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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보도 관점에서 조명해본 일본 온타케 산 화산 분화 취재

취재기자 :
박형준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등록일 :
2014-12-01
조회수 :
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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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보도 관점에서 조명해본 온타케 산 화산 분화 취재

 

박형준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기자는 참으로 얄궂은 직업이다. 남들은 위험하다고 다들 도망 나오는 곳을 제 발로 찾아 들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니 말이다. 

 9월 27일 정오 무렵, 일본 나가노(長野) 현에 있는 온타케(御嶽) 산이 분화했다. 처음엔 ‘원래 일본엔 활화산이 많으니까’라며 무관심했다. 하지만 갈수록 사태가 커지더니 일본 방송뉴스에 사망자가 있다는 내용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르겠다”는 뉴스 진행자의 언급도 있었다. 

 동아일보 도쿄(東京)지국은 그날 오후 4시경 ‘현장으로 가자’고 결정했다. 각종 짐을 챙겨 오후 8시경 온타케 산을 향해 떠났다. 

 기자는 재난 취재와 꽤 인연이 깊다. 2004년 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서부해안에서 발생한 지진과 지진해일(쓰나미)로 태국에서 한국 관광객이 사망했을 때 태국 푸껫을 일주일 정도 취재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일본 현장에 2주 동안 급파됐다.

 이번 원고는 재난보도 관점에서 온타케 산 분화 취재를 다루는 것이지만 동일본 대지진 때와 비교해 가며 살펴보고자 한다. 그 편이 훨씬 더 유의미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출 동

 

1) 동일본 대지진

 2011년 3월 11일 오후 편집국장이 불렀다. “형준아, 일본에 난리 났다. 빨리 준비해서 떠나라. 건강 조심하고.” 당시 TV 화면에선 물에 잠긴 동일본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우선 일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선 와이파이를 행정팀에 부탁했다. 기자는 비행기 편을 알아봤다. 당시 지진 영향으로 상당수 공항이 폐쇄됐다. 11일 일본으로 떠나는 비행기 편은 모두 취소된 상태였다. 

 숙소 예약은? 일본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숙소까지 예약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어디든 도착하면 숙소는 있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물이나 음식을 챙길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짐이 무거우면 이동하는 데 힘드니 노트북과 와이파이, 양말 정도만 챙겼다. ‘필요하면 현지에서 사자’고 생각하고.

 12일 오전 일찍 인천공항으로 갔다. 무작정 대기하다 일본으로 떠나는 가장 빠른 비행기를 잡아탔다. 다행히 후쿠시마(福島)로 가는 비행기가 있었다. 

 

2) 온타케 산 분화  

 2014년 9월 27일 오후 5시경 카메라와 방송 장비를 챙기러 회사로 들어왔다. 그때 자매결연 관계인 아사히신문의 친한 기자에게 온타케 산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마스크는 있느냐, 장화는 있느냐” 등등을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아사히신문 편집국으로 오란다.

편집국으로 갔더니 아사히 기자가 ‘편집지원부’로 데려갔다. 직원 2명이 온타케 산 현장으로 떠나는 아사히 기자들에게 부지런히 장비를 나눠주고 있었다. 기자도 장화, 미세먼저를 걸러주는 분진 마스크, 헬멧, 우비, 와이파이 등을 지급받았다. 

 아사히신문 편집지원부는 상시 조직이다. 대형 재해가 터지면 곧바로 창고에서 필요한 장비를 꺼내 기자들에게 배포해 준다. 

 

이동과 현지 숙소

 

1) 동일본 대지진

 정오 무렵 후쿠시마 공항에 도착하니 도쿄 지사에서 전화가 왔다. “야, 후쿠시마 원전 터졌다. 빨리 후쿠시마를 벗어나라.” 

 눈에 보이는 택시를 바로 잡아탔다. 그리고 2시간 떨어진 쓰나미 피해지 센다이(仙台)로 향했다. 고속도로가 봉쇄됐기 때문에 차량이 온통 국도로 몰려나왔다. 택시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 사이 도쿄 지사는 수시로 전화를 해 “어디까지 갔느냐. 빨리 후쿠시마 벗어나라”고 반복했다. 엄청난 공포감을 느꼈다. 

 약 10시간을 달려 센다이에 도착했다. 시간은 자정 무렵. 지진으로 전기가 끊어져 도시는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택시를 타고 한참을 돌아다니다 겨우 숙소를 구했다. 당시 지진으로 인해 센다이의 호텔도 엄청나게 흔들렸다. 그래서 대부분 호텔들이 추가 투숙객을 받지 않았다. 

 

2) 온타케 산 분화 

 도쿄에서 온타케 산으로 최단시간에 가기 위해 우선 신칸센으로 나고야(名古屋)까지 갔다. 거기서 차량을 렌트해 온타케 산으로 향했다. 

 오후 10시경 나고야 역에 도착해 렌터카까지 문제없이 구했다. 그런데 숙소 구하는 게 애매했다. 한시가 바쁘게 온타케 산으로 출발해야 했고, 사고현장을 잘 모르니 어디에다 숙소를 구하는 게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시 아사히 지인에게 연락했다. 그랬더니 아사히 기자용으로 잡아놓은 산장에 방 하나를 마련해 줬다. 

 새벽 2시 반경 산장에 도착했다. 그러자 아사히 측 인사가 아직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취재기자가 아니라 편집지원부 사원이었다. 사고가 터지면 편집지원부의 일부 직원은 장비 배포를 맡고, 일부는 곧바로 사고현장으로 떠나 숙소를 구한다. 취재기자들이 재난현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숙소를 구하는 게 그들의 임무다. 

 

식 사 

 

1) 동일본 대지진

 2011년 3월 13일, 그러니까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처음 취재를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우선 호텔 직원에게 물어 지진과 쓰나미 피해가 컸던 지역을 파악한 뒤 택시를 잡아타고 현장을 다녔다. 오후에 호텔로 돌아와 급히 현장 1보를 보냈다. 

 기사를 다 쓰고 나자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일본 온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센다이로 올 때는 방사능 공포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하루 지나선 아비규환의 현장을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뛰어다니다 보니 배고픈 줄 몰랐다. 후쿠시마 공항에 도착했을 때 급수차에서 대형 비닐봉지에 배급받은 물은 넉넉히 있었다. 

 기사를 보낸 후 호텔 밖으로 나가 편의점을 찾았다. 대부분 편의점이 셔터를 내렸다. 간혹 문이 열려 있긴 했지만 음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진으로 도로 일부가 유실되면서 물류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편의점엔 ‘내일 오전 ○시 물류차가 옵니다. 그때 문을 엽니다’ 같은 안내 문구가 있었다.

 다음 날 취재차 나가면서 오전 일찍 문을 연다고 공지한 편의점에 들렀다. 하지만 줄 길이가 수십 m였다. 음식을 손에 넣으려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아니다’ 싶어 그냥 재해현장으로 나갔다. 

 기자가 음식을 먹은 때는 일본에 온 지 약 48시간 후였다. 대지진 발발 나흘째 되는 날, 센다이에서 승용차로 약 30분 떨어진 나토리(名取) 시의 피해지를 취재했다. 당시 자원봉사자들이 음식을 만들어 이재민들에게 나눠줬다. 기자도 이재민 줄에 섰다. ‘일본의 아픔’을 한국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온 기자가 이재민 행세를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라 믿으면서. 

 

2) 온타케 산 분화

 온타케 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나가노 현 기소(木曾) 정은 매우 작은 마을이었다. 기차역 광장 인근에 식당이 보였지만 사고현장과 가까운 등산로 입구에는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편의점도 없었다. 이번에도 또다시 굶으며 취재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또다시 아사히신문이 구해줬다. 편집지원부에서 파견된 직원 2명은 기자들의 숙소 마련뿐 아니라 ‘배식’도 책임졌다. 미리 역 근처 식당 등에서 삼각김밥과 빵, 음료수 등을 잔뜩 사서 산장 출입구에 놔뒀다. 기자들은 산장 주인이 만든 아침을 먹든지, 아니면 김밥 등을 가지고 곧바로 취재현장으로 가면 됐다. 산장은 아침, 저녁을 제공했다.

 대부분 아사히 기자들은 점심 몫까지 삼각김밥과 빵을 챙겨 나갔다. 하지만 간혹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기자들이 있었다. 그 경우 편집지원부 직원들이 도시락을 현장까지 배달해 줬다. 저녁은 산장 측에 부탁해 늦은 시간까지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취재와 재난 대비

 

1) 동일본 대지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차 연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사람들은 저녁에 주유소 앞에 차를 세워놓고 차 안에서 잠을 잤다. 그 줄이 100m 이상 됐다. 그 때문에 택시 연료가 허용하는 만큼만 현장취재를 할 수 있었다. 그 같은 상황은 동아일보의 다른 파견자들을 만나면서 해결됐다.

 대지진 당시 동아일보는 기자 3명을 파견했다. 후쿠시마 공항으로 간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2명은 도쿄로 갔다. 도쿄로 간 기자들은 아사히 기자 1명과 함께 아사히 제공 차량을 타고 센다이까지 왔다. 그들과 합류하고 나서야 기자의 취재 범위도 넓어졌다. 당시 ‘취재차량’ 딱지를 붙인 차는 줄을 서지 않고 곧바로 연료를 구할 수 있었다.  

 쓰나미로 마을이 형체조차 없이 사라진 이와테(岩手) 현 리쿠젠타카타(陸前高田) 시를 취재할 때였다. 리쿠젠타카타만큼 쑥대밭이 된 풍경을 그때까지 보지 못했다. 갑자기 흥분됐다.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현장으로 뛰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동행한 아사히 기자가 나를 잡았다. 그는 차 트렁크에서 장화를 꺼내 신은 후 한참 동안 지형을 살폈다. “박 기자, 만약 다시 쓰나미가 오면 우리는 저쪽 산으로 뛰어갑시다. 그게 가장 가까운 대피소 같습니다.” 갑자기 ‘멍’한 느낌이 들었다. ‘기사’만 보고 달리던 나는 처음으로 ‘안전’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됐다. 

 

2) 온타케 산 분화

 온타케 산 인근은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했다. 화산재는 초창기 분출됐지만 그 후에는 수증기만 피어오를 뿐이었다. 그래서 낙진이 거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산장 문을 열면 살짝 유황 냄새가 났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첫날 취재 때는 준비해온 장비를 모두 착용했다. 분진 마스크와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은 채 현장을 돌아다녔다. 현장에서 만난 일본 기자 약 절반 정도는 나와 비슷하게 중무장을 했다. 하지만 점차 중무장을 해제했다. 낙진이 없었기 때문이다.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통행이 금지됐기 때문에 사고현장에 접근할 수 없어 장화도 불필요했다. 기자도 이틀째부터는 모든 장비를 산장에 놔둔 채 취재수첩만 들고 다녔다.

 하지만 조심했다. 동일본 대지진의 취재 경험에 기초해 어딜 가더라도 ‘혹시 추가로 대형 분화가 일어나면…’이라는 생각을 했다. 재난 취재 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습관을 지니게 된 것 같다. 

 

결 론

 

 한국 신문사와 일본 신문사를 1 대 1로 비교하긴 힘들다. 동아일보는 기자 수가 240여 명인데 아사히신문은 2,400명이다. 재난 취재에 투입할 수 있는 기자 수, 취재장비의 질, 후방지원 등에서 차이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일본 신문사의 재난 취재 시스템 장점을 한국 신문사가 그대로 도입하자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동일본 대지진과 온타케 산 분화 취재를 해본 경험에 비춰볼 때 ‘취재지원 부서’는 한국 언론이 꼭 도입해봄 직하다. 새로운 부서를 만들기 부담스럽다면 담당자만 지정해 둬도 된다. 단, 대형 재난이 터졌을 때 기자들이 자연히 떠올릴 정도로 실질적으로 권한을 갖고 실무를 담당해야 한다. 

 한국 상황에서 취재지원 부서가 현장까지 가서 숙소를 구해주고 현장기자들의 식사까지 책임지기는 힘들 것이다. 재난대비 물품 배포 및 숙소 예약 정도까지가 적정선일 것 같다. 그것만 해도 취재기자는 다른 고민 없이 대형사고 현장으로 곧바로 출동하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덧붙여 ‘재난 취재 시 유의점’ 리스트를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동아일보, 아사히신문 모두 대지진과 화산 분화 때 취재 유의점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재난 현장에 무방비 상태로 놓이지 않기 위해 각 재난별로 취재 유의점을 사전에 만들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장 재난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기에 내용이 길면 읽어보지 않는다. A4 용지 한 장에 꼭 필요한 정보만 담으면 될 것 같다. 재난별로 현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사전 준비물 리스트 등이 담겨야 할 것이다. A4 한 장이라면 재난현장으로 가는 도중 쉽게 꺼내 읽어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본사에 있는 데스크가 너무 기사 욕심을 내지 말 것을 제안하고 싶다. 아사히신문의 경우 대형사고 때 기자 10명 이상으로 구성된 팀을 꾸려 현장으로 보낸다. 해외취재 때도 마찬가지다. 그 경우 팀장이 현장 상황을 감안해 위험지역 취재 여부를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신문은 국내 사건을 제외하고 해외에 팀을 꾸려 보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때문에 서울의 책상에 앉아 있는 데스크가 취재 지시를 내린다. 아무래도 현장기자가 부닥칠지 모를 위험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