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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몽골 교류와 문화 비교

주제발표자 :
성비락 몽골국립대학교 외국어문화대학 한국학과장
개최일 :
2008.08.31
조회수 :
10,054
첨부파일

<해외 세미나>


주제:한국·­몽골 교류와 문화 비교

일시:2008년 8월 31일 08시 30분

장소:몽골 선진그랜드호텔


주제발표:성비락 몽골국립대학교 외국어문화대학 한국학과장 

사회:김형민 관훈클럽 총무

토론:참석자


김형민 관훈클럽 총무(사회):관훈클럽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해외세미나를 무사히 시작할 수 있게 돼 다행스럽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해외문화유적답사에서 뵙게 된 선배님들 너무나 반갑고요, 또 우리 선배님들과 동반해주신 사모님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몽골에 도착해서 첫 공식일정이 한국과 몽골 두 나라 간에 상호 이해를 높이자는 취지의 ‘한국­몽골 교류와 문화 비교’라는 제목의 세미나입니다.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에 예상치 않은 기상악화로 어려워진 상황에서 호텔까지 바꿔가면서 일정을 잘 짜주신 여행사 측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세미나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순서로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이사장이신 문창극 중앙일보 주필께서 인사말씀을 하시겠습니다. 


문창극(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이사장):1년 만에 얼굴을 뵙는 분들이 많아서 반갑습니다. 역시 우리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려고 많은 분들이 그저께 공항까지 나오셨다가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관훈클럽의 해외세미나와 문화유적답사는 항상 추억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일정도 하루가 줄었으니까 이런 것 빼고 오늘 아침부터 답사를 가자’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역시 관훈클럽은 연구친목단체이다 보니 연구를 뺄 수 없는 것 같아요. ‘연구단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루하지 않게 잘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논문을 보니까 성비락 교수님께서 아주 준비를 잘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익한 세미나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대 측에서 여러 가지로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이번 여행이 조금도 불편함이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선배님들, 동료들 모시고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 회:최근 몽골에 오시는 분들이 굉장히 늘었다고 들었고, 몽골에 대한 한국에서의 관심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언론계에 계셨던 고도원 씨가 ‘아침편지’를 꾸려가고 있는데 몇 년 전부터 그 회원들이 매년 여러 차례 나누어서 수백 명씩 다녀간다는 얘기도 들었고, 우리 관훈클럽 회원이기도 한 김종래 씨가 《CEO 칭기스칸》 등 여러 권의 책으로 몽골에 대한 이해를 상당히 높이고 있습니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은 우리와 더욱더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만 아직은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세미나가 몽골에 일고 있는 한류 등을 통해 좋은 여건이 조성되고 있는 양국관계를 더 잘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제발표를 해주실 성비락 교수님을 소개하기 전에 제 옆자리에 있는 관훈클럽 임원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서기를 맡고 있는 이목희 서울신문 편집국 부국장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손태규 단국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를 소개합니다. 손 교수는 지금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문창극 중앙일보 주필께서 성비락 교수님의 논문을 읽어보시고 준비가 잘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어제 미리 읽어봤는데 한국과 몽골의 교류사가 참 뿌리 깊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양국이 서로 얽혀 있으며, 몽골에 대해서 모르던 부분도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부분을 오늘 잘 말씀해주실 성비락 교수님을 소개합니다. 성 교수님은 몽골국립대학교 국제관계대학  한국학과를 졸업하시고 현재 그 대학의 한국학과 학과장으로 계십니다. 2005년에 서울대학교에서 국어교육학과 교육학 박사를 받으셨는데 교육학뿐만 아니라 문화사 쪽에도 상당히 공부가 깊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 교수님을 박수로 환영해 주시죠.


성비락 몽골국립대학교 교수:방금 소개받은 성비락이고요, 이것은 제 한국이름입니다. 몽골이름은 생비렉(Sainbilegt)이라고 합니다. 발음이 좀 어려워서 한국이름이 있습니다. ‘성’씨를 땄어요. 혹시 여기 저와 같은 ‘성’씨인 분이 있으면 반갑고요. 이렇게 많은 분이 몽골에 관심을 갖고 오신 모습을 뵈니 정말 부럽습니다. 오시느라 많이 고생하셨죠? 몽골에 오실 때 바람 때문에 비행기가 못 떴잖아요. 제주도는 바람, 여자, 돌로 유명하죠. 몽골은 바람으로 유명해요. 특히 봄에는 바람 때문에 비행기가 거의 못 떠요. 그래도 몽골 항공사들은 잘 뜨는데 대한항공은 잘 못 뜨더라고요. 제가 듣기로는 바람이 제일 잔잔할 때가 밤이래요. 그래서 밤 시간을 이용해서 많이 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주 어려웠나 봐요.

남남북녀라서 몽골에는 예쁜 여자가 많아요. 그런데 날씨가 좀 변덕스럽고 건조하고 또 추우니까 피부가 쉽게 상하고 쉽게 늙습니다. 그런데 튼튼하고 여자로서 매력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한국분들이 몽골 여자랑 많이 결혼합니다. 몽골 여자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공산주의 때 여자의 권력이 많이 신장되어서 지금 몽골 여자들이 좀 세다고 그래요. 남편도 때려요. 막 때리는 여자도 많고, 가장 역할을 하는 여자도 많습니다. 그리고 한국 여자들과 얼굴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동남아 여자보다 우리가 한국분들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제 논문 뒤쪽에 국제결혼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논문 내용을 중간중간 짚어보면서 발표를 해 나가겠습니다.


 

 

       한국·몽골 교류와 문화 비교

 

1990년 때 초기 필자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고생을 많이 한 나라젊은 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하는 나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몽골과 한국인과의 공·사적인 자리에서 몽고반점을 공유한다든가, 얼굴이 아시아 다른 나라 사람보다 제일 닮았다든가, 이러저러한 언어 풍속이 서로 유사하다는 등 얘기를 수없이 듣곤 했다. 이런 얘기들은 1990년 이후부터 접촉하기 시작한 두 나라 국민들의 호기심을 끌고 서로에 대한 친근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이 같은 피상적인 얘기들은 사실 서론에 불과했고 아직도 본론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물론 지금까지 연구에 매진해온 학자들 덕에 양국 교류관계의 참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긴 하나 앞으로도 할 일이 엄청 많다. 과거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는 눈이 열리듯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역사적 인식이 높아져야 하며, 과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사고를 토대로 양국의 이해관계를 도울 수 있는 미래지향적 발전방향이 설립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우리 두 나라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다방면의 협력관계를 확대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지금까지 이뤄진 연구 성과 및 사업을 분석하며 잘 이해하는 것이 향후 사업계획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논의하고자 한다. 

 

▪ 몽골과 한국의 교류 연구사

▪ 양국 문화의 이해

 

 

몽골과 한국의 교류 연구사

1) 기원에 대한 연구사 동향

주채혁(1996),[1] 베 수미야바타르(1975)[2]의 관련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주채혁(1996) 90년 이래로 수집된 관련 구비전승 사료와 문헌사료 및 고올리 성읍터 답사, 발굴 결과를 기반으로 몽골과 한국의 기원 문제에 관해 () 고올리() 고올리로 집약되는 가설을 제시했다. 반면 수미야바타르(1975)는 주로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하여 음성적, 의미적 유사성에 기대어 어휘비교를 통해 한국과 몽골의 조상이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다는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강신, 1996:312).[3]

 

2) 중세 관계 연구사 동향

<고려사>에는 995년 유학생 10명을 거란에 파견하여 몽골어를 배우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한국과 몽골 간에 이뤄진 문화적 교류의 최초 기록이다. 고려 신종 때 예수게이의 맏아들 테무친이 인근의 군소 족속을 정복하고 내외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세력을 넓혀 갔다. 테무친은 1206년 쿠릴타이라는 대회에서 대칸으로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라고 칭해졌고 그 뒤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는 대몽골제국의 황제가 되었다.[4]

몽골 사신 저고여 암살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몽골 장군 살리타이가 고종 18(1231) 1차 침입을 하였다. 이로부터 몽골은 여러 가지 형태로 고려에 영향을 끼쳤는데 원나라가 멸망하는 1368년까지 약 137년간 많은 문화교류가 이뤄진다.

이 시대의 사료나 관련기록은 고려 말이나 조선왕조 초기에 이뤄진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 사서와 <익제난고> <원감록> 등 문집과 <박통사> <노걸대> <용비어천가> <동문선> <동국병감> 등에서 그 역사적 사료를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 몽골과 고려 시대 연구의 개척자인 고병익(1949)원대 사회와 이슬람교도” “원대의 법제(1953)” “여대정동행성의 연구(1961)” “고려 충선왕의 원무종 옹립(1962)”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몽원사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논문들이다. 이외에 김상기(1964)이익재의 재원, 생애에 대하여”, 이용범(1962, 1964) 의 기황후의 책립 문제와 원대 라마교의 고려 전래에 대한 논문, 김종원(1969)원대 몽고 국자감과 태학에 대하여라는 중요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1970년대 들어 주채혁(1974, 1979), 남상긍(1977), 전해종(1978), 정인재(1979), 오정애(1979), 고병익(1973, 1977) 등 논문이 나왔으며 1980년대에는 남상긍(1980, 1983), 정하현(1981), 손현숙(1983), 이개석(1982), 유재성(1986), 고창석(1984, 1985), 김양섭(1989) 등이 있다. 1990년대 들어 이개석(1991, 1995), 전순동(1991), 권중달(1991), 최소자(1992), 김위현(1994), 김충렬(1993) 등의 논문도 발표되어 이제 몽골과 고려 시대 연구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고 있다[한국에서의 몽골학 연구 부분은 최기호(1996) 참조.[5]

몽골에서는 베 수미야바타르(1992),[6] 베 수미야바타르(1996),[7] 베 하과(1995),[8] 체 달라이(1998),[9] 게 에르덴치멕[10]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베 수미야바타르(1992)는 중세 몽·한 관련 문헌자료를 정리하여 출간했으며 수미야바타르(1996)에서 고려를 중세 몽골 사료의 규장각으로 보면서 경진 6(1280) 10월 원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한 군법(軍法)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베 하과(1995)는 이전의 연구들이 주로 정치적 측면에 치우쳐 왔음을 지적하고 이 시기의 양국간 관계는 단순히 두 나라 간의 11 관계에서가 아니라 당시 형성되었던 몽골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몽골제국과 고려, 원과 고려 사이의 포괄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보아야 하며 고려가 처해 있던 당시의 국내상황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체 달라이(1998)에서 몽골인들이 기원전 400년쯤부터 설렁거스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고 독립·자주국가 입장에서 양국이 서로 교류해 왔다고 했으며 고대 몽· 교류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인 쿨테긴 비석의 한국관련 기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중세 몽·한 교류를 몽골제국 시대(1206-1260), 원나라 시대(1260-1308)로 구분하였는데 당시의 시대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칭기즈칸이 건국한 몽골제국이 고려와의 교류를 확대해 감에 따라 고려인이 몽골의 수도 하르허룸에 와서 몽골 유목생활을 경험하며, 몽골 도시건설에 참여했다. 이는 원나라 시대의 교류와는 성격이 다르다. 원나라 때 양국 교류는 어떤 면에서 중국과 고려의 교류로 변질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통치정책과 관계 있다.”  

게 에르덴치멕(1999)은 원나라와 고려 왕실 간에 맺은 혼인관계와 몽골 공주들에 대한 연구를 하여 학위논문으로 발표했다.

 

3) 현대 교류 연구사 동향

몽골과 한반도는 아득한 태곳적부터 연이어진 땅이었으며 역사의 진전에 따라 사람의 왕래와 문물교류가 끊임없이 있었으나 명나라, 청나라 통치시대부터 1990년도까지 양국관계가 거의 단절상태에 있었다. 그동안 몽골은 200년간의 청조 강점기와 1921-1980년말까지의 소련의 억압과 공산주의 이념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던 반면 한국은 1910-1945년까지의 일본강점기와 미·소 양군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 양 진영간의 분리 대립투쟁으로 인해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약소국가로서 겪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양국간 다소 왕래가 있었던 것이 최근 문헌자료를 통해 알려지고 있다. 제 바트터르(1998)[11]를 보면 1910년대 몽골에서 어떤 무명작가가 <대한제국 멸망사>라는 책을 번역해 놓았는데 인명, 지명, 도시명, 국명, 직책명 등 고유명사를 중국식 발음을 따서 만주문자로 표기했으며 나머지는 몽골문자를 이용해서 썼다. 그 내용은 일본에 불법강점된 이후의 조선의 역사, 즉 양국간 체결한 조약 및 조약 서명식에 참여한 일본인과 한국인의 역할과 활동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 책에 이어서 나온 소책자가 <망국의 눈물>이다. 이 두 책을 합친 총 페이지 수가 50장 남짓하다. <망국의 눈물>에는 조선이 어떻게 하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가 서술돼 있는데 바트터르 학자는 키릴문자 번역문 뒤에 몽골 위구르 문자 원문과 라틴 전사를 첨부하여 출간하였다.

또 바트터르(2000)[12]에서 1910-1930년대 몽·한 교류사를 다루었는데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두 나라가 위치하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국제관계 특징 및 세력균형, 지역국가들의 역사적 이익관계 형성과정을 설명했다. 후반부에서는 1910-1930년대 양국 교류에 관한 문서보관소 사료들을 정리해서 소개했다. 거기에는 당시 3천여 명의 조선인이 몽골 정부에 귀화를 청원하고 농사 허가를 요청한 자료, 몽골 정부가 기근에 처한 조선인들을 위해 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정한 문서, 김유식, 요우현, 김책 등 독립운동가들의 방몽에 대한 자료, 이태준 의사에 관한 자료가 수록되었다.

동 저서 2권에서는 남북한 분단과정 및 몽골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의 수교 또는 교류 증진을 다루었다. 따라서 몽골인민공화국의 6·25 참전, 그것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평가를 구체적인 사료를 통해 설명했으며 전후 북한의 상황이나 북한에서의 주체사상 형성과정에 대하여 논증했다.

다음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신상균·하이상대(2003)[13]의 저서다. 이 책의 내용은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국제적 환경이 조성되는 것과 지역간 협력관계의 주요인, 발전방향과 전망을 제시하고, 양국의 협력관계 현황 및 향후 발전방향을 지역국가들의 공동 이익 관계와 관련시키는 것, 두만강 유역 발전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양국의 참여 의의를 평가하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특히 양국 경제는 상호 보완성이 크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교류 과정의 주방향을 구체적인 통계자료에 근거해서 제시했다.

·몽 교류사 관련 소논문으로는 권영순(1996),[14] 엔 소드놈촉(2000),[15] 윤순재(2000),[16] 테 남질(2000),[17] 제 바트터르(2000),[18] 바트터르(2002)[19] 등이 있다.

권영순(2000)에서는 초대 주몽골 대사였던 그가 1990년 수교 이전이나 이후에 벌어졌던 몽골과 한국의 정치 및 경제 상황을 상세하게 전개했으며 차후 공동 학술연구와 협력관계의 틀을 마련하는 데 공헌했다.[20]

윤순재(2000)는 한·몽 민간교류 과정을 1기 탐색기(1978년 스포츠 교류~1990년 외교 수립), 2기 준비기(1990 3월 외교 수립~1995년 직항로 개설), 3기 성장기(1995년 직항로 개설~1999김대중 대통령 방몽), 4기 확대기(1999김대중 대통령 방문~현재)로 나누었으며 향후 민간교류에 대한 전망을 경제와 스포츠, 종교, 교육 및 학술 분야별로 제시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몽골과 한국의 교류가 다만 문헌사료 조사로만 끝나지 않고 몽골과 제주도의 돌하르방 비교연구라든가 몽골 동부지역 한·몽 합동 학술조사로 확대되면서 한·몽 학자들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이외에 양 언어문화와 생활풍습 비교연구들이 꽤 있는데, 다음 장에서 다루도록 한다.

 

양국 문화의 이해

1) 양국 문화의 특징

세계화 물결이 온 인류를 휩쓸면서 여러 민족과 언어간에 끊임없는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때 각 문화와 언어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짐으로써 현대사회에서는 문화 의사소통 능력(cultural communication competence)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중 한반도와 몽골 간의 관련성에 있어 인류학, 민족학, 고고학, 언어학, 민속학, 고생물학 등 다각적인 연구를 통하여 많은 부분이 해명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몽골 민족은 서로 유사점이 많은 데다가 차이점도 많아 이중적인 감정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친근하게 대하면서도 서로 융합하지 못하는 문화적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기원은 같지만 오랜 세월 동안 분리되어 다른 생활패턴을 이뤄 살면서 형성된 이질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두 민족의 특징이 무엇이며 어떤 면에서 이질감이 생기는지는 <1>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사회 문화의 특징

몽골 사회 문화의 특징

1

세계 제일의 단일민족국가

한국도 결코 순수한 민족이라고 볼 수 없지만 오랜 역사를 통하여 한국인으로 완전히 융화됨.

-인종문제가 없는 나라, 중국 화교가 자리 잡지 못한 나라, 같은 문화와 풍습-

전 국민이 단결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고, 엄청난 잠재력을 지님(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등).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나라

18개 종족으로 구분. 할하몽골, 카자흐, 브리야트. 그러나 사회주의 영향으로 비교적 평온함을 유지함. 종족간 갈등으로 아픈 과거도 있음. 몽골사람은 비교적 공존의 원리를 잘 앎.

2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국가

강대국 틈에 끼여 오랫동안 살아남은 강인함, 은근과 끈기,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함.

두 강대국 사이에서 80년간 독립 유지

외교에 있어 최고수준. 개인 외교도 잘함.

3

자원이 빈약한 나라

2/3가 산지이며 세계최고의 인구밀도. 인구 6천만 이상 되는 국가 중 가장 자원이 빈약-만성적 가난.

경쟁이 치열한 사회구조

유치원에서부터 직장까지. 최대의 경쟁력을 지닌 일본과 미국을 대상으로 치열한 경제전쟁을 하는 개발도상국은 한국밖에 없다.

풍부한 자원 보유

성장잠재력이 크다. 석유, , 석탄, 구리, 몰리브덴 등. 넓은 땅,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

경쟁이 별로 없는 사회

악착같이 할 필요가 없다. 웬만큼 하면 최고가 된다.

4

세계 제일의 유교국가

뭐든지 한국에만 오면 지독해진다.

기독교, 유교, 불교 등. 유교는 철저하게 발달. 가부장주의, 남녀차별.

전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라마불교 국가

종교성에 대해서는 미지수, 여성의 권리 신장.

5

가족관계가 가장 강한 나라

광고문안을 보라-손님을 가족처럼, ○○가족 모집 . 가족과 집안은 신성영역-신경 꺼, 집안일이야, 집안일을 등한히 해서 되겠어? 지역주의 사고, 족보, 효 강조, 제사, 윗사람, 아랫사람-수직관계 형성, 장남·아들 선호사상.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나라

작은 사회규모-250. 지방색, 사회주의 영향으로 가족관계는 많이 파괴되었지만 인간관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얼굴을 알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6

세계최고의 교육열을 가진 민족

과부집 대들보를 뽑아서라도 등록금은 대야지! 경제성장에 필요한 인력(경영인, 기술자, 관리 등)의 공급을 가능케 함 (일본, 대만, 한국의 공통점). 높은 교육열은 사회를 평등하게 만든다신분상승의 현실적인 통로, 사회를 활력 있게 만든다-경쟁은 더욱 치열.

적극적인 민족

보스 기질이 매우 강하고 남의 밑에 있기를 싫어한다. 아이든 여자든 매우 적극적이다(사회성이 발달한 나라). 외래문화에 대해 매우 수용적이다(문화적 수용성). 몽골민족은 우수하다. 웬만하면 3개국 언어를 구사한다.

7

각종 문화가 복합된 나라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영향, 현대사에서 일본의 직접통치, 해방 후 미국 문화의 영향.

비빔밥 문화(중국, 일본, 미국, 한국). 약혼식 옷차림-전통 함들이-서양식 결혼식-전통 폐백-서양식 신혼여행-전통식 신행. 비교적 동양적이란 평을 받는다.

동서양이 공존하는 나라

러시아의 직접영향하에 70년 생활. 중국의 영향(200년간 청나라의 식민지).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으로 전망. 동서양의 의식구조가 복합-차강사르와 신질(망년회). 얼굴은 동양인인데 서양사람처럼 산다.

8

종교가 복잡한 나라

종교가 많은데도 지배종교가 없다(기독교, 유교, 불교, 가톨릭, 샤머니즘). 그러나 종교분쟁이 없다.

종교가 단순하다

사회주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종교에 반감. 전통 불교에 대한 우호감. 신앙적 이중성(쉽게 수용하지만 실생활은).

9

무조건 균등사상이 강하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차지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는 분위기(같은 사람인데 왜 차별이야! 협상이 깨지는 제일 큰 원인-차별한다더라).

누구보다 독립심이 강하다

유목사회 분위기. 말 몇 마리 끌고 나가 새 삶을 시작한다. 안되면 양이나 치지 뭐. 균등사상이 강하다(사회주의 영향).

10

인간관계, 체면, 현재 중시

음식값을 서로 내겠다고 다툼. 유교의 현세주의 영향. 가무를 즐김(노래방 등).건강에 각별한 신경(보약이라면 남아나는 것이 없다). 주식의 순서, 근검절약이 미덕, 직업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 정신 노동 중시.

인간관계, 체면 문화, 현재 중시

허례허식이 강하다(의식주 순서). 입는 것은 어느 나라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긴 여름휴가. 월급이 얼마 안 되는데도 펑펑 쓴다. 직업차별이 없다. 육체노동 중시.

11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

선진국 문턱에서 오락가락.

유목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 중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향하고 있다.

12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시장개방 경제로 전환기

수입 대체산업에서 내수시장 확대, 기본적인 공산품 자급, 수출 위주의 경제성장 정책, 악착 같은 나라, 부지런한 나라(부지런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전

원조 위주의 경제, 사회주의 국제 분업 붕괴로 인한 물자부족 현상. 네 것도 없고 내 것도 없다.

13

한반도(바다/육지)-사실상 섬나라

문화적 폐쇄성, 쫓기는 생활분위기, 바쁜 것이 미덕. 생활환경이 아늑하다. 온순, 다정, 섬세.

대륙적 기질, 바다가 없다!

여유만만, 시간관념이 낮다.

생활환경 열악(혹독한 추위, 건조 등).


<1>송병락 교수(서울대)가 쓴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에 나온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자료를 기초로 하여 윤순재(2006)가 몽골 사회와 비교한 것이다. 이 표를 기초로 한국과 몽골 민족의 특징과 차이점을 어느 정도 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이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 서로 보완하며 배울 점은 배워서 더 강인한 민족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한국인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하는 것이 우리가 배울 점이고, 우리의 여유만만한 성격을 한국인이 배워 나가면 많을 일을 성취할 것으로 기대된다.

 

2) 몽골에서의 한류현상

몽골에서의 한류현상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금까지 나온 주요 논문을 소개하면 스 몽흐자르갈(2005),[21] 이안나(2006),[22] 테 몽흐체첵 (2006)[23] 정도다. 스 몽흐자르갈(2005)은 몽골에서의 한류현상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은 내리고 있다.

 

몽골에서의 한류현상은 문화적인 부분에서부터 상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문화적인 가치관 면에서 보면 한류는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제고하고 양국 상호간 이해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기타 한류 문화 상품이 주목받고 있는 아시아국가들처럼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같은 아시아 문화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류는 다만 대중문화 상품을 수출하는 수준을 넘어 부대적인 효과로서 한국상품 수출 등 경제적 파급효과가 크게 나타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 효과가 대단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화장품, 의류, 가전제품, 식품 및 자동차, 휴대폰 등 다양한 품목에서 한국제품의 품질에 대한 만족감과 한국제품 전체에 대한 구매욕 상승효과가 뚜렷하게 보인다. 사회면에서도 생활패턴을 변화시키는 음식문화, 외국어 습득 등 영향도 작지 않다.

 

또한 이 논문에서는 현지인 18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분석결과를 제시하고 있는데, 한류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전체적으로 꼽고 있었고 한류를 주도하는 분야는 역시 영화나 TV드라마로 분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행사, 즉 한일월드컵으로 인해 한국에 대한 이미지와 관심이 높아졌다는 응답자도 많았다.

이안나(2005)에서는 한류현상이 문화교류에서도 일어나 전통 민속예술공연이나 미술, 스포츠, 패션계 등에서 다양한 교류가 진행되고 있음을 언급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립국악원과 몽골의 전통민속예술단이 협연한 ·몽 전통민속공연’ ‘·몽 전통복식 패션쇼 및 국제학술대회’, 친선 씨름대회나 태권도 경기, 아주 최근에는 국악인과 예술인이 대거 참여하는 나라음악잔치인 초원의 영고 대회라는 명칭의 예술대잔치가 몽골에서 열렸다. 또 정부나 지역 간의 다양한 교류에 따라 울란바토르에 서울의 거리’ ‘남양주의 거리가 생겨나고 곧 부산의 거리가 조성된다는 소식도 있다.

이렇듯 한국의 경제발전과 한국의 독특한 문화, 한국 상품, 그리고 친근하면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현지 한국인의 모습에서 몽골에서의 한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형성되어 가는 반면 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에서 나오는 폭력조직배들의 지나친 행동, 세상 물질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부자들, 또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기수법들이 무분별하게 유입될 경우 몽골 사회에 상당히 안 좋은 분위기가 조성되며 차후 양국 정부나 민간교류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몽골에서의 한류현상의 지속성을 놓고 논의할 때 다음과 같은 관점을 유념해야 한다.

첫째, 세계 모든 언어문화에 있어 우위의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몽골에서의 한류현상도 한국에서 몽골로전개되는 일방적인 방식보다 쌍방의 교류관계에서 인식되며 확대발전되는 것이 타당하다. , 고려시대 때 몽골풍이 일어나며 몽골학이 성하게 되었고[24] 몽골 공주들이 한국에 시집오면서 양국관계가 거의 어머니 나라수준으로 가까워졌다면 21세기 들어 한국붐이 일어나면서 또 한번 우리 두 나라 관계를 두텁게 하고 있다.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세월 동안 크고 작은 교류가 양국 왕실에서부터 일반국민들 간에 있어 왔기 때문에 오늘의 관계도 남다르고 광범위하게 맺어지며 언어, 문화, 경제, 정치 등 다방면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몽골에서의 한류만큼 광범하지는 못하지만 몽골 문화가 한국에 소개되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가령 남양주시의 몽골문화원, 광진구에 있는 울란바토르시 문화센터를 비롯해서 2006년 만들어진 화성시 몽골문화체험장 등을 예로 들 수 있다(이안나, 2006:287).

둘째, 양국간의 이해관계를 도우며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교류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몽골인이 한국을 좋아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경제적인 생활환경이 열악한 현 사정을 틈타 무차별적인 지원이나 투자를 할 경우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몽골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최근 들어 중국인 운영 식당을 침범한 사건과 일본국제협력단(JAICA)의 한 일본단원을 살해한 사건이 터지면서 주몽골 외국인 신변보호에 주의하고 신변조사를 하라는 명령이 각 공공기관 장들을 통해 내려졌다.

셋째, 지금까지 겉으로만 좋아라 했던 관계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우호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이안나(2006)[25]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급문화에 속하는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양국 문화교류 유지 및 지속에 매우 필요한 요소다. 한국인들이 부지런한 성격에 기술과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몽골 문화에 대한 안내 소책이나 일련의 연구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의 고급문화 소개는 소수 전문가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한 후속적인 지원과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3) 국제결혼 문제  

최근 5년 내 한국인과 결혼한 몽골인 수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이는 외국인과 결혼하는 한국인 수가 증가하는 것과 직접 연관된 문제다. 김이선(2006)[26]에 따르면 한국인 남성과의 결혼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여성은 2006 4월 현재 55,408명으로 이 가운데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 출신이 63.2%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베트남, 필리핀,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출신이 20.3%를 차지하였다.

                         중국계 한국인 42.5%

                         중국 20.75

                         동남아시아 20.3%

                         일본 8.5%

                         기타 7.9%

<그림 1>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출신지역 분포(2006. 4. 현재)

 

한국과 몽골 두 나라가 이제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활발히 교류하고 있으며 그 관계가 국제결혼까지 뻗어가면서 양국 국민을 더 가깝게 만들고 있다. 결혼이란 개인 권리가 최대한 존중되며 누구나 다 논할 수 없는 영역인 반면 문제발생시 두 당사자들의 범위를 벗어나 일가친척 및 사회문제로도 번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경향이 있으나 본고에서는 양국 문화 이해 차원에서만 간단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현재 몽골법상 결혼금지 대상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정하고 있다. 18세 미만의 남녀 근친 고아의 경우 후견인과의 결혼 입양부모와 피입양자의 결혼 정신이상자. 따라서 영리를 목적으로 한 중매결혼은 금지되어 있으나 두 당사자의 자의적 승낙에 의해 이뤄지는 결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2> 1998-2006 8월까지 접수된 한국인과의 국제결혼 건수를 보여준다.[27] 

 

연도

접수 건수

국적이 몽골인 경우

남자

여자

1998

8

-

8

1999

14

2

12

2000

39

-

39

2001

64

4

60

2002

182

5

177

2003

348

4

344

2004

493

11

482

2005

542

6

536

2006

276

3

273

합계

1966

35

1931

 

                                               

                                                   <2> 국제결혼 접수현황

 

주몽골 한국대사관이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2006 5월 기준으로 총 1,387(27, 1360)이 한국비자를 발급받아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2>의 결혼신청 건수와 비교해 보았을 때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본고에서 관심을 갖고 살펴본 부분은 국제결혼한 이들의 동반가족인데, 현재로는 177(78, 99)이 방문동거 목적으로 한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엄마, 아빠를 따라 한국에 간 아이들의 수치인데[28] 어린아이보다 사춘기 학생일수록 한국 사회 적응력이 떨어지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보면 위 수치도 적지 않은 것이다.

백정자(2004)[29]에서는 한국과 몽골의 전통 가족제도를 비교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몽골과 한국의 가족제도와 관련된 가정교육의 공통점에서 보면 두 나라의 전통가족제도는 동양의 가부장적인 대가족제도로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러나 비슷한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한국인의 생활 속에는 정착생활의 안정과 질서가 가장 중요한 지각의 준거가 된다면 몽골인의 생활 속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유목인의 끊임없는 도전의식,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한 신속한 포기, 자연과의 일치된 삶, 다시 말하면 전통 대가족이라는 같은 테두리 안에서의 삶이지만 제도에 얽매인 삶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삶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상속이나 재산분배에 있어서도 한국과 몽골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 한국은 유교의 영향으로 장남이 부모를 모시며 부모 사후 제사를 모신다는 이유로 장남이 부모의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면, 몽골에서는 장남이나 다른 아들들은 장성하여 결혼하면 부모의 집에서 분가하여 일가를 이루고 마지막으로 태어난 막내아들이 부모의 뒤를 계승하여 대가족을 상속받게 된다.

몽골의 전통가정의 부자관계와 부부관계는 한국 전통가정의 폐쇄적이고 억압된 남녀 격리현상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고 평등하고 자유스러운 면을 찾아볼 수 있다. 지배와 복종의 종적 관계가 아닌 평등과 존중의 관계로 집 안팎에서는 질서를 유지한다.

 

현재 한국에 가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언어와 문화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결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과적으로 양국 가족제도와 교육제도, 서로의 기대치 차이로 인해 어려움이 닥칠 때 제일 피해가 가는 것은 역시 아이들이다. 특히 아이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지 않도록 도와야 하며 국제결혼한 학부모를 위주로 전문상담소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앞으로 이 아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오면서

 

그간 양 국가원수와 장관급의 상호 방문이 여러 차례 있었고, 산업연수생을 공식 파견하며 투자와 지원 액수가 늘어나는 가운데 민간단체간의 친선관계도 더욱 두터워져 왔다. 이제 서로의 문화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게 되었고 대인관계의 기본틀이 잡혔다. 이것은 양국 수교 이후 지난 15년 동안 누적된 지식과 경험인 것이다. 앞으로 이렇게 잘 다져진 밑거름을 바탕으로 지역간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며 동북아시아, 동아시아 지역간의 공동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는 사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지금의 세계화 시대는 하나를 아는 것보다 두세 개를 아는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몽 교류와 협력 방향을 이끌어가며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데 이에 양국 지도자들의 몫이 크다. 그리고 상호 보완적 경제발전 모델을 세우고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며 아시아인의 기를 보여주는 21세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주목적이 되기를 바란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몽 교류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지금까지 양적 교류현황을 많이 논했다면 앞으로는 질적 연구를 병행해야 양국간 이해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류이라든가 한·몽 국제결혼 문제도 좀 있으면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앞으로 더 전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논하는 것이 필요하다.

 

양국의 교류 발전을 위한 과제

 

지역 및 공동체간의 공동연구와 협력사업 확대가 필요하다.

지식과 정보화 물결이 거세진 이 시대에 2개 이상 공동체간의 합동연구와 사업 확대가 요구된다. 인터넷을 설치하거나 정보를 공유하며 교수 및 학생 교환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협력관계를 확대해 가야 한다. 그중 동북아시아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교수진과 연구자들의 합동연구를 분야별로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국제관계나 정치, 경제, 역사, 어문학, 문화의 자료조사 및 학술회의 개최, 교재 개발 등을 고려할 만하다.

   

서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앞서 다루었듯이 양국 교류사를 통해 지금까지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로는 양국의 교류관계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단계에 만족하여 주저앉을 수는 없다. 서로의 문화를 더욱더 이해하며 사회 각층, 각 분야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돈독히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그간 쌓였던 양국 문화에 대한 오해를 풀고 나쁜 이미지를 수정해 감으로써 이전보다 많은 일이 실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③지역전문가를 체계적으로 길러야 한다.

이것은 ①번 과제와 연관 있지만 우리 관계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제자를 잘 길러야 한다. 현재로는 한국 유학 희망자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몽골에 유학 오는 외국학생 수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1] 주채혁(1996), 몽골과 한국의 기원, ·몽골 교류 천년, 몽골교류협회, 13-26.

[2] 베 수미야바타르(1975), 몽골과 한국 민족의 기원, 언어적 상관성에 대한 문제, 몽골과학아카데미 언어연구소, 울란바토르.

[3] 강신(1996), 몽골의 한국학 연구, ·몽골 교류 천년, 몽골교류협회, 311-321.

[4] 칭기즈칸은 20여년 만에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했던 면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넓은 대제국을 건설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와 타임 지는 20세기를 마감하면서 칭기즈칸을 지난 1000년 동안의 가장 위대한 인물인 밀레니엄 맨으로 뽑았다.

칭기즈칸(1162-1227)

770만 ㎢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

348만 ㎢

히틀러(1889-1945)

219만 ㎢

나폴레옹(1769-1821)

115만 ㎢

                    출처:김종래밀레니엄 맨 칭기즈칸 참조.

[5] 최기호(1996), 한국의 몽골학 연구, ·몽골 교류 천년, 몽골교류협회, 291-310.

[6] 베 수미야바타르(1992), 중세 몽·한 관계사, 서울.

[7] 베 수미야바타르(1996),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 한∙몽골 교류 천년, 45-61.

[8] 베 하과(1995), 13-14세기·한 관계의 특징과 상호 영향의 흔적,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학위논문, 울란바토르.

[9] 체 달라이(1998), 고대 몽·한 교류, 몽골과학아카데미, 동북아연구센터.

[10] 게 에르덴치멕(1999), 13-14세기 몽골과 고려 왕실 혼인관계에 대한 연구, 몽골국립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1] 제 바트터르(1998), '대한제국의 역사'라는 소책의 원문 연구.

[12] 제 바트터르(2000), 20세기 몽·한 교류(1910-1930) 1, 2.

[13] 신상균·하이상대(2003), 한·몽 교류와 협력관계(1990-2002), 과학아카데미, 국제연구원.

[14] 권영순(1996), 몽골과 한국의 기원, ·몽골 교류 천년, 몽골교류협회, 62-80.

[15] 엔 소드놈촉(2000), 몽·한 무역 경제 협력 활동에 대하여, 몽·한 수교 10년 기념 학술회의 논문집, 몽골국립대학교 한국학과, 51-57.

[16] 윤순재(2000), ·몽 민간협력 현황과 전망, 몽·한 수교 10년 기념 학술회의 논문집, 몽골국립대학교 한국학과, 58-67.

[17] 테 남질(2000), ·몽 가족제도 고찰, 몽·한 수교 10년 기념 학술회의 논문집, 몽골국립대학교 한국학과, 67-73.

[18] 제 바트터르(2000), 한국전쟁 당시 몽골과 북한 관계에 대하여, 몽·한 수교 10년 기념 학술회의 논문집, 몽골국립대학교 한국학과, 39-44.

[19] 제 바트터르(2002), 보그트칸께 보내온 한국인들의 서신에 대하여, ·몽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24-30.

[20] 이 내용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2년간 몽골에서 근무하면서 과거 30년간의 외교관 생활 중에 다른 나라에서 느껴보지 못한 친근감이랄까 몽골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몽골을 떠나기 전에 몽골 과학아카데미와 한국의 학자들을 연결하여 공동 학술조사단을 구성, 10개년 계획으로 동부 몽골지역을 다각적으로 조사키로 하였다. 고고학자 손보기 교수님을 단장으로 한 10여 명의 한국측 조사단은 해마다 동부 몽골지역을 답사하고 있으며, 1994년부터는 고구려 성터 유적을 발굴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1] 스 몽흐자르갈(2005), 몽골에서의 한류현상의 배경과 그 성격, 서울대학교 국제학과 석사학위 논문.

[22] 이안나(2006), 몽골에서의 한류와 발전방안, The Development and Continuation of the Korean wave of culture(hanlyu) in East Asia, International Symposium for Korea, Mongolia and Japan Octocentenary anniversary of the Mongol Empire, 동아시아일본학회, 285-288.

 

[24] 이러한 두 나라의 문화교류에서 자연스럽게 문물이 오고 갔으며 차용어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몽골에는 고려양(高麗樣)이 생겼고 고려에는 몽고풍(蒙古風) 많이 나타나서 문화교류의 단면을 보여주게 되었다. 한편 고려에는 몽골학이 성하게 되어 한학(漢學), 청학(淸學), 왜학(倭學)과 함께 사학(四學)을 이루었다. (최기호, 1996:295)

[25] 최근 전 세계의 문화, 예술, 건축,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큰 영향을 미쳐온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벽을 무너뜨리고 통합적인 문화형태를 지향하지만 고급문화에 속하는 정신적 가치는 새로운 한류개념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안나(2006:288)

[26] 김이선(2006), 다문화가족의 언어소통 현실과 한국사회의 과제, 한글창제 560돌 기념 국제심포지엄, 문학의 집, 47-54.

[27] 몽골 시민등록청(호적업무 전담기구)에서 제공한 2006 8월 통계자료.

[28] 이번 조사에서 방문동거 목적으로 한국에 간 이들의 연령별 조사는 하지 못했음.

[29] 백정자(2004), 몽골과 한국의 가정풍습과 가정교육, 몽골 울란바토르대학교 몽한연구소, 192-194.

 

사 회:시간에 쫓겨서 발표를 서둘러 마무리하셨는데 3박5일 일정이 2박4일이 되면서 일정이 좀 단축됐습니다. 그래서 세미나도 아침 일찍 시작해서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짧고 콤팩트하게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30분 정도 주제발표자인 성비락 교수님과 대화식으로 세미나를 이어 가겠습니다. 궁금한 점이 많으실 텐데 질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재희(전 노동부 장관):성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성 교수님이 한국에서도 오래 계셨으니까 한국의 발전과정을 여러 가지 보셨을 텐데 몽골의 앞으로의 발전에 있어 한국의 발전과정에서 모방해야 할 면과 몽골은 한국과는 다르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을 한국 경험에서 느끼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비락:제가 한국에 5년 정도 살았고, 단기간으로 왔다 갔다 한 경우도 있었어요. 95년부터 한국을 왕래했어요. 그러니까 거의 13년 동안 왕래하면서 느낀 점이 많아요. 그중에서 저뿐만 아니라 다른 몽골사람들도 느낀 점을 제가 말씀드리면 첫 번째는 한국분들의 근면성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많은 몽골사람들이 한국인은 근면, 아주 부지런하다고 말합니다. 한국과 몽골을 비교했을 때 몽골사람들이 부지런하지 않다는 문제가 나오잖아요. 우리는 거의 70년 동안 사회주의 이념에 젖어 있어서 경쟁이 심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때도 엄청 일을 많이 하는 모범적인 사람들이 있었어요. 훈장도 받았어요. 지금 북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일을 많이 하면 훈장을 줘요. 그런 사람이 아주 소수이고 대부분은 그냥 8시간 동안 자기 할 것만 하고 끝내면 되거든요. 그런데 한국은 자본주의이다 보니 경쟁이 좀 많아요. 인구도 많으니까…. 한국분들은 아주 부지런하고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하고, ‘하면 된다, 뭔가 결과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 가서 일하는 몽골사람이 많은데 한국사람들의 부지런한 면을 많이 배우고 온 것 같아요. 또 일을 어떻게 하는지 일하는 방법을 많이 배우고 온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한국분들은 어른을 많이 존경하고 위계질서가 있다는 거예요.  한국어에서 높임말이 제일 어려워요. 상대에 따라서 내가 어떤 조사, 어미, 종결어미를 쓸 거냐가 달라지잖아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한국은 복잡해요. 그런데 몽골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우리 말도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높임말도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어요. 한국분들이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은 유교사상에서 나온 것 같아요. 한국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는 데 비해 우리는 그런 게 부족해요. 여기서는 두세 살 차이가 나도 동갑 취급을 해요. 그런데 한국은 하루 이틀 차이가 나도 거의 오빠, 형, 동생이 되잖아요. 이것도 우리에게 많은 차이점을 느끼게 해요. 한국분들이 나이 드신 분을 존경하는 마음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작은 일인 것 같지만 사회질서를 잡아주고 여러 가지 면에서 좋아요. 나이 드신 분을 존경하는 것은 한국의 좋은 점인데 요즘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남자와의 평등 권리를 주장하는 강한 몽골 여성과 비교하여 한국 여성은 남편을 너무 따르는 것 같고 너무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요. 그런데 한국에 오래 살다 보니까 한국분들이 그게 아니라고 말해요. 실제는 남편 말을 안 듣는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와 비교해 봤을 때 한국 여자들이 더 여성스러우며, 그런 점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봐요. 앞으로 한국분들의 그런 면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몽골사람은 한국인의 나쁜 점, 좋은 점 다 배우는 것 같아요. 어린애들이 부모의 나쁜 점, 좋은 점 다 배우듯이. 한국에서 데모하는 모습을 지금 몽골사람들이 잘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데모 못해요. 한국분들이 얼마나 질서 정돈을 잘하는지… 조직화시켜서 엄청 잘하는데 우리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08년 7월 1일 시위 사건이 났을 때 총을 쐈잖아요. 5명 정도 죽었어요. 우리는 아직도 변화가 덜 됐어요. 


남재희:배우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성비락:만날 배우러 나가는데 어떻게 해요? (웃음)


김건진(전 중앙일보 미주본부장):70년간 사회주의 체제로 지내서 그동안 한국보다 북한과 교류가 많았으리라 추정되지만 한국과 교류한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데 지금 몽골사람들의 남한에 대한 인식, 또 북한에 대한 인식을 구별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비락:그전에는 한국과 교류가 없었고 70년 동안 북한과 교류가 있었죠. 많이는 아니지만 6‧25 이후로는 좀 많이 활발해진 것 같고, 몽골사람들이 솔롱고스라고 하는 것도 주로 북한을 대상으로 말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자주 이런 말을 하는데 우리 생각으로는 솔롱고스라고 하면 코리안, 한국분들을 말하는데 군인들은 모르겠지만 일반시민들에게는 한국이 갈라져 있지 않아요. 그런데 한국분들의 머릿속에는 갈라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굳이 구분하면 북한, 남한으로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구분하면서 말하는 것이 별로 많지 않아요.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꼭 구분해야겠지만, 일반국민들은 남북이 나눠졌다는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솔롱고스라는 말이 주로 그전에 관계가 있었던 북한사람을 가리키긴 했지만 지금 그것이 또 여러분을 가리킬 수가 있어요. 다 통틀어서 말하는 거예요. 북한영화 〈꽃 파는 여자〉를 보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많아서 ‘왜 저렇게 슬픔이 많을까? 눈물을 쉽게 흘린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한국에서 들어오는 영화도 다 울어요. 특히 제일 신기한 것이 남자가 우는 거예요. 몽골에서는 ‘남자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많거든요. 울고 싶어도 별로 안 울어요. 그런데 한국분들이 툭하면 남자도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물어봐요. “한국 남자들이 그렇게 많이 울어요?” 우리 몽골사람들 인식에는 한국이 눈물을 많이 흘리는 나라라는 생각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나오고 있어요. 이것은 남북한 구별 없이 우리한테 똑같이 입력되는 부분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문제가 있어요. 북한사람들이 몽골이 한국과 가까이 지내니까 한동안 대사관도 철수해서 없었어요. 그랬다가 몇 년 전에 복귀했어요.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겁니다만, 북한에서 탈북자들이 몽골 국경을 통해서 많이 들어와요. 그 사람들의 말로는 중국군에게 잡히면 죽는다는 거죠. 그런데 운 좋게 몽골 국경에 있는 몽골인에게 잡히면 살게 되는 거죠. 그렇지만 몽골이 공개적으로 도와주기 어렵잖아요. 중국사람에게 넘겨주기도 어렵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국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도 정치적으로 공개적으로 하면 한국과 몽골, 북한, 중국 사이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라는 거죠. 몽골은 그런 면을 조금 도와주는 것 같아요. 몽골사람들 생각으로는 될 수 있으면 한국과 북한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있어요. 우리 입장은 미국, 일본과는 다르죠. 될 수 있으면 한국분들, 북한분들 모두 솔롱고스로 인식하고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한국과 북한 관계에 있어서 몽골을 잘 활용하면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유승삼(중앙선거관리위원):한국이 남과 북으로 갈려 있지만 북한주민이든 남한주민이든 통일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몽골의 경우는 지금 몽골공화국과 중국의 내몽골자치주로 갈라져 있는데 외부에서 보기에는 이 둘 사이에 한국사람들처럼 통일의식이 강렬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왜 그런지와,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두 나라랄까 두 지역을 통합하려는 강렬한 민족주의나 그런 게 구체적으로 있는지….


성비락:가령 분명히 한 부모에게서 나온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갈라져서 따로따로 살다가 다시 합쳐야 되는데,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거 알고 다시 합치려니까 예전의 순진한 마음이 없어지고 뭔가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혈통을 생각하는 것보다 앞서서 현재 나한테 이 사람이 얼마나 유익할까, 우리가 합치면 얼마나 잘나갈 수 있을까, 이것을 제일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몽골과 내몽골 문제도 그렇고, 북한과 한국 문제도 제가 보았을 땐 예전의 순진한 마음이 많이 없어지고 현재는 서로 이 사람과 합치면 우리가 얼마나 이익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 이것을 먼저 생각하니까 우리 내몽골과 외몽골이 합치는 문제도 어렵다고 말씀드릴 수 있죠. 왜냐?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합쳐봤자 잘나갈 것이 없고 오히려 중국과 같이 가는 게 유익하다는 판단이 서면 그렇게 갈 수밖에 없죠.  물론 그분들이 때로는 감동을 받고 형제애 그런 것이 속에서 움직일 때는 ‘아, 우리는 형제다’ 하며 울고불고 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잠시입니다. 앞으로는 한국도 사람의 내면적인 문제가 쉽지 않겠죠. 생각이 사람을 지배한다고 보면 지금 내몽골사람들도 그 생각의 지배를 받아서 중국을 따라가는 게 맞다고 판단하면 그렇게 갈 수밖에 없고, ‘합치자, 우리 같이 가자’ 그런 움직임이 서로 별로 없어요.

그런데 최근에 한국과 몽골의 국가연합에 대한 가설이 나오고 있어요. 몽골과 한국, 그렇게 되면 좋겠죠. 더 강해지고 좋아질 거예요. 그렇지만 이것도 역시 이익관계에서 비롯된 거니까 아주 지혜롭게 가지 않으면 서로 많은 상처를 주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한국분들도 지금 밖에서 볼 때 흥분해서 하는 것 같잖아요. 이명박 대통령도 미국 쪽으로 쏠리는 것 같고. 그런데 그것들을 따져보면 미국을 좋아해서 따르는 게 아니고 뭔가 그 나라가 한국에 유익한 면이 있으니까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여러 나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저는 외교관도 아니고 국제학자도 아니라서 잘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냥 작은 학자로서 살펴보았을 때 그런 것이 눈에 많이 띄어요.


사 회:10시에 다음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서 9시 40분에 세미나를 마치려고 합니다. 앞으로 9분 정도 질문하실 시간이 남은 것 같습니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장):발표자께서 말을 많이 하셔서 제가 단답형으로 묻겠습니다. ‘잠’이 중국에서 쓰는 ‘참’ ‘역’이라는 뜻이죠. ‘정거장’이라는 뜻이에요. 그런 뜻으로 바뀌었다는데 인정하세요? 


성비락:아니요. 


정재도:그러면 한국에 옛날 역참제도 있었지요? 역참제도, 통신수단, 정보전달 수단. 그런데 그 원말이 몽골말 ‘잠’에서 왔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성비락: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정재도:그러니까 우리가 참을 먹는데, ‘새참’을 먹는데 그 ‘참’도 몽골말 ‘잠’에서 왔다고 합니다. 인정하십니까?


성비락:잘 모르겠습니다.


정재도:제주도에 돌하르방이 있습니다. 몽골말에 ‘하르방’이 있습니까?


성비락:돌하르방이 많고 그걸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한국 제주도에 있는 돌하르방과 몽골에 있는 돌하르방이 차이가 있다고 나왔어요.


정재도:있다 이 말이죠?


성비락:있어요. 많아요. 엄청 많아요. 그런데 차이가 있다고….


정재도:또 하나만 묻겠습니다.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는데 몽골말에 화산이라는 뜻의 ‘한라’라는 말이 있습니까?


성비락:뜨겁다는 뜻의 ‘하더’라는 말이 있어요.


정재도:그러니까 ‘한라’라는 말은 없다 이 말이죠?


성비락:‘한라’라는 말은 없고 ‘하더’, 그러니까 기본을 따서 ‘하하’ 이렇게 간 것 같아요.


이성춘(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장):몽골 관계는 아니고 몽골에 대해서 평소 관심이 있어서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10여 년 전 일본 재계 인사들하고 요미우리신문사가 앞장서서 칭기즈칸 무덤 발굴작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는데 그때 제가 자세히 보니까 몽골국민이 크게 반대했어요. 왜냐하면 두 가지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하나는 ‘우리 몽골민족은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무덤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칭기즈칸 같은 대황제가 돌아가셨을 때 무덤을 썼을 경우 파헤치고 도굴하는 불상사가 있기 때문에 아예 아무도 모르게 했는데 새삼스럽게 그것을 왜 찾느냐’ 하는 쪽하고, 다른 쪽은 ‘대몽골제국의 영광을 재현시키기 위해 발굴해야 한다. 어떻게 하든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은 상당한 논란 끝에 ‘파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커서 중단되었다는데 지금 몽골정부나 국민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성비락:그때 몽골사람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한국분들처럼 데모를 하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그런데 몽골사람들은 싫어했어요. 서로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 얘기들을 듣고서. 몽골사람들은 일본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죠. 몽골에 쳐들어온 적도 있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고 몽골을 지나가려고 연구하는 거다라는 얘기들을 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공식적으로 그런 명칭하에 그 일을 한 거죠. 그렇지만 어떤 데이터를 수집하고 어떻게 진행됐는지 공개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어요. 물론 비밀이겠죠.

몽골사람들의 생각은 그 무덤을 찾아야 된다는 의식이 없어요. 어떤 근거로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냐 하면 몽골사람들은 유목민이고 무덤을 파는 것과 지키는 것을 싫어해요. 한국 문화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 무덤을 지키잖아요. 그런데 몽골은 그렇지 않아요. 지난 5월에 우리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묻었어요. 묻고 49일 후에 가서 조금 잘 가꾸고 해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라마 계열 승려들이 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안 갔어요. 원래는 49일 후에 한 번쯤 가는데 그런 거 가지도 말라고 해서 안 갔어요. 듣기로는 거의 3년 동안 안 간대요. 거기에 부모님 맡긴 분들은. 한국인은 3년 동안 옆에서 지켜야 되잖아요. 몽골은 가지 말라는 거예요. 장례 문화에서도 엄청 다른 게 많아요. 이것은 사상적인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 두 민족 간에 차이점이 있을 수 있는데 그래서 칭기즈칸이 ‘죽은 다음에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해서 아예 무덤을 찾지 못하게 말로 엄청 멀리 달려서 못 찾게 했잖아요. 이것이 문헌으로 남아 있어요.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는데…. 그러니까 몽골사람들 의식 속에는 찾아야 된다는 게 없어요. 그런데 외국사람들이 찾아야 된다고 우리를 자극하니까 때론 진짜 찾아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하는데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는 그것을 찾아야 되나 하는 의문이 있어요. 지금 내몽골은 벌써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잖아요. 내몽골처럼 사업적으로는 그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 마음이 안 움직인단 말이에요. 생각도 안 움직이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사 회:말씀 잘 들었습니다. 성 교수님도 언급하셨지만 제가 몽골에 온다니까 한국과 몽골의 국가연합 얘기가 나오는 것 그대는 들었냐고 어느 분이 얘기하시더라고요. 참 조심스러운 얘기를 해서 제가 미리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만 그만큼 한국과 몽골 두 국가, 두 나라 사람이 같다는 인식이 굉장히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닮은 점을 찾아보는 질문­응답 시간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런 만큼 우리가 다른 점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앞으로 두 나라 관계, 문화를 소통하는 데 더 유익한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 세미나는 여러 가지로 참 훌륭한 자리였고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해주신 성 교수님께 마지막으로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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