보가 폐간되면서 이 주간지도 저절로 없어졌다.
조선정판사 사건 무렵부터 미군정은 언론에 대한 자유방임정책을 바꾸어 공산당과 좌익지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5월 29일 군정법령 88호「신문급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을 공포했다. 법령의 골자는 발행의‘허가제’로서, 미군정 실시 후 짧은 기간이나마 신문발행의‘등기제’가 실시되던 것이 다시 일제 때와 같은‘허가제’로 되돌아간 것이다. 군정당국은 용지난을 이유로 내세웠으나 좌익지의 선동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미 군정청은 공산당에게 발행허가를 내주지 않았으나 공산주의자들은 공청 기관지「청년해방일보」, 전평 기관지「전국노동자신문」, 전농기관지「전국농민신문」등의 주간지를 발행하였다.
「청년해방일보」는 해방일보가 폐간될 무렵 창간되었다. 그러나 창간호를 볼 수 없고, 남아 있는 신문은 1946년 5월 30일자 제14호부터 1947년 9월 21일자 제64호까지인데 중간에 결호가 많다.60) 해방일보가 5월 18일자까지 발행되었으므로 그날을 전후해서 창간되었을 것이다. 발행소는 서울 남대문로 5의 1, 편집 발행 겸 인쇄인은 김용일(金容日)이었다. 이 신문도 일간 등록을 신청하였으나 허가가 나지 않았다.61)
청년해방일보는 7월 1일 군정 법령 제88호 위반으로 정간당했다. 민청중앙선전부는 이는“민주청년의 치명상이며 청년의 사회적 역할을 부인하는 소위”라고 주장하면서 하루 빨리 발간을 허가하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62)
남아 있는 지면 가운데 8월 15일자(제41호)부터는 편집 겸 주간 발행인 김용일, 정리위원 유택하(柳宅夏), 인쇄인 이대홍(李大弘)으로 되어 있다. 주간으로 발행된 이 신문도 해방일보와 논조가 같았다. 이승만과 김구를“히로히토(裕仁)와 도조(東條)의 재현”으로 표현한 민전의 담화를 싣고, 같은 지면에 박헌영의「반동두목의 고립화만이 공위(共委)속개, 독립을 촉진」(46.6.13)을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정판사 위폐사건의 해명과 함께 자신들에게 불리한 보도를 하는 신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해방일보가 폐간된 뒤 좌익지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3사 사원일동은 하지 중장에게 사옥점거 해제, 정간처분 철회, 피검 사원 석방을 요망하는 서한을 발송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방일보를 발행하던 인쇄시설은 천주교 서울교구 유지재단이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사옥과 공장을 인수받아 경향신문을 창간했다. 사장은 양기섭(梁基涉), 부사장 윤형중(尹亨重), 주간 정지용(鄭芝溶), 편집국장 염상섭(廉尙燮)으로 1946년 10월 6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경향신문 창간 직전인 9월 24일 좌익은 남조선 철도 총파업을 일으켰다. 이에 호응하여 출판노동조합은 관하 33분회에 파업지령을 내렸고, 서울 시내 각 신문사 종업원들도 9월 25일부터 동정파업에 들어가 26일부터는 1주일간이나 신문 발행이 중단되는 초유의 암흑사태가 벌어졌다. 출판노조의 파업은 10월 2일 종식되어 신문이 속간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대구에서는 좌익세력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계엄령이 선포되어 영남일보, 대구시보 등이 자연 휴간되었다.

 

3) 부정기 벽신문 건국
또 하나의 남로당 기관지「건국」은 1946년 7월 9일 창간되었다. 해방일보가 폐간된 후 남로당은 당원 강중학(姜仲鶴)이 등록만 해두었던 주간신문을 발행한 것이다. 발행 편집인 겸 인쇄인 강중학, 주간은 김광수(金光洙)로, 타블로이드 2페이지의 주간발행으로 제호 앞에‘벽신문’임을 표기하였다.63) 발행소는 서울 종로 2가 40번지였다. 김광수는 전라도 대지주의 아들로 유명한 공산주의자 김철수의 동생이다. 그는 일제시대에는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낸 경력을 지녔다. 1933년 5월부터 조선일보 오사카 지국장에 임명되었다가`64) 1936년 8월에는 본사 영업국장, 9월부터는 광고국장을 겸임했고, 1938년 7월에는 인쇄부장을 겸했다가 8월 퇴사한 후 고무 공장을 경영했다.
김광수는 광복 후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로 활약하면서 건국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현재 실물을 볼 수 없으나 당시 여러 신문에 보도된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일간’이라는 기사도 있고(동아일보, 조선인민보, 46.7.17,「 인사」란),‘ 주간’또는‘벽신문’이라고 보도한 경우도 있는데 부정기로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정판사 위폐사건의 제1차 공판이 열리는 날인 7월 29일 공산당 관계자를 석방할 것과 공개재판의 탈을 쓴 음모를 분쇄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린「건국」‘호외’가 시내 각처에 배포되었다.65) 검찰은 이 호외가 군정을 비난하고 재판관을 모욕했다는 등의 5가지 혐의로 8월 21일 김광수를 구속하여 기소했다.66) 11월 11일 재판부는 김광수에게 신문지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광수는 이듬해 위폐사건으로 구속 중인 이관술을 찬양하는 글을 노력 인민 7월 2일자에 실어 또다시 구속되었다. 그는 노력인민 제1면 칼럼「인민의 지도자」란에「민족해방 이외에 무사심(無私心) 혈투 일관의 이관술(李觀述) 선생」을 집필하면서 이관술을 구적(仇敵) 일본과 과감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싸워온 애국투사로 묘사하고“이관술 선생에게 민족적 영예는 드리지 못할 망정 허무한 사건을 날조하여 일제 이상의 박해를 가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이 선생은 철창에서 모든 활동의 자유를 강탈당하고 있거니와 오히려 이같은 진실한 애국자요 또 진실한 군자가 박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적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하는 좋은 증거가 되어 있는 것으로 이러한 점으로서도 조선인민에게 위대한 교훈과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김광수는 이 글이 나간 후 7월 21일자로 발행된 건국 부록 제29호와 관련해서 포고 제2호와 광무신문지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건국 부록 발행과 노력인민 7월 2일자에 실린 위의 글 2가지가 문제되었는데 구속이유 2가지가 모두 위조지폐 사건과 관련있었던 것이다.
김광수가 구속될 때 민전 사무국장 홍증식과 민전 조사부장 오영(吳英)도 구속되었다. 김광수는 건국의 주간이면서 민전의 상임위원이었기 때문에 민전의 핵심 3명이 구속된 것이다. 김광수와 함께 구속된 홍증식의 혐의는 남조선과도정부 처장회의의 성명을 반박하는 담화를 노력인민에 게재한 것이 포고령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노력인민 8월 2일자에는「친일 한민당 계열의 준동이 공위(共委) 난관의 진원임」이라는‘민전 담화’가 실렸는데 이 글이 문제된 것이다. 홍증식은 9월 18일 무죄언도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경찰은 즉시 그를 다시 검속하였다.
김광수의 재판은 이듬해 4월 종결되었으나 이 판결은 광무신문지법이 유효한가라는 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1심 재판은 9월 15일 열렸는데 김광수는 노력인민에 실린 글은 자신의 명의로 발표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집필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다만 정치적인 책임은 지겠다고 말했다. 건국의 호외 기사 내용 가운데 허위로 인정되는 부분에 관해서도 자신이 주간 자리를 떠난 후 일어난 일이므로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67) 11월 11일 서울지방법원은 김광수에게 신문지법 위반으로 금고 10월을 언도했다. 김광수는 이에 불복 상고했는데, 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 4월 7일 서울고등심리원(판사 金又說)은 원심을 파기하고 포고 제2호 위반으로 벌금 3만원형을 선고하였다. 광무신문지법은 통감부 시대인 광무 11년 7월 제정된 것으로 8·15 직후 미군이 진주하여 공포한 미군정 포고 제1호에 따라 폐기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 법을 적용한 것은 유죄가 될 수 없다는 판결 요지였다. 이 판결에 대해 검찰총장 이인(李仁)은 광무신문지 법은 아직 존속한다고 주장하면서 대법원에 비상상고했다. 대법원은 5월 21일 김광수 사건을 계기로 야기된 광무신문지법에 관한 논쟁에서 이 법은 아직 존속하고 있다는 최종판결을 내렸다.68) 이 법은 그후 1953년 국회에서 정식으로 폐기되었다.
건국은 격문과 같은 선동적인 기사를 실었다. 당시 북조선 임시위원회에서 발표한「노동법령」을 대대적으로 환영한다는 등 북조선 찬양기사와 모스크바 발신의 공산당 선전문 등을 중점 게재하였고, 호를 거듭하면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기사가 급증하였다. 7월 15일자 제7호에는「대중은 반동신문의 허위보도에 속지 마라」는 제목 아래“동아일보와 대동신문이 악질적 모략으로 거짓말을 보도하는 반동신문이란 증거가 또 하나 폭로되었다”는등의 기사를 실었다.69) 김광수는 1948년 9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에 남조선 대의원의 일원으로 참석했고, 북한의 상업성 부상을 지냈으나 1953년 종파분자라는 죄명으로 숙청당했다.

 

4)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
해방일보가 폐간된 후 9월 6일에는 조선인민보도 발행정지 처분을 당해서 실질적인 폐간상태였기 때문에 남로당은 1946년 12월 7일 기관지「노력인민」을 발행하기로 결의하였다.70) 해가 바뀐 이듬해 1월 8일에는 자본금 1000만원의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일간으로 발행한다는 계획으로 주식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공산당에게 새로운 신문사 창립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간된 지 오래지 않은 대중신보(大衆新報; 1947. 3. 21 창간, 발행 겸 편집인 金容南)의 영업권을 인수하여 제호를 노력인민으로 바꾸었다. 대중신보는 6월 11일부터 새로운 발행인 허헌(許憲)과 편집인 이상호가 판권에 기재되고 원래 발행인이었던 김용남은 인쇄인으로 남았다. 이리하여 6월 19일자로 노력인민이 창간되었다. 지령은 창간 제1호와 대중신보의 지령을 통산하여 제77호를 함께 기재하였다.
발행인은 홍남표(洪南杓), 주필 조두원(趙斗元), 편집국장 이상호(李相昊), 편집국 차장 정진섭(鄭鎭燮), 영업국장 김용남, 발행소는 서울 종로 2가 완영(完永) 빌딩이었고 타블로이드 2면 발행이었다. 허헌은 창간사에서 “조선인민의 정확한 이목”“조선인민의 진실한 대변자”“조선인민의 친절한 교양자가 되며 조직자”가 될 것을 기약하였다. 박헌영은「창간에 제하야」를 실었고, 사장 홍남표는 이튿날「취임에 제하야」를 실었다. 허헌은 남로당 위원장이었고 일제시대에는 동아일보 취체역을 지냈던 변호사였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의장에 선출되고,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내는 등 북한 고위요직을 맡게 되는 인물이다. 동아일보 여기자였던 허정숙은 그의 딸이다. 사장 홍남표는 1925년 4월 홍명희가 시대일보 사장이 되었을 때 비서부장이 되었다가 곧 지방부장을 맡았다. 1926년 10월 30일자 시대일보 기사로 인한 필화사건으로 일시 구속된 일도 있었다. 이 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1926년 9월 중국공산당에도 입당했다가 1930년 상해에서 복역했다.
1946년 11월 남로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는데 월북 후 허헌과 함께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57년 8월 동 제2기 대의원과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편집국장 이상호는 대구 출생으로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공부했고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중앙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였다. 광복후에는 중앙신문(45.11.1) 편집국장이었는데 1946년 9월 6일 중앙신문이 조선인민보, 현대일보와 함께 발행정지당할 때 구속되었다가 13일 일단 석방되었으나 9월 26일 재판에 회부되어 1년 6개월 체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하지 중장의 특명으로 집행이 유예되어 석방되었다.71) 그후 남로당이 대중신보를 인수하여 허헌이 발행인이 되었을 때 이상호는 편집인을 맡았다가 이 신문이 노력인민으로 바뀌면서 편집국장에 취임했으나 8월 2일자로 퇴사했다. 그후 월북,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문화선전성 출판국장을 지냈다.
이상호의 후임 편집국장은 윤형식(尹亨植)이었다. 그는 8월 2일 이상호가 퇴사하면서 편집국장이 되었다.72) 그는 후에 북한에서 재정성 부상을 지냈다. 주련(朱鍊·사회부장)과 강병도(姜炳度·조사부장)가 근무했다는 당시 신문기사도 있고,73) 1947년 8월에는 인쇄인 김용남과 함께 이재성(李載性)이 구속된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74) 이들도 이 신문에 관계되었던 것 같다.
유원식(북한 중앙당 사회부 차장), 정진섭(북한 농민신문 부주필)도 있었다.75) 노력인민은 박헌영을 최고의 영도자로 높이 받들고, 김일성에 대해서도 「김일성 장군 밑에 단결, 면목일신한 민주 북조선」(47.8.2)으로 칭송하면서 우익진영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임화는 창간호에「박헌영 선생이시어 노력인민이 나옵니다」라는 헌시를 실었다. 그는 박헌영을 향해 “노력인민은`/`당신의 모습`/`노력인민은`/`당신의 음성”이라고 찬양하면서 이 신문을 박헌영의 분신으로 묘사했다. 이 신문은 구호와 성명서 등으로 지면을 장식했던 해방일보와 비교하면 편집은 다소 차분했고, 일반 신문과 체`제가 비슷했다.
1948년 4월 12일자 노력인민은 제1면 전체를「인민들에 고함」이라는 박헌영의 논문과「박헌영 선생의 인민에 고함에 대하야 우리 당은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라는 주장으로 메우고 있다. 1면 전부가 단 2건의 논문인데 2면은 1면에서 소화 못한 박의 논문이 계속되고, 또한「남조선 암흑상은 이렇다」는 논문으로 좌파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이 유엔 한국위원단에 보낸 의견서를 실었다. 1, 2면이 단 3건의 논문으로 채워진 것이다.76) 미소공위를 매일 대서특필하고 우익진영의 정강정책에 맹렬한 공격을 가했는데「소위‘입법의원’의 공위(共委) 답신안을 비판함」(조두원, 47.6.29~7.3 4회 연재),「 한민-한독`-`독촉(獨促)을 해체/이승만`-`김구를 추방하라」(6.28)는 민전의 성명을 싣는 등으로 우익진영을 비난했다. 또「장덕수론」(李西男, 6.27),「 김성수론」(皮悳鐘, 6.29,7. 1, 2회 연재) 같은 기명 기사와 함께「친일파 집단 한민당 계열의 반탁투위가 공위(共委)에서 제외되어야 민주임정이 수립된다」(8.12)는 구호를 내걸고 한민당과 동아일보에 관련자를 인신공격하고 매도했다. 「이승만, 김구, 김성수 등 테로단 수괴를 추방하고 테로집단을 즉각 해체하라!」(8.13)는 구호를 1면 중앙에 현수막처럼 큰 글자로 편집했다. 반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1면 중앙에「인민의 지도자」라는 고정란을 두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77) 이 고정란은 1년 전 조선인민보가 연재했던「지도자 군상」과 같은 성격이었다.
미 – 소 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1947년 8월 11일 하지 중장이 공산주의의 불법화를 선언하면서 노력인민은 이동편집을 해가면서 8월 15일까지 발행을 계속하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지하로 잠복하여 비밀리에 발행되었다.
1948년 9월 30일에는 서울 중학동 54번지 강만희(姜晩熙)의 집 지하실에서 노력인민을 비밀리에 인쇄하고 있던 이석만(李錫萬·23)을 종로경찰서 형사가 체포하고 인쇄기를 압수하였고, 12월 9일에는 경찰이 노력인민수천부와 원고 인쇄기 등을 압수하고 책임자 김주영(金周榮) 등 3명을 체포한 사건도 있었다.78) 1949년 5월 21일에는 이 신문을 발행하다가 국가보안법 혐의로 염형순(廉衡淳)과 김재준(金在準)이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1949년 7월에는 서울 관철동과 서대문 등지에 배달되는 어떤 신문에 노력인민이 삽입되어 배포된 일도 있었고, 7월 20일 남로당이 파업을 획책하였을 때는 파업이 성공했을 경우를 상정하는 기사를 게재한 신문을 인쇄했던 박두성(朴斗星) 등 7명을 경찰이 체포했다.79)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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