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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눈에 비친 안중근 의사 의거

주제발표자 :
서명훈 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
개최일 :
2009.08.27
조회수 :
6,684
첨부파일

 

<관훈클럽 해외세미나>

주제:중국인 눈에 비친 안중근 의사 의거

주제발표:서명훈 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

 

일시:2009년 8월 27일(목) 오후 6시

장소:중국 하얼빈시 소피텔호텔

 

이목희(관훈클럽 총무, 사회):관훈클럽 해외세미나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제와 오늘 연일 강행군으로 피로하실 텐데 이렇게 세미나에 참석해주신 관훈클럽 선배님들과 사모님들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어제 여순감옥하고 여순법원을 가봤고, 오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을 가봤는데 현장 몇 곳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 의사의 위대함과 희생정신에 정말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오늘 관훈클럽 세미나의 주제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에 맞춰 ‘중국인 눈에 비친 안중근 의사 의거’로 정했습니다. 오늘 주제발표를 해주실 분은 20여년간 안중근 의사를 연구한 서명훈 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입니다. 서명훈 명예회장님은 안중근 의사 전문가로 잘 알려진 분으로 저희가 특별히 중국대사관에 의뢰해 모셨습니다. 현재 저희 나이로 79세이신데 지금도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굉장히 열심히 연구활동을 하시는 것 같아요.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 언론에 일부 인터뷰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미나의 주제발표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미리 보도자료를 만들어 돌렸더니 동아일보를 비롯해 몇 군데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그래서 관훈클럽 회원들이 해외에 나가서 정말 훌륭한 세미나를 갖는다는 것을 지금 국내에서도 아시는 분은 아실 겁니다. 서명훈 선생님을 소개해 드려야 하는데 구체적인 약력 소개는 시간관계상 생략하고 자료집 12쪽에 있는 약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제발표를 30여분 듣고 그 다음에 질의나 토론을 20~30분 하는 것으로 오늘 세미나를 진행하겠습니다. 서명훈 선생님께서 주제발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서명훈(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여러 선생님들이 하얼빈까지 오느라고 많은 고생들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저도 잘 모릅니다. 중국에도 사료가 별로 없고, 자료도 없고, 또 자율 연구기구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동안 연구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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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00년 전 한국의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한국과 중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중대한 역사 사건은 중국과 한국 두 나라 국민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공동투쟁의 서막이 되었고, 양국 국민의 유대를 강화시켰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는 해다. 당시 각국 신문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했다. 일본 신문들은 이토의 죽음을 애석해하고 경악하면서 전국적으로 깊이 추모하였고, 안중근 의사를 폭도라고 욕설했다. 프랑스의 각 신문은 이토의 인격과 공덕을 이구동성으로 찬양했다. 독일의 모든 신문은 이토를 크게 찬양하며 이토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시하였다. 영국의 여러 신문은 이토의 평생 공적을 많이 찬양했고, 다른 서유럽 각국 신문도 이토의 죽음에 동정을 표시하였다. 러시아 신문은 이토의 죽음에 경악과 슬픔이 가득한 보도를 했다.

한국의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대한민보 등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여순에서의 공판을 공정하게 보도했으나 당시 한국이 일본제국주의 통감정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드러내놓고 직설적,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보도를 할 수는 없었다. 오직 중국 신문만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객관적, 전면적으로 공정하게 보도했다. 중국 신문들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과 그 이후 체포 당시의 상황, 감옥생활, 재판 등을 자세히 보도했다. 특히 상하이에서 발행된 민우일보(民吁日報)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민우일보는 1909년 10월 27일부터 21일 동안 54개의 기사, 사설, 시사평론 등으로 집중보도했다. 27일자에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을 비롯한 4개의 기사, 이토의 만주여행 음모에 관한 2개의 기사, 이토는 누구인가에 관한 2개의 기사 등 8개의 기사가 2개면 전면에 걸쳐 실렸다. 민우일보의 이 같은 적극적인 보도는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돼 결국 1909년 11월 19일 민우일보는 폐간됐다.

중국 민중들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열정적으로 찬양했으며, 안중근의 애국정신과 동양평화에 대한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필자는 그때의 실정을 밝히기 위해 베이징, 상하이, 천전, 무한, 광주, 홍콩, 심양, 장춘 등 각지의 도서관과 문서보관소를 다니며 20여종의 신문‧잡지에 발표된 안중근 의거 관련 신문보도, 사설, 시사평론, 저명인사들의 제사(題詞), 문인들의 찬사, 안 의사의 전기, 이토 히로부미의 전기 등 400여편의 사료를 수집했다.

이 많은 사료를 읽노라면 중국인 마음속의 안중근 의사의 위인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본문에서는 사료의 주요내용에 따라 제목을 달고 중국인의 시각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재조명하려 한다.

 

중국 저명인사들의 안중근 평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열정적으로 지지하던 중국 민중들은 매우 슬퍼하고 격분했다. 중국의 신문과 잡지들은 수많은 글을 발표하여 안중근의 의거를 찬양하고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각계 인사들은 제사를 쓰고 시를 지으며 문장을 써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했으며, 여러 가지 형식으로 안 의사를 추념했다.

중국의 국부 손중산(孫中山)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제사를 써서 찬양했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으니 이등도 죄인되리

 

남경 정부 대통령이었던 장개석(蔣介石)은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장렬한 한생 천추에 빛나리’(壯烈千秋)라는 제사를 써주었고, 대만의 ‘중화민국’ 대통령이었던 장경국(蔣經國)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벽혈단심’(碧血丹心)이란 휘호를 써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원로의 한 사람인 주은래(周恩來) 총리는 “중일 갑오전쟁 후 중조 인민의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본세기 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중국 근대사의 저명한 정치가,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는 《추풍에 덩굴 끊어진다》(秋風断藤曲)에서 안중근은 해와 달처럼 영원할 것이며, 자기는 살아서 존경할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그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혀 동반해 주겠다며 우러르는 마음을 표현했는데,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폭풍이 야수마냥 울부짖고

싯누런 흙모래 대지를 휩쓸 때

흑룡강 연안에 눈보라 휘날리고

북국의 엄동설한 살을 에는데

그 사나이 지척에서 발포하니

정계의 거물이 피를 쏟았네

대사가 필하자 웃음소리 터지네

장하다 그 모습 해와 달마냥 빛나리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사마천이 안자를 추모하듯 그대를 경중하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내 무덤 의사의 무덤과 나란히 있으리

 

중국의 근대 민주혁명가, 사상가이자 저명한 학자인 장태염(章太炎)은 “아시아주 제일의협”(亞洲第一義俠)이란 제사를 써 안중근을 찬양했고, 안중근을 위하여 《안중근 송》(安君碑)을 집필했다. 그는 이토가 만주 시찰시 청나라 관리들의 비겁한 행위와 안중근이 체포된 후 기백이 의젓한 모습을 대조하여 “융희 2년 가을의 9월, 괴수 이토 히로부미가 요동반도를 지나가자 청나라의 총독 이하 관리들이 모두 개미떼처럼 몰려나와 길가에 엎드린 채 황제를 배알하듯 절을 했다. 안중근은 곧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쓸데없는 말이란 한마디도 없었고 오히려 그 기백이 의젓하여 천하에 알려지니 지사들은 더욱 감동되고 격분하였다”는 글을 썼다.

당시의 저명인사 주호(周浩)는 박은식의 저서 《안중근전》 서문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것은 다만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함만이 아니라 세계평화의 공적(公敵)을 없애버리기 위함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비단 한국의 공로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양의 공로자이며 세계의 공로자다”라고 찬양했다.

당시의 저명인사 한염(韓炎)은 《안중근전》 서문에서 “안중근은 삼한의 현인(賢人)이며 세계의 영웅이다”라고 평가했다.

당시의 저명인사 고관오(高冠吾)는 《안중근전》 서문에서 “중근의 기적은 족히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 귀신이라도 감동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안중근은 세계의 영웅호걸이다. 전송을 하나, 하지 않으나 그의 업적은 천고에 빛날 것이다”라고 썼다.

당시의 저명인사 증용(曾鏞)은 《안중근전》 서문에서 “특히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것은 나라의 치욕을 씻고 복수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기실은 세계의 공적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것은 실로 외인들의 야심적인 정책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안군이 중화민국에 기여한 공로가 어찌 작다고 할 수 있으랴”라고 찬양했다.

이로 보아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 안중근은 천추에 빛나는 민족영웅이며 세계에 공을 세운 위인이다.

 

이토는 중국과 한국 두 나라 공동의 적

 

중국 각지의 신문과 잡지의 시사평론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적이며 세계의 공적이라고 했다.

상하이 민우일보(民吁日報)는 1909년 10월 29일 사설 ‘이토 히로부미 통감 암살안건을 논함(2)’에서 “일본은 강제와 무력으로 우리 육군을 격파하고 우리 해군을 침몰시켰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10년 전 삼한의 한 뙈기 땅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골을 요동(遼東)의 덩굴 숲속에 남겼으며, 얼마나 많은 시체가 황해의 고기반찬이 되었던가”라고 지적했다.

이 원한에 사무친 역사는 잊을 수 없다. 일찍이 1885년 2월,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으로 중국 천진에 와서 ‘중일통상조약’을 체결했고, 1894년 8월 이토 히로부미는 중일 갑오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중국은 패전하고 일본이 승전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마관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은 대만과 팽호열도를 약탈 하였고(처음에는 요동반도까지 약탈하려 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반대하여 중국에 되돌려주었다.) 군비 배상금으로 은(銀) 2억냥을 빼앗아 갔으며 사시, 중경, 소주, 항주 4개 도시를 통상항구로 개방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선박들이 중국 내지 하천을 마음대로 운항할 수 있었고, 일본인이 중국땅에 공장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상하이 신주일보(神州日報)는 1909년 10월 28일 시사평론 ‘아아, 이토 히로부미여’에서 “이토는 중국과 매우 큰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친히 천진에 가서 이문중과 중일 통상조약을 맺은 후 침략세력을 확장하여 갑오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풍도(豊島)에서 중국 선박을 격침하였고, 고계(高階)에서 우리의 예리한 무기를 소각한 다음 파죽지세로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요동 연해를 점령하여 마관조약을 맺었다. 또한 이토는 중국을 분할하려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1904년 2월 이토 히로부미를 수상으로 한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9월 포츠머스협정을 맺고 대련, 여순을 중심으로 한 요동반도와 여순에서 장춘까지의 동청철도를 점령했다. 일본은 또 러시아 사할린도 북위 50도 이남을 점령했다.

이리하여 당시 남만은 일본 세력범위에 속하였고, 북만은 러시아 세력범위에 속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중국 동삼성을 서로 쟁탈하려고 대치상태에 있었다. 이런 형세에 대하여 한구중서보(漢口中西報)는 1909년 11월 29일 시사평론에서 “러시아인은 중국 만주에 침 흘린 지 오래이므로 일본인과 서로 먹이를 빼앗고 있다. 일본은 대외로 전승국의 불꽃이 남아 있고 대내로는 이토의 전략전술이 세워져 있기에 러시아인은 일본인을 무서워한다. 이토는 포악무도한 야심을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다”며 이토는 중국의 적이요, 세계의 공적임을 지적했다.

 

중국의 원수를 갚았다고 기뻐함

 

중국의 각 신문들은 한국의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소식을 재빨리 대서특필했다. 중국인들은 이토의 죽음을 통쾌히 여겨 환호해 마지않았다. 민우일보는 1909년 10월 29일 사설 ‘이토 히로부미 통감 암살안건을 논함(2)’에서 “고려의 원수는 우리의 원수다. 그들은 고려를 만주로 가는 무지개다리로 삼고 요동과 심양을 일본에 귀속시키려고 한다. 그래도 삼한에는 사람이 있어서 일본이 길게 내뻗은 팔다리를 꺾었다. 비록 한인이 자기의 원수를 갚았다고 하지만 역시 우리의 원수를 갚은 것이 아닌가. 우리의 행운이다”라고 기뻐했다.

여러 신문들은 소식보도의 제목에서부터 사설에 이르기까지 이토의 죽음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기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각 신문은 연속보도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격살했다” “총살했다” “찔러 죽였다” “폭사했다”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등 기쁜 심정을 나타내는 어구들을 썼다.

상하이 신주일보는 1909년 11월 1일 논설에서 “이토가 피살된 소식은 오대주를 진동시켰다. 언론계에서는 갑작스레 ‘이토가 죽었다’는 큰 음파를 일으켰다고 서술했으며 강권도적 이토가 저격당함으로써 나라 잃은 백성은 오늘 활개를 폈다”고 보도했다.

상하이 신보(申報)는 1909년 10월 27일 첫 보도에서 “이토가 탄알에 맞아 죽었다”는 몇 글자를 큰 활자로 찍어 보도했다. 그 후 신문보도(1909. 11. 9.)에서도 “오늘 일본인은 여순에서 이토를 총살한 자객을 신문했다”고 서술했다.

상하이 민우일보는 1909년 11월 6일 “하얼빈에서 고려인이 이토 히로부미 공작을 총살했다”고 보도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 약전〉(1909. 11. 2.) 첫마디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공작은 하얼빈이란 지방에서 고려인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고 서술했다.

상하이 신보는 첫 신문보도(1909. 10. 27.)에서 “오전 9시 기차에서 내린 일본의 이토 공작은 한국인이 연발한 총에 맞아 탄알이 머리를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고 보도했으며 “이토를 총살한 자객은 떳떳이 결박당했다”고 묘사했다.

신문보도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들의 제사나 찬사(贊詞)에도 흥분된 심정이 반영되었다. 양호의 전황(戰皇)은 ‘한국인 안중근의 의거에 느껴’란 글에서 “총알 한 방 날아와 심장을 맞출 적에 온 세상 소리치며 술잔을 기울였거니, 어허 그대 나라 천만 겨레 그대 뒤따라 일어날 사람 있을 것일세”라고 묘사했고,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 양계초도 ‘추풍에 덩굴 끊어진다’는 대형 시에서 “다섯 발자국에 피 솟구치게 하여 대사를 이루었으니 웃음소리 대지를 진감하누나. 장하다 그 모습,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렇게 이토의 죽음에 대한 기쁜 심정을 토로했다.

 

안중근 의사 의거의 정당성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것은 한국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것이요, 이토의 죽음은 한국을 침략한 대가다. 중국의 각 신문들은 안 의사는 의거 직후 체포되어 “나라의 원수를 갚았고, 나라의 치욕을 씻었다”고 기뻐했음을 보도했고, 여순법정 공판에서 의거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 유지에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상하이 민우일보는 1909년 10월 28일 사설 ‘이토 히로부미 통감 암살안건을 논함(1)’에서 “이토는 공작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추밀원을 위해 죽은 것도 아니다. 통감의 일로 해서 죽었다”고 했으며 “그가 다른 사람 손에 죽었으니 천하가 웃을 일이요, 가엾은 일이다. 세상에 제 손으로 타인의 사회를 망하게 한 자가 그곳에 가서 유람하며 제 평생을 누리도록 할 수 있겠는가? 손을 들어 벌판의 불을 가로막던 이토 히로부미 아닌가! 그도 제 몸을 황막한 벌판에 던졌으니 이것 또한 세상사람들의 웃음감이다. 그가 타국을 소멸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시원하다”고 했다.

천진 대공보(大公報)는 1909년 10월 28일 시사평론 ‘이토공이 피살된 소식을 들은 감상’에서 “정치사상이 보급되어서부터 전세계 나라 잃은 국민은 나라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을 씻으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되고 있다. 한국은 작은 나라로서 일본에 속한 후로 국민들은 그 누구나 일본과 맞서 싸우기에 매우 분주했다. 이 일로 하여 이번 이토공이 만주를 여행하고 하얼빈에 이르렀을 때 한국 국민의 사격을 받았다. 이 어찌 우리 동아의 역사에서 크게 기념할 천고의 기문이라 아니하겠는가”라고 보도했다.

상하이 시보(時報)는 1909년 10월 28일 사설 ‘이토 피살사건을 논함’에서 “한국인의 북받친 격분에 천하가 기운을 잃고 약소민족이 나라 망해 안생할 수 없었던 고통 끝에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개책(甘心一逞之策)이니 그 뜻 참으로 공경하는 바다”라고 했다.

안중근의 의거는 한국 의병투쟁의 계속이며 단지동맹의 실천이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법정 공판에서 “나는 한국의 의군 참모장으로 독립전쟁을 하는 중이고, 그 일환으로 이토를 포살했다”며 의병투쟁의 전쟁수단이었음을 주장했다.

상하이 민우일보는 1909년 10월 29일 사설 ‘이토 히로부미 통감 암살안건을 논함(2)’에서 “국제상에서 종족의 정치혁명이 다시 일어나는데 그들의 혁명군의 흥기가 어렵고 효과가 크지 않음을 검토하여 암살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므로 암살은 혁명군의 보충적인 방법으로 된 한 가지 기능이다”라고 했고, 1909년 10월 27일 시사평론 ‘이토가 피 흘린 만주’에서는 “이토의 죽음은 역시 전쟁터에서 죽은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천진 대공보는 “이토는 권총에 맞아 죽었으니 이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서막이라 하겠다”라고 보도(1910. 2. 1.)했다.

국제법에는 “조국의 독립을 지키고 그 존립을 유지코자 자위를 위하여 하는 전쟁은 국제법상 정당한 행위다”라고 규정되어 있으니 안중근의 의거도 정당한 행위로 취급되어야 한다. 홍콩 천주교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37주년에 안 의사가 독립전쟁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그의 애국심을 나타냈고 그리스도 교리를 위반하지 않은 정당방위라며 추도미사를 거행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

 

안중근 의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자이며, 동양평화를 위해 몸바친 평화전사다. 안중근이 법정에서 진술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악 가운데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가 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 유지에 있다. 이토를 사살한 것도 사적 원한에서가 아니라 그런 목적에서였다”고 재삼 진술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동양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하는 자리를 여순으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다”라고 썼다.

중국의 각 신문도 안중근이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고 있는 소식을 보도했다. 상하이에서 발행한 신보는 1910년 3월 11일 ‘안중근 감옥에서 저서’라는 제목으로 “듣건대 안씨는 지금 옥중에서 부지런히 저서하고 있는데 책이름은 동양평화라고 한다”고 보도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내용에 대하여 장춘에서 발행한 길장일보(吉長日報)는 1910년 3월 22일 “안중근은 사형언도를 받은 후 종일 앉아서 저서하고 있다. 그는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연합평화회의를 여순에 개설하고 큰 은행을 설립하여 3국의 공동화폐를 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주요 주장은 ▶일본은 주변국 침략을 중지할 것 ▶일본이 러일전쟁 때 점유한 대련, 여순을 중국에 돌려줄 것 ▶여순에 한, 중, 일 3국 대표로 구성되는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여 동양평화의 방책을 세우고 실천할 것 ▶여순에 은행을 설립하고 3국이 통용하는 화폐를 발행할 것 ▶한, 중, 일 3국의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여 여순항을 지킬 것 등 여순항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이와 같이 심도 있고 원경 있는 탁월한 평화사상을 발기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이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교수대에 올라서기 전 3분간 동양평화를 위하여 기도했으며 “동양평화를 힘써 지켜달라”는 임종유언을 남겼다. 상하이에서 발행된 신보는 1910년 3월 29일 ‘안중근의 임종지언’이란 제목의 글을 실어 “안중근은 어제 여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으니 이토를 사살한 지 150일 만이다. 안씨는 임종시 사형을 감시하는 각 관원들에게 동방의 평화를 이루기에 힘써 달라고 부탁했다”고 보도했다. 상하이의 신주일보, 장춘의 길장일보 등 각 신문도 이와 비슷한 안중근의 유언을 보도했다.

 

안중근의 인격을 찬미하다

 

중국 각지의 신문‧잡지는 소식보도와 평론에서 안중근 의사의 인격에 대하여 대단히 찬미했다. 안중근이 권총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사격할 때의 상황에 대해 홍콩 화자일보(華字日報)는 1909년 11월 9일 사설에서 “한국의 지사는 총을 쏘았다. 생명을 버리려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었기에 손이 안정되었다. 손이 안정되었기에 탄알마다 명중하였다”고 묘사했다. 상하이 시보는 1909년 11월 3일 소식보도에서 “이토를 사살한 한국인은 듣건대 매우 날쌔고 용감하다고 한다. 깜짝할 사이에 7발의 총알을 쏘았다”고 묘사했다. 상하이 신주일보는 1909년 11월 4일 “자객은 총을 쏜 다음 한국만세를 세 번 고창하고 나서 이토를 쏘아보았다. 그는 몸을 피하지 않고 태연한 기색으로 러시아 군대에 체포되었다”고 묘사했다. 베이징에서 발행한 정종애국보(正宗愛國報)도 1909년 10월 30일 “자객은 체포될 때 대한만세를 높이 불렀고,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안중근이 체포된 후 하얼빈역 내 헌병분파소에서 심문받을 때의 상황에 대해 상하이 신주일보는 1909년 11월 4일 “안중근은 포박된 후 러시아 검찰관 미하레푸의 심문을 받았다. 자객은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한국인이라 자칭하면서 오늘 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았고 불행한 한국동포의 원수를 갚았으니 다행이라며 기뻐했다”고 묘사했다. 시보는 1909년 11월 3일 “안중근은 러시아 경무국에 구인된 후 기색이 태연했다. 침착하고 두려움 없이 모든 언어, 행동이 평소와 다름없었다”고 묘사했다. 동방잡지(東方雜誌)는 제6권 11기 387쪽에서 “안중근은 체포된 후 러시아 관원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러시아인이 이토가 중상을 입어 죽었다고 알렸을 때 이 고려인은 곧 기뻐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해주신 덕택이라 찬송하였다”고 묘사했다.

안중근이 체포된 후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지하실 감옥의 옥중생활에 대하여 민우일보는 1909년 11월 14일 “안중근은 하얼빈 감옥에 처음 들어갔을 때 식사량이 매우 좋았고 잠든 다음 숨소리도 골랐다. 일본인은 그가 잘 먹고 잘 자니 이제는 만족한다고 말했다”고 묘사했다.

일본당국이 안중근을 여순감옥으로 이송할 때 일본 헌병 12명이 압송하면서 안중근을 묶어 기차에 밀어넣었다. 도중에서 일경의 학대를 받은 안중근은 일경과 날카롭게 맞서 싸웠다. 이 정황에 대하여 하문일보(厦門日報)는 1909년 11월 19일 자객 안중근이 기차 안에 있을 때 호송하는 일경을 보고 “내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지사의 천직이로다. 너희들이 나를 이와 같은 기차에 앉히다니 지사에게 너무나 무례하다”라고 꾸짖었다고 보도했다.

안중근의 여순감옥 투쟁상황에 대해 동방잡지는 제6권 12기 450쪽에서 “나에게 사람이 먹지 못할 거칠고 냄새나는 음식을 주다니 네놈들 무례하다. 이와 같이 박대하지 말고 나에게 대신의 예의를 갖춰주기 바란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압송되어 여순감옥에 이르는 상황에 대해 신보는 1909년 11월 28일 “역전 내외로부터 감옥에 이르기까지 거리 주변은 경계가 매우 삼엄했다. 안중근은 일경 수십 명의 호위하에 겁내는 기색이 전혀 없이 태연자약하고 힘차게 걸어갔다. 연루된 여러 사람들도 머리를 쳐들고 떳떳이 걸었고, 수심이 낀 자 하나도 없었다”고 묘사했다.

안중근이 법정에서 분노하여 이토의 죄악 15가지를 적발할 때의 상황에 대하여 동방잡지는 제7권 3기 21쪽에서 “안중근은 의기양양하게 삿대질하고 발을 구르며 정의감에 피 끓어 목소리 우렁차고 입과 코에서는 불을 토하며 이토를 나라의 정사를 어지럽게 하는 자라 질책했다”고 보도했다.

 

한국관‧한국인관의 개변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대한국만세’를 세 번 높이 불렀다. 안중근의 의거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징벌했고 한민족의 혼을 불러 깨웠으며, 한민족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세계에 과시했다. 이로 인하여 세인들의 한국관(韓國觀), 한국인관이 개변됐다.

정종애국보는 1909년 10월 28일 안중근 의거를 제일 먼저 보도한 소식에서 ‘한국에 인재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제목을 달았다. 천진에서 발행한 대공보는 1909년 11월 9일 ‘미래의 경고’라는 시사평론에서 “조선이란 나라는 망했다고 할지라도 조선의 인심은 죽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상하이 민우일보는 1909년 10월 30일 논설에서 “이토를 사살한 한국인은 체포될 때 ‘한국만세’를 연속 높이 외쳤으니 장하도다. 참으로 한국의 국민이로다”라고 한국 국민으로서의 안중근 의사를 찬양했다.

중국의 여러 신문은 한국에 안중근 같은 민족영웅이 나타났음을 부러워했다. 상하이 민우일보는 1909년 11월 7일 논설 ‘일대 영웅이 황토에 돌아가다’에서 “한국에 이런 인물이 있기에 한국은 망하지 않는다. 중국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면 오늘 같은 중국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무한에서 발행한 한구중서보는 1909년 10월 30일 시사평론에서 “아아, 한국에 인재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하얼빈에서 일본 이토공을 사살한 한국인은 ‘나는 대한국민, 대한국민, 대한국민’이라 외쳤다고 한다. 대한국국민, 이 다섯 자 외침을 듣고 어떤 감정이 생길까!”라고 보도했다.

중국공산당 창시자의 한 사람이자 초기 지도자였던 진독수(陳獨秀)는 1919년 3월 발행된 잡지 매주평론(每周評論) 제14기에 글을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높이 찬양하기를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성근하며 비장한 것이다. 무력이 아닌 민의로서의 정확한 관념을 세워 세계혁명사에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지적하고 나서 “조선사람들의 활동을 살펴보라! 무기가 없다 하여 반항하지 않고 주인공 자격을 버리고 제3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조선사람에 비하여 너무나 부끄럽다”고 했다.

 

중국인민들에게 일으킨 경성작용

 

중국의 많은 유지인사들은 안중근의 의거를 중국인민들에게 경성(警醒)작용을 일으킨 큰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안중근 의사를 중국 청년들이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로 삼고 있다.

베이징에서 발행한 정종애국보는 1909년 11월 1일 논설 ‘일본 이토 공작의 피살사건을 논함’에서 “청천벽력이 울리니 우리나라 사람들 꿈속에서 놀라 깨어났다”고 묘사했다. 장사의 정육이 집필한 《안중근전》 맺음말에는 “아, 우리 중국에 어찌 안 의사 같은 뜻과 의분을 가진 이가 없겠는가. 어찌 이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중국 청년들에게 깨우침을 주었다.

당시 안중근의 의거는 청나라 정부를 뒤집고 민국을 건립하려고 하는 민주혁명당인들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한다’(殺身成仁)의 본보기가 되었다. 지식인 라남산(羅南山)은 박은식 저 《안중근전》 서문에서 “우리 중국의 지사들은 ‘그 작은 한국에 일대 호걸이 나타났는데 유독 우리나라에 그런 인물이 없을 수 있으랴’ 하고 하면서 흥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사들이 황화강(黄花崗)을 피로 물들였고, 무창에서 봉기하여 우리 민족의 주권을 회복했다. 그렇다면 안씨의 의거가 우리에게 정신적인 도움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이것 역시 우리들이 감격해 마지않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라고 안중근의 의거가 신해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5‧4운동’ 전후, 안중근의 의거 내용을 소재로 삼은 화극이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중국의 현대 화극 활동가 임천지(任天知)는 1910년말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로 설립된 화극직업단체인 진화단에서 화극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을 창작하여 상하이, 무한, 장사 등에서 공연했다. 천진 남개학교에서도 화극 〈안중근〉을 공연했다. 이 극에서 등영초(鄧穎超)가 안중근 역을 맡았고, 주은래가 지도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주은래와 곽말약(郭沫若)의 지도하에 중국의 저명한 희극가 전한(田漢)이 이끄는 남사(南社)도 무한, 장사 등에서 안중근의 의거를 화극으로 공연하여 영웅을 구가하고 민중의 반일정서를 환기시켰다.

1931년 일본 침략자들이 ‘9‧18사변’을 일으켜 전 동북을 점령한 후 동북의 각 항일유격지구에서는 〈안중근 애도가〉가 널리 유행하였다. 동북항일연군 노전사 이민(李敏)은 이 노래를 ‘동북항일연군 가곡 선집’에 넣으면서 이조린(李兆麟) 장군이 심양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 이 노래를 청년들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국가위기에 처해 있던 중국은 안중근 의거로부터 일본 침략에 대항하려면 반드시 한국과 연합전선을 결성하여 공동 항일투쟁을 전개해야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성원하고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증용은 박은식 저 《안중근전》 서문에서 “오늘도 삼한의 지사들은 속속 중국으로 오고 있다. 우리는 정의를 받들어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앞으로 삼한 옛땅에 또 하나의 공화국을 건립하여 우리나라와 함께 동아에 일어서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안군의 공업(功業)에 보답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안군의 넋이 하늘에서 웃음짓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민우일보는 1909년 11월 13일 소식보도에서 “일본의 모 신문은 ‘우리나라는 이와 같은 큰 타격을 받았다. 오늘 이토 한 사람이 죽었지만 이후 700만 이토가 재생할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한국인을 대신하여 이 말을 이으련다. 한국은 안중근 한 사람이 죽었지만 이후 700만 안중근이 재생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700만 이토를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국의 항일투쟁을 성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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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회: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발로 뛰시면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시 발행된 20여종의 신문ㆍ잡지를 포함해서 400여편의 사료를 수집하셨다니까 하실 말씀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 걸 잘 알면서도 저희가 시간이 많지 않아 충분한 발표시간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시에는 중국 지도자와 인민 그리고 언론이 극찬했는데 이런 사료들이 정리되지 않고 있어 지금 중국에서 자꾸 잊혀 간다니까 매우 안타깝습니다. 서명훈 선생님이 그동안 해오신 작업이, 그리고 오늘 관훈클럽 토론회가 정말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안중근 의사를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선생님 주제발표를 듣고 질문이나 토론하실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선마이크가 준비돼 있습니다.

 

남재희(관훈클럽 회원):서명훈 선생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 저희가 질문이나 토의사항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에 앞서서 지금 연세가 80에 가까우시고 조선족으로서 흑룡강성에서 평생을 사셨는데 한국에서 온 언론인 일행을 맞으면서 평생을 만주에서 살아오신 인생의 어떤 감회랄지, 또 후배 동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 같은 것을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서명훈(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1898년 하얼빈에 도시가 건설되고 철도가 개설될 때부터 우리 동포들이 이주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는 의거를 할 때 하얼빈에 사는 우리 동포는 268명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우리 동포들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대단히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중근 의사는 우리 한국의 영웅에 머물지 않고 동양의 영웅, 나아가 세계의 영웅이라고 봅니다. 그런 것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알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가 정말 세계의 영웅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진국(관훈클럽 서기담당 운영위원):오늘 저희가 하얼빈역을 가봤는데요,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자리,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피격당한 자리에 조그맣게 표시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시에 대한 안내문이 전혀 없습니다.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유적지도 보존이 제대로 안 돼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다만 한국 정부에서 재단을 만들어서 보존을 위한 약간의 지원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광범위한 자료수집 등 놀라울 정도로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첫 번째 질문은 중국 내에서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어떤 기념행사나 기념관 건립 등 유적보존을 위한 지원 같은 것이 있는지 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선생님이 여러 가지 자료를 조사하셨는데 지금 선생님이 명예회장으로 있는 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는 어떤 단체이고 어느 정도 규모의 조직으로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지원을 하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서명훈:우리 하얼빈은 정치적으로 공산당시입니다. 하얼빈시와 시장은 안중근 의사를 아주 존경하고 안중근 의사 관련사업을 아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 안에 안중근전시관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조린공원에 안중근 의사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 기념단체나 연구단체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올해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여러 가지 행사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10월 21일 국제학술회의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사료를 묶어서 책을 출판합니다. 10월 25일 발행할 예정인데 중국어로 출판합니다. 그리고 10월 26일 국제적인 기념대회를 하는데 한국도 와서 같이 하게 됩니다.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일을 민간인들이 다 할 게 아니라 이제는 한국 정부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좀 섭섭한 감정이 있는데 제가 안중근 의사를 연구할 때 저를 도와준 분은 모두 중국인이었습니다. 저를 돕고자 하는 한국인은 하나도 없었어요.

 

사 회:선배님들 질문 다 끝난 다음에 저랑 같이 일하는 김진국 서기와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문화일보 이미숙 차장에게 질문권을 드리려고 생각했는데 김진국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먼저 하셨어요. 선배님들께서 계속 질문해 주시죠. 질문과 답변은 짧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종식(관훈클럽 회원):서명훈 선생님께서 예전 신문과 잡지를 일일이 조사해서 이렇게 논문을 발표하시는 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토론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서 한 가지만 질문드리겠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때 우리가 일본 영향하에 있었지만 그때 우리나라 신문이 있었습니다. 그 신문을 제가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어요. 그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어떤 기사가 있었냐 하면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대우가 좋지 않다며 일본 헌병들에게 “나를 일본의 대신급으로 대우해라. 나쁜 놈들!” 하고 호령했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나온 게 있어요. 그런데 지금 선생님 글을 보면 동방잡지에 비슷한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100년 전의 기사인데 그때는 무슨 출입기자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이 기사 소스가 어디였을까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어요. 그런데 동방잡지에 난 내용하고 당시 우리나라 신문에 짤막하게 났던 기사내용이 거의 일치합니다. 이 동방잡지라는 것이 그때 어디서 누가 발행하던 잡지인지 조사가 됐습니까?

 

서명훈:기사 소스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동방잡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이 다른 3가지 신문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신문에 났던 정보를 잡지가 그 후에 쓴 것 같아요.

 

안병찬(관훈클럽 회원):서 선생님의 주제발표문에 손중산과 주은래, 양계초 이런 분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언급한 사료들이 있는데 처음 이렇게 밝혀진 건가요? 그리고 민우일보 사건도 처음 밝혀진 겁니까?

 

서명훈:이런 사실 한국에서 다 알고 있습니다.

 

사 회:민우일보는요?

 

서명훈:민우일보 사설은 일부 한국에서 번역했습니다. 민우일보 외에 50여개 있는데 그중에는 제가 새로 밝힌 게 많이 있습니다. 양계초에 관한 것도 새로 밝혀진 것입니다.

 

이성춘(관훈클럽 회원):평생을 안 의사에 관한 연구를 해오셨기 때문에 저희들이 국내에서 궁금하게 생각해온 것 가운데 한 가지만 여쭤보고자 합니다. 안 의사가 처형당한 후 유해가 어떤 식으로 처리되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전혀 밝혀진 게 없는데 선생님께서 평생 연구해 오시고 추적해오신 결과는 어떻습니까?

 

서명훈:안 의사의 시신을 발굴하려 했지만 그게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그 묘지를 하얼빈 사는 조카들이 가봤다는 기록이 있고, 저도 묘지가 있다는 여순감옥 근처의 산을 두 번 가봤는데 좀 찾기 힘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성춘:이등박문을 저격한 직후 국내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걸 보면 일본이 당시 굉장한 패닉 상태에 빠졌어요. 혹시 한국군이 러시아와 연합해 일본에 보복하지 않을까 겁을 먹고 안 의사를 비밀리에 속전속결로 처형하고, 심지어 유해를 동경으로 가지고 갔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 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명훈:저는 그런 얘기 못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문서가 있으면 일본 정부에 밝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 회:일본이 지금도 기록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거죠?

 

서명훈: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구종서(관훈클럽 회원):2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서 회장님께서 여러 신문의 보도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특히 민우일보가 가장 적극적이고, 제일 크게 또는 열렬히 보도했다가 폐간됐습니다. 상해에서 발행된 이 민우일보의 역량이라든지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으며, 전국적 규모의 신문이었는지, 상해 지역신문이었는지 알고 싶고요, 두 번째는 이렇게 정치인, 지도자, 사상가, 시인들까지 열렬히 찬양의 말을 하고 여러 신문이 적극적으로 보도했는데 말과 글 이외에 이러한 것에 영향 받아서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를 본받자는 어떤 움직임이나 반일 행동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서명훈:당시 상해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신문은 신보였습니다. 민우일보는 창간 40여일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렇지만 민우일보 사장은 다른 영향력 있는 몇 개의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당시 각종 언론에 나왔고, 이를 계기로 조선을 돕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손중산입니다. 상해 임시정부 외교부장이 손중산을 찾아갔을 때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그 다음에 조선독립군이 중국에 있는 것을 승인했어요. 어느 나라가 자기 나라에 다른 나라를 두게 하겠어요. 그런데 손중산은 그렇게 했습니다. 중국이 당시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할 때 손중산이 큰 도움을 줬어요. 그 후 한국의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다가 갈 때까지의 모든 경비는 장개석이 대줬어요. 그리고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하고 조선의용군이 싸울 때 주은래가 다 책임지고 지원해 주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주은래가 말한 것처럼 중·한 인민이 일제에 항거하는 서막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중ㆍ한 두 나라가 합해서 항일투쟁을 한 것입니다.

 

사 회:당초 예정했던 시간은 좀 지났는데요,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몇 분의 질문을 더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정자(안병찬 회원 아내):중국 전체도 그렇지만 특히 하얼빈시로 봐서도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하얼빈시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는 10월 26일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고요, 서 선생님은 하얼빈시와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지, 또 이 지역 언론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습니다.

 

서명훈:하얼빈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보도되고 있지만 전국적으로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안중근 의사 관련 사업을 준비하는 분이나 언론인은 만날 수 있습니다만 앞으로 이게 어떻게 보도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 회:그러면 질문을 한 분만 더 받고요, 식사자리에 모셔서 귀중한 말씀 더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숙(관훈클럽 편집위원):우리 광복 50주년 행사 때 ‘오페라 안중근’이 발표된 적이 있어요. 제가 그때 음악담당 기자여서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테너 박지현씨가 안중근 역할을 맡았고 작곡은 중국 작곡가가 했는데 곡이 굉장히 좋아서 그것을 리바이벌하자는 얘기가 음악계 기자들 쪽에서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선생님께서 1931년에 길림성에서 태어나셔서 거의 80평생을 여기서 사셨는데 안중근 의사가 조선족한테 갖고 있는 어떤 상징성과 조선족들이 안중근 의사에게 무엇을 배우며 크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서명훈:10여년 전까지는 소학교 교과서에 열혈청년으로 안중근 의사가 나왔었습니다. 지금은 교과서에 없지만 우리 동포들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열정은 한국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사는 많은 우리 동포들이 안중근 의사 기념활동을 계속하고 있어요. 하얼빈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우리 조선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영향을 받아서 안중근 의사같이 민족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 회:대단히 감사합니다. 저희가 오늘 충분한 시간이 있었으면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지식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우리 선배님들도 안 의사에 대해서 많이 아시고 취재하신 분도 꽤 됩니다. 그래서 많은 토론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죄송스럽고요, 비록 오늘 토론회는 짧았지만 뜨거웠다고 봅니다. 그리고 진지한 토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만찬자리에 모시고 못 나눈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하얼빈에서 개최한 해외세미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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