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사업

신문은 죽지 않는다

선배 언론인 :
홍순일 전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
대담 기자 :
오영진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

대담 날짜 :
2015.11.23
조회수 :
3,632

 

 

영어신문의 지킴이 홍순일 전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 인터뷰

대담 : 오영진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

 

홍순일 전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은 우리나라 영문신문계에서 대부 같은 존재다.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반세기 동안 주로 영어신문 기자로 일하며 우리나라 영어신문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현재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을 맡고 있는 나에겐 까마득한 선배이기도 하다. 관훈클럽에서 선후배의 대화코너를 위해 홍 선배 인터뷰 요청이 왔을 땐 좋은 역사공부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대선배를 깍듯이 대접해야 하는 의무감에 걱정도 됐다.

그러나 인터뷰는 내 예상과는 좀 다르게 진행되었다. 홍 선배는 30년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격을 별로 따지지 않고 인터뷰에 임했고 과거보단 미래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다. 물론 50년간 영자신문에서 일한 베테랑 기자로서의 경험담과 고뇌보따리를 열었지만 내가 놀란 것은 세대를 넘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문업계가 안고 있는 불확실한 미래에 관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홍 선배는 인터넷과 모바일이 열어 놓은 정보의 홍수시대에서 신문은 결국 노아의 방주를 찾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확신은 전염성이 있었다.

한국프레스센터에 있는 식당 룸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2시간을 넘어서 1층 카페에서 끝났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땐 영어신문 기자로서 전우애를 느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전투에서도 승산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홍 선배에겐 말하지 않았다. 홍 선배가 관심이 많은 신문의 미래에 대한 질문으로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 신문이 전성기인 시기에 반세기를 기사, 사설, 칼럼을 쓰셨습니다. 지금은 신문이 사양 산업이라고 하고 신문사들도 방송 진출 등 다각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의 미래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1950년대 후반에 텔레비전이 대중화되었을 때 종이신문이 없어질 것이라는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종이신문은 결국 살아남았죠. 종이신문은 SNS 등의 도전을 또 한번 이겨내고 남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인터넷 신문의 수가 작년 말 현재 6천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시민 저널리즘또는 스트리트 저널리즘이 판을 치고 있어요. 그러나 이런 보도들은 게이트키핑이 잘되지 않고 어떤 면에선 무책임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보도들이 네이버, 다음 등 포털을 통해 막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미디어산업의 기술발달로 뉴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이죠.

다양한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기존의 신문산업이 위협을 받고 있어요. 신문은 그러나 저널리즘 측면에서 보면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는 뉴미디어의 위협을 혁신적인 대응책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엄청난 노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디지털화 병행과 같은 기본정책과 함께 새로운 미디어의 동영상과 속보에 대항하는 신문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양한 기획보도, 심층보도와 설득력 있는 논설과 코멘터리 등이 신문이 강화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발표한 혁신보고서’(Innovation Report)도 좋은 대응책의 하나라고 봅니다. 뉴욕타임스는 적극적인 디지털부문 타개책과 아울러 국제화전략을 내놓았습니다. 신문의 미국 본토판과 인터내셔널판에 더하여 2012년 중국어판 웹사이트를 개설했으며 한국어판이 나올 거란 소문도 있어요. 이런 글로벌 전략은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초월한 독자의 다변화를 꾀한 것이죠. 또한 현재 100만 명인 온라인 유료독자를 2020년까지 200만으로 배가하고 디지털 부문의 수입을 8억 달러로 배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뉴욕타임스의 전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문기자들이 전문화하고 부문별로 누적된 노하우를 활용해 사명감을 갖고 깊이 있는 좋은 기사를 보도하면 독자들은 신문을 계속 찾게 될 것으로 봅니다.”

 

뉴욕타임스가 잘 나가는 이유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보도 때문

 

- 신문의 이념적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이로 인한 영향은 무엇이라 보나요?

우리나라 신문들은 한 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심합니다. 조중동-한겨례·경향 등 이념적으로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 심하게 경도되어 있죠. 뉴욕타임스의 경우 균형을 잘 잡고 있습니다. 물론 대통령 선거 때 사설로 특정후보를 지지하기도 하지만 뉴스는 중립과 공정성을 견지하여 지극히 객관적입니다. 뉴욕타임스가 잘 나가는 근본 이유죠. 나 개인적으론 뉴욕타임스를 인터넷 홈페이지로 삼고 있어요.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좀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죠.

또 신문의 생존에 긴요한 요소는 젊은 독자층입니다. 젊은이들을 어떻게 독자로 끌어드리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뉴욕타임스 유료독자의 40퍼센트가 20-30대라고 합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신문제작으론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이들을 중요한 오피니언 리더로 성장시키는데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국제화 시대의 신문은 국내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판단아래서 기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 점이 우린 아직 모자란 것 같아요. 가령 유엔총회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만난 기사를 우리 매체들은 북핵문제가 주 의제였던 것 같이 보도했죠. 북한문제도 논의되었겠지만 회담이 전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객관적으로 기사화해야 하는데 너무 아전인수 격이어서 독자의 판단을 오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쏠림 현상의 한 단면이라 볼 수 있죠.”

 

- 국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요?

“1974년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에서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전보된 뒤 25일간 동남아시아 8개국을 돌며 정상들과 릴레이 인터뷰하는 순방 취재를 했어요. 기자시절 외무부 출입했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죠. 그렇지만 치밀한 준비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만난 정상 중에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티우 월남 대통령,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광요 수상을 만났을 때 내가 오히려 인터뷰를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회견 때 휴대했던 녹음기를 못쓰게 한 반면 격식은 크게 따지지 않았죠.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그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 특보의 면담요청도 거절했었다는 데 나를 만난 이유는 유신선포 후 만 2년이 지난 한국에서 강권정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 기자로부터 객관적으로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인터뷰는 그가 60 퍼센트의 질문을 하고 40 퍼센트만 내가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 이 총리를 하버드대학에서 다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도 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한 것으로 압니다. 그는 경제발전과 안보를 민주정치와 조화시키는 방법에 관심이 많았고, 남다른 선견지명 또한 있었죠. 구미 각국을 다니며 석학들과 대화를 통해 세계적 시각을 갖고 싱가포르를 선진국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이광요 수상처럼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통령들은 임기 중 milestone (획기적인 업적)을 만들려는 집념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아요. 이 보다는 넓은 식견을 갖도록 노력하고, 효율적인 소통을 통한 사회통합을 이루면서 국가의 앞길을 결정하고 인도하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관훈클럽 창립회원 18명 중 5명이 코리아타임스 출신

 

- 관훈클럽과 최병우와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관훈클럽은 뛰어난 기자들의 보금자리 같은 역할을 해왔어요. 1957년 창립회원이 18명 이었는데 그 중 다섯 사람이 코리아타임스를 거쳐 간 기자였습니다. 내가 전공분야가 다른 신문사에 남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관훈클럽의 대부였던 최병우 편집국장의 영항 때문이었죠. 나의 중학교 선배로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정부수립 당시 주일대표부에서 일하다가 장기영씨를 도와 한국은행 도쿄지점 개설에 참여했고 이어 조선일보를 거쳐 54년 한국일보 창간사원이 되었어요. 외신부장 겸 편집부국장으로 근무하다가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을 맡게 됐습니다. 판문점 정전협상 취재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코리아타임스의 일선 취재시스템을 대폭 강화했는데 나도 그 때 중앙청 외무부 출입을 하게 됐었죠. 그는 신문제작 쇄신에 진력하는 한편 주한 외국인 지식층과 국내 언론인을 중심으로 한 모임을 주도하고 한국학 연구에 참여하는 등 대외활동이 많았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 초청 프로그램에 매년 기자 6-9명이 갔었는데 1기로 다녀온 사람들이 미국에서 습득한 선진 신문이론과 실무경험을 살려 국내 언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관훈클럽 창립에 이바지했는데 그 선도역할을 최병우가 맡았어요. 자신은 미국 연수자가 아니었고 클럽 설립 후 총무직을 맡지 않았지만 33세이던 그가 제일 선임자였죠. 그는 189647독립신문창간 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고 신문편집인협회’(현 신문방송편집인협회)를 설립하는 일도 주도했습니다. 관훈클럽은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을 모토로 하고 진취적 발전을 추구해왔죠. 처음엔 18명의 작은 모임으로 출범했지만 60년 동안 우리나라의 언론발전을 위한 다양한 일을 해오며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단체 중의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관훈클럽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언론단체로 건재하고 있지만 중요한 이슈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대외적으로 공식적인 입장을 공표하지 않고 있어요.”

 

 

 

10·24 언론파동 도화선 된 티우 월남대통령과의 인터뷰 기사 가장 기억에 남아

 

- 언론인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8개국 정상 인터뷰 여행 중 티우 월남대통령을 만난 시점이 사이공이 공산군에 함락되기 꼭 반년 전이었어요. 나는 티우 대통령이 2년 만에 처음 만난 외국기자였죠. 90분간 단독 회견을 했어요. 그 때 태풍이 엄습해 호텔방에 발이 묶였어요. 호텔에서 월남의 몰락 전야 혼돈상황을 종합 분석한 기사를 느긋하게 작성해 송고했지요. 한국일보 3면에 반 페이지가량 크게 실렸어요. 그런데 이 기사를 당시 유신 반대 소요로 긴장해 있던 우리 정부당국이 월남을 빗대어 유신을 비방한 것으로 판단해 사단이 났었습니다. 편집국장과 사장 등이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기사 나오기 이틀 전 당국에서 각 신문사 편집국장과 방송국 보도국장들을 불러 반유신적인 기사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부의 탄압에 항거해 한국일보 기자들이 궐기하여 민주언론수호 결의문과 행동지침을 채택했으며, 이 사건은 때마침 있었던 동아일보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채택과 함께 전국적으로 퍼진 10·24 언론파동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19737월 코리아타임스 오피니언 페이지의 ‘Thoughts of the Times’ 기고 칼럼에 게재된 외국인의 글이 문제가 됐습니다. 기생관광을 빗대어 쓴 ‘A Modest Proposal’이라는 제목의 풍자 글이었죠. 이 글이 중앙, 조선, 동아 등 국문지에 소개되자 중앙정보부가 관광산업을 저해하는 이적행위를 저질렀다는 트집으로 나와 담당 편집기자를 연행해가 심한 육체적 고초를 가했습니다.”

 

- 왜 영문신문 기자를 선택했나요?

영문신문의 대부란 터무니없는 말이고 다만 지킴이노릇은 해온 것으로 자부합니다. 그동안 영자신문의 위상을 높이는데 한몫했다고 생각해요. 중고교 시절부터 신문에 관심이 있었죠. 그러다 대학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신문사에 들어갔는데 당시 전공분야인 조선산업이 몹시 부진했던 반면 신문제작에 흥미를 느끼고 생동감 넘치는 신문사 분위기에 휩싸여 남게 되었습니다. 진로 선택에 고민을 했지만 1958년 미국 연수를 다녀오면서 신문에 전념하기로 했지요.

국문신문이 아닌 영어신문에 있었기 때문에 제약, 불이익 등 서운한 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으며, 유능한 동료들과 함께 엘리트 신문기자의 일원이라는 자긍심도 가졌었죠. 국제화 사회에서 영어신문의 생명력은 상대적으로 더 커지리라는 신념 또한 작용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스카우트 교섭을 물리치며 영어신문에 외골수로 몸담으면서 수절한다는 기분도 들었어요.

코리아타임스 국장을 7년 지냈고 한국일보 논설위원 5년하고, 다시 타임스에 가 논설주간으로 일하는 등 현장에서 있던 건 35년입니다. 그렇지만 2004년까지 코리아타임스에 홍순일 칼럼’, ‘서울 퍼스펙티브’(Seoul Perspective) 등 칼럼을 썼으니 신문기자 50년을 채웠어요. 언론계 대선배이신 유광일 선생의 자서전 <기자 반세기>의 출간에 영향 받기도 했습니다. 2003년 말 정진석 교수, 고 박창석 교수와 공저로 우리 영자신문 역사를 체계적으로 엮은 최초의 단행본 <한국영어신문사>를 간행한 것을 보람있게 여깁니다.”

 

기자가 월급쟁이 됐다는 쓴 소리 안타까워

 

- 현재 기자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한때 기자들은 정의를 옹호하며 불의와 싸우는 지사의 역할을 자처했지요. ‘무관의 제왕이니 사회의 목탁이니 하는 비유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부정에 대한 항거와 사회정의를 위한 노력이 신문의 역할임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죠. 거기에서 언론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동시에 언론계 부정행위를 없애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언론 자유와 책임은 두 개의 날개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근래 기자들의 천직의식이 희박해지고 월급쟁이에 가까워진 게 아닌가 하는 쓴 소리가 나돌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 향후 계획은 어떤가요?

현재에 이르러 뚜렷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려 한다면 과욕이겠죠. 그러나 관심사는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조선조 말 개화기로부터 광복 후 정부수립 전후까지의 기간 동안 영어가 우리나라 근대화에 끼친 영향 중 주요 인사들이 담당했던 역할과 그 평가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측면의 연구가 진행되었고 저술도 다수 나왔지만 개개인의 역할과 그들의 영어 구사력 등에 대해서는 아직 여지가 남아있는 것 같아요. 예로 독립신문과 영문판 Independent를 발간한 서재필과 윤치호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되어있지만 여타 그늘에 가려진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열 사람 정도라도 영어달인열전(英語達人列傳) 같은 것을 마련했으면 하는데 역시 욕심으로 남지 않을가 싶어요.”

 

이메일

홍순일 전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 : ssiihong@gmail.com

오영진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 : editor@koreatimes.co.kr

 

홍순일 전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

경력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공학과 졸업

-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신문학과정 연수

- 미국 하버드대학 국제문제연구소(CFIA) 연구원(Fellow)

 

- 코리아타임스 입사

- 정치부장

- 편집부국장

- 편집국장

- 한국일보 논설위원

- 코리아타임스 논설위원

-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

- 한국일보사 이사

-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상임이사

- 한국국제교류재단 편집주간

- 코리아타임스 격주 시사칼럼 집필

 

- 관훈클럽 제12대 총무

-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이사

- 관후클럽신영연구기금 제4대 이사장

- 왕립아시아학회(RAS) 한국지부 평의원

- 국제 펜(PEN) 클럽 한국본부 회원

-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저서

- <한국영어신문사>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