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사업

"저 사람, 버릇 못 고치겠구먼"

선배 언론인 :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
대담 기자 :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대담 날짜 :
2015. 1. 16
조회수 :
7,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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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기록하는 기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대담 :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언론계의 대선배인 조용중(趙庸中) 전 연합통신 사장과 2015116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회의실에서 마주앉았다. 그렇잖아도 평소 뵙고 싶었는데 선후배와의 대화라는 핑계를 내세워 꼬치꼬치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개인적으로도 영광이었다. 갑자기 휘몰아치던 눈발이 어느덧 잦아들긴 했으나 겨울철의 스산한 바람소리는 창밖에 여전했다.

근황을 섞어 몇 마디 얘기가 오가다가 자연스럽게 본인에 대한 자평(自評)에서부터 대선배의 말문이 열렸다. “현역시절 특별히 기억될 만한 기사를 쓴 적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데이렇게 인터뷰 대상이 된 것이 어색하다고 했다. ‘선배와의 대화코너에 초대된 소감이다. 단순히 쑥스럽다는 기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 언론계에서는 풍운아로 통하시는 것 아닌가요.

경력으로는 풍운 기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그보다는 이단아’, ‘비주류라는 생각이 더 크지요. 과거 신문사 생활을 자격지심으로 버틴 게 아니었나 생각이 드는 게 그런 때문입니다. 점잖지 못한 욕설로 기껏 욕쟁이별명이나 들으면서 지냈거든요. 편집국에 드나드는 중앙정보부 사람들에게도 욕을 퍼붓긴 했지만 저항이라기보다는 그냥 내뱉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심지어 험구로 소문난 민관식(閔寬植) 장관조차 나에게 저 사람, 버릇 못 고치겠구먼이라며 혀를 내두르곤 했어요. 자기보다 입이 더 걸다는 뜻이었겠지요.”

대학을 마치지 못한 채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여러 신문사를 돌아다녔지만 어느 회사에서도 오래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후배 간의 동료의식이 부족한 외톨이 처지에 자칫 아무 흔적도 없이 묻혀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초조함이 거친 입버릇으로 나타나게 된 것 같다는 실토다. 차분한 말투가 마치 신앙고백을 듣는 묘한 기분이다.

 

화려한 언론계 경력의 '풍운 기자' 

 

- 언론계 경력이 누구보다 화려하신 편이지 않습니까.

요즘말로 스카웃 됐던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바라지 않았는데도 말이지요. 가깝게 지내던 조세형(趙世衡)이 미국에 공부하러 가면서 자기 자리를 메워 달라고 해서 평화신문으로 옮기게 됐고, 조선일보에는 선거에 출마하는 김주묵(金周黙) 기자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기자들 투표로 뽑혀가게 됐지요. 그뒤 동아일보 정경부 차장으로 옮겨가게 된 것도 당시 김성열(金聖悅) 부장에 의해 제의를 받았던 것이니까요.”

1953년 자유신보로 시작해 세계통신과 평화신문을 거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오가며 기자생활을 했다.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에서 편집국장을 지냈고 언론연구원장과 연합통신 사장도 지냈으니, 당연히 풍운아다. 더 나아가 한국ABC협회 회장, 문우언론재단 이사장,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얘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지난 연말 시상된 관훈언론상으로 화제를 돌렸다. 조 전 사장이 한승헌(韓勝憲) 변호사와 공동 심사위원장을 맡아 심사과정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관훈언론상은 권위를 더 높이기 위해 시상 부문을 전면 개편하고 상금도 부문별로 1000만원씩으로 높였다. 현역 기자들의 응모 기사들에 대해 만족스러웠다는 답변을 기대하며 질문을 던졌다.

 

- 이번 관훈언론상을 심사하면서 느끼신 소감이 있으실 테지요.

사실은, 심사기간 중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기에 응모작들을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는 점을 먼저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응모작마다 고생을 한 흔적이 느껴지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듭니다. 응모기간이 짧았던 데 비해 응모작이 많이 들어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올해는 더욱 도전적인 작품들이 많이 들어오기를 기대합니다.”

조 전 사장은 지난해 9월 수술을 받았다. 관훈언론상 심사기간에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것이 그런 뜻이다. 아직도 완쾌하지 않아 외출할 때는 휠체어 신세를 져야만 한다. 이날의 인터뷰 자리에도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상반신이 아무리 멀쩡해도 팔다리가 성하지 않으면 남들이 알아주지를 않는다는 농담이 가볍고도 유쾌하다.

 

- 관훈언론상에 나타난 요즘 기자들의 기자정신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구석구석 기자정신에 투철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사를 소설 형식으로 쓴다거나, 인터넷을 통해 조사보도를 시도한다거나 하는 노력은 평가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기자 근성이라고 할까요, 끈질기게 파고드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널리즘이 권력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 시대를 이끌어갈 것이냐 하는데 대한 기자사회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관훈언론상이 한국의 퓰리처상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퓰리처상도 수없이 좌초를 겪으면서 성장해 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 전 사장은 이 대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얘기를 먼저 꺼냈다. 현역 기자들의 기자정신에 대한 보충 사례로서다. 청와대에서 신년회견이 있었던 것이 그보다 나흘 전인 12일의 일. 목소리가 은근히 카랑카랑해진 것이 할 얘기가 적지 않은 듯했다. 질문자로서는 질문할 새도 없이 받아 적기에 바쁠 수밖에 없었다.

신문들이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이라고 해서 내용도 없는 것을 두세 페이지씩 할애할 필요가 있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합니다. 광고까지 없애가며 미주알고주알 보도했거든요. 기자들이 자기 맡은 질문만 하는 형식부터가 문제입니다. 질문이 돌아가다가 답변이 부족하면 대신 추궁해가며 보충질문이라도 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개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기자들이 머리로는 저널리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몰라도 현실을 돌파해나가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약간의 회의가 듭니다.”

 

조 전 사장은 그런 식이라면 기자회견이 아니라 중계일 뿐이라며 얘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미국의 저널리즘을 도당(clique) 저널리즘이라고 비판한 워싱턴포스트 데이비드 브로더(David Broder) 기자의 저서 ‘Behind the Front Page’를 인용하기도 했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언론도 정치권과 같은 내부자(insider)’의 일원이 돼버린 게 아니냐는 걱정이다.

 

얘기는 다시 신년 기자회견이다.

대통령이 1년 만에 기자회견을 한 것인데, 출입기자단 차원에서도 그 자체에 대한 관심 표명이 있었다면 훨씬 모양이 좋았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기자단 대표가 질문 모두에 앞으로는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든지, 아니면 회견 마무리에 공치사일망정 좋은 말씀 고맙다는 인사말 하면서 다음에는 언제쯤 뵐 수 있겠느냐고 웃으면서 질문을 던졌다면 아마도 참석자 모두가 함께 웃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콕콕 찌른다. 역시 대통령과 기자, 또는 권력과 기자와의 관계를 머리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대통령 기자회견과 관련해 1950년대 중반 평화신문 시절의 조세형 기자를 사례로 꺼냈다.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열렸을 때 자유당의 도당위원장 금권선거에 대해 불쑥 질문을 던짐으로써 벌어졌던 사건이다. “도당위원장 선거에 돈봉투가 오가고 있었는데도 이 대통령만 모르고 있던 것을 조세형이 지적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대통령의 답변이 어물쩍 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나 그 불똥은 즉각 조세형 본인에게 튀게 된다. 회견이 끝나고 경무대에서 신문사로 돌아오는 사이에 파면인사가 나붙은 것이었다. 권력층에서 평화신문 사장에게 인사 주문이 있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조 전 사장은 특히 조세형 기자와는 절친했던 사이로 알려져 있다. 조세형이 언론계를 떠나 국회의원과 주일대사를 지내고 지난 2009년 일흔아홉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도 가깝게 지냈다.

 

- 작고한 조세형 전 주일대사와는 막역한 관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만.

매우 가까웠지요. 나를 평화신문으로 이끌었기도 했고, 어떤 때는 내가 남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며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성격은 많이 달랐습니다. 조세형은 자기 의견 표출에 직설적이었으니까요. 한때 조선일보 정치부에서 같이 근무할 적에는 조용중이가 조세형 그늘에 가려 맥을 못 춘다는 얘기까지 들어야 했거든요. 내가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옮기게 된 데도 그런 배경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겁니다.”

 

- 요즘은 과거에 비해 언론 환경이 상당히 변한 것 아닌가요.

글쎄요, 외형적으로는 많이 발전했다고 봐야지요. 그러나 신문 페이지는 늘었는데 오히려 각 기사의 길이는 줄어드는 추세가 바람직한 것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6하원칙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은 좋지만 상황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거든요. 자꾸 미국 얘기만 하다가 욕먹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은 필요할 경우에는 길게 쓰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최근의 청와대 문건유출 보도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불만이다. “지루할 만큼 장황한 기사들이 많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사인지, 가십인지, 논문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는 것이다. “얽히고설킨 얘기를 늘어놓으면서도 핵심이 없었다고 그는 지적했다.

 

이념 갈등이 지면에 여과없이 나타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 

 

- 우리 사회의 보수·진보 간 이념갈등이 심각해졌고, 그에 따라 언론계 내부에서도 이념대립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혹시 그에 대한 처방 같은 게 있을까요.

지성인들의 사회에서 이념갈등 자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갈등이 지면(紙面)에 여과없이 나타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주장과 사실 보도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보도와 논평의 분리 원칙을 지키는 서양 신문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지난해 문창극(文昌克) 국무총리 지명자에 대한 지명철회 논란도 이념갈등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조 전 사장은 진단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도중에 좌파가 주도권을 잡고 아젠다를 설정해가며 공세에 나서면서 문제가 확대됐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언론계의 다른 원로들과 함께 우리들의 입장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 과거 언론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한두 가지만 꼽으신다면.

언론연구원장으로 있으면서 카인즈 서버를 구축한 것이 가장 잘한 일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직 연판을 떠서 신문을 만들던 시대에 컴퓨터 시대를 미리 내다본 셈이 됐지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쓰라린 기억도 적지 않습니다. 1960년대 경향신문 박찬현(朴瓚鉉) 사장이 불러서 편집국장으로 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1년 만에 주미일(駐美日) 특파원이라는 전례없는 발령을 무릅써야 했지요. 임지가 괌이냐, 하와이냐 하고 얘기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도 경향신문이 신진자동차로 넘어가면서 다시 편집국장으로 복귀했으니, 남들은 조 아무개가 누구 줄을 잡았겠거니하며 굉장하단 눈길로 바라보았겠지요. 그 뒤 최치환(崔致煥) 사장이 나를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령을 냈지만 결국 하방(下放)당한 셈이지요.”

 

- 그동안의 취재경험을 살려 쓰신 책도 많으시던데요.

몇 권 안 됩니다. ‘대통령의 무혈혁명’, ‘저널리즘과 권력’, ‘미군정하의 한국정치 현장등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모두 취재기자로서의 현장 기록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해석하는 건 역사학자들의 몫이고, 저널리스트의 역할이란 역시 현장을 기록하는 것이 아닐까요. 요즘도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NSA의 정보수집 내막을 폭로한 스노든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중입니다. 대영제국이 무너졌듯이 무차별적으로 세계의 통신을 도·감청하는 미국의 제국주의 수법도 무너질 것인가 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는 지난해 관훈저널 여름호에 목숨을 걸어야 취재할 수 있는 나라라는 제목으로 파키스탄의 언론 현실을 소개한 바 있다. 그 글도 이러한 관심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미국 루스벨트 정부 안에서 활약하던 소련 스파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나 아프간 전쟁으로 눈길이 바뀌었다가 다시 지금의 스노든과 NSA’로 바뀌었다고 했다.

 

- 기자로서 다큐멘터리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륭한 다큐멘터리로서 일본 아사히신문 국제문제 대기자로 활약했던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더 페닌슐러 퀘스천(The Peninsular Question)’을 들 수 있습니다. 북핵 문제의 전말을 취재한 역작이지요. 일본의 주간문춘 기자 출신인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다나카(田中) 금맥 연구나 한국전쟁을 다룬 할버스텀(David Halberstam)‘Coldest Winter’ 등은 저널리스트 필독의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해 10월 발간된 윈트라웁(Stanley Weintraub)‘A Christmas far from Home’이라는 책도 함께 소개했다. 역시 6.25전란 중 맥아더 장군의 작전 실패에 대한 얘기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고, 오늘 낮에서야 아마존에 책을 주문했다며 기대가 대단했다.

 

올바른 핵심(core) 저널리즘은 영원히 살아남는다 

 

- 언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언젠가 이코노미스트 특집기사에 ‘2020년대에 이르면 미국 신문이 몇 개 밖에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신문 환경이 그만큼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올바른 저널리즘, 즉 정론(正論)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뉴욕타임스의 표현대로라면 핵심(core) 저널리즘이랄 수도 있겠지요.”

- 신문기자가 아니었다면 어떤 직업을 택하게 되셨을까요.

글쎄요, 어린 시절 한동안은 아나운서가 꿈이었지요. 중학교 때까지도 아마 그런 생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만. 기자가 된 것도 그런 연장선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듭니다.”

 

- 질문 순서가 바뀐 듯도 합니다만,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몸도 불편해서 나돌아다닐 수는 없고 그냥 무료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갈수록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쓰고도 책을 보는 게 불편하다는 게 큰 불만이지요. 서재라고 해서 오래 앉아 있으면 갑갑하니까 마루로 나와서도 책을 보게 되는데 콘사이스도 양쪽 책상에 놓여 있지요. 영어 실력 모자란 것도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책을 보면서 원고를 쓰고, 버리고를 반복하는 게 그의 일과다. 쓰다가 옆에 미뤄놓은 분량도 수북하단다. “새로 무슨 일을 시작한다면 욕심이겠고, 지금껏 벌여놓은 일만이라도 제대로 마무리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미 여든 중반에 접어든 자신의 나이를 염두에 둔 듯했다. 최근 어느 국가기관에서 자신의 과거 경험에 대해 사흘 동안 녹취를 받아가기도 했다고 소개한다. 요즘에는 다리 운동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에 포함돼 있다.

 

- 언론계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기억되길 바라시는지요.

아까 얘기한 대로 현장을 기록하는 기자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현역 기자들께서도 현장의 중요성을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당초 한 시간 정도로 예정됐던 인터뷰 시간은 어느덧 두 시간을 넘어서야 끝났다. 창밖에는 겨울철 이른 저녁의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 이메일 주소

- 조용중 전 연합통신사장 : chowww1@gmail.com

-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 gracias1234@naver.com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

 

경력

- 자유신문 기자

- 세계통신 기자

- 평화신문 기자

- 조선일보 기자

- 동아일보 정경부 차장

- 조선일보 정치부장, 편집국 부국장

- 서울신문 편집국장, 제작총국장

- 경향신문 편집국장, 주미특파원

- IPI 회원

-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TBC 논평위원

- MBC 경향신문 전무

- 한국언론연구원장

- 연합통신 사장

- 한국ABC협회 회장

- 고려대학교 석좌교수

 

저서

- 대통령의 무혈혁명

- 저널리즘과 권력

- 미군정하의 한국정치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