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 세미나 소개(국내, 해외)
  • 세미나 소식
  • 국내 세미나 목록
  • 해외 세미나 목록

고려인의 이주와 정체성

주제발표자 :
남 빅토르 타슈켄트 국립 니자미 사범대학교 교수
개최일 :
2011.08.25
조회수 :
4,971
첨부파일

 

<관훈클럽 해외세미나>

주제 : 고려인의 이주와 정체성

주제발표:남 빅토르 타슈켄트 국립 니자미 사범대학교 교수

 

일시:2011년 8월 25일 오전 10시

장소:우즈베키스탄 피라미드호텔

 

정병진(관훈클럽 총무,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 사회):관훈클럽 총무를 맡고 있는 정병진입니다. 한국에서 멀리 우즈베키스탄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고려인의 이주와 정체성’을 주제로 해외세미나를 시작하겠습니다. 주제발표를 할 남 빅토르 교수님의 약력이나 그동안의 업적 등은 나눠드린 세미나 자료 맨 뒤에 간단히 소개돼 있습니다. 남 교수님은 고향이 이곳 타슈켄트라고 합니다. 한국 대학에서도 공부하고 한국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논문도 발표했습니다. 세미나는 남 교수님의 주제발표를 듣고 잠깐 쉬었다가 토론하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주제발표에 앞서 관훈클럽을 많이 지원하고 있는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문창극 이사장님의 인사말씀을 듣겠습니다.

 

문창극(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이사장, 중앙일보 부사장 대우 대기자):1년 만에 해외세미나에서 뵙습니다. 금년에는 새로운 얼굴이 많고, 100분에 가까운 많은 분이 오셨습니다. 관훈클럽의 해외세미나와 문화유적 답사가 갈수록 성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연세가 많으신 선배님들이 많으신데 이렇게 건강하게 1년에 한 번씩 뵐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셔서 10년, 20년 이런 아름다운 여행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면서 고려인들의 이주를 생각해 봤습니다. 여기가 우리나라하고 한 5,000㎞ 떨어져 있더라고요. 우리는 5,000㎞ 떨어진 곳을 7시간 비행기 타고 왔습니다. 그런데 1900년대 초반 연해주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올 때 5,000㎞ 이상 온 건데 그때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그런 생각을 하며 논문을 읽어 봤어요. 여기서도 우리 고려인들이 터를 잡고 쌀농사를 시작했고, 집단농장을 잘 운용했으며, 전문직에 많이 종사하셨다는 내용을 보고 역시 우리 고려인은 굉장히 우수한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민족은 유대인과 진짜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여기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오신 분들은 유대인의 환경과 너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 이 ‘디아스포라’를 우리가 잘 모시고 우리 민족이 다 같이 힘을 쓰면 지금 이스라엘 이상의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냥 놀러 가서 술이나 먹고 그러는 게 아니라 공부로 일정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 관훈클럽이 역시 좋은 클럽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모두가 품격이 다 같이 높아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모두 건강하시고 또 좋은 경험 많이 하시고, 많은 걸 보고 배워 가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 회:그러면 우선 남 교수의 주제발표를 듣겠습니다.

 

남 빅토르(타슈켄트 국립 니자미 사범대학교 교수):안녕하십니까? 남 빅토르입니다. 멀리서 우즈베키스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고요, 여기서 뵙게 돼 너무 반갑고 기쁩니다. 그리고 관훈클럽이 저를 초청해 주시고 강연을 맡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부터 제가 준비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인의 이주와 정체성>

1. 서론

1990년 이후 소련이 붕괴되면서 역사의 새로운 단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국가민족정책의 실수를 많이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소련에서의 소수민족의 삶에 저질러진 왜곡된 정책을 일소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동지역과 소련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초기 ‘탄압당한 민족 중 하나’가 되었던 1930~1960년대 여러 민족에 대한 강제이주 조치와 연관된 부정적 과정에 대해 심도 있는 정치적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1990년부터 많은 학자들의 연구물들이 소련의 한인문제를 자세히 연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구소련 한인들에게 발생했던 강제이주의 원인을 찾고, 한인들이 새로운 지역에 어떻게 적응했는지에 대한, 특히 모든 국가에서 민족 간 의사소통의 기본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민족문화적 적응에 대한 실상 및 문제점을 규명해야 했습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소련에서는 불순하고 의심스럽거나 예방적 조치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처벌’ 방법 중 강제이주 같은 방법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강제이주의 필요성은 국제적 또는 군사·정치적 성격의 이유는 물론, ‘불순함’과 종교적 요소, 사회변혁에 대한 반대, 반군 형성 그리고 구시대 제도(발틱해 국,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몰도바 등)에 속한다는 등의 이유로 설명되었습니다.

국가기관들의 이 현상에 대한 협력 형태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그중에는 거주지역 제한, 금지구역(도시) 설정, 신분증 발급 지연, 까다로운 신분증 발급 절차, 근거 없는 예방적 대책, 유형 및 추방 등도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야 예방적 조치대상 한인들에 대한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공화국들로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지기 전에도 폴란드인 3만 5,000명과 1만 명의 독일인(우크라이나), 이란계 6,000명, 쿠르드족 2,000명 등 일부 민족이 이미 강제이주를 당했습니다.

본고에서는 한인들의 극동으로부터의 이주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한인들이 겪은 어려움과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한인들 연해주로 이주 시작

1) 연해주로 1차 대규모 한인 이주의 시작

1869년 가을 조선 이북지방에서 큰 홍수가 난 데 이어 강한 서리가 내려 수확을 모두 망쳐놓는 일이 발생하자 대기근에 쫓긴 한인들은 대거 러시아 땅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대대적인 규모로 남우수리 지방으로 몰려들었습니다.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겨울옷과 월동양식도 챙기지 않은 한인 1,850명(남자 1,300명과 여자 550명)이 여러 경로를 통해 지신허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 소규모로 이루어진 월경은 1869년 11월 말~12월 초에 이르러 한꺼번에 4,500명이 국경을 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1869년 한 해에만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 영토로 이주한 한인 수는 6,543명으로 그중 1/3이 아이들이었습니다. 월경 한인 중 300~400가구는 그나마 가축과 비축식량을 갖고 있었으나 나머지 700여 가구는 맨손으로 월경한 자들이었습니다.

1890년대 후반기 한인 이주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이 커진 것은 한편으로는 조선-러시아 간의 1884년 국교수립,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로의 한인 이주가 계속되는 조건하에서 연해주 지역과 연흑룡 지방의 한인 식민화를 합법화하고 법적으로 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러조수호통상조약’ 체결 협상이 진행 중이던 1886~1888년 러시아 측은 수차례에 걸쳐 자국 땅에 정착한 한인의 법적 지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1885년 러시아 외무성은 K. I. 베베르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에게 조선 정부와의 협상과정에서 1884년 국교수립 이전에 러시아로 이주한 모든 한인들에게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고 그들이 러시아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러시아 국민이 갖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를 조선 정부로부터 얻어내라는 지침을 하달하였습니다.

2) 러일전쟁 이후 한인의 2차 러시아 이주

1904~1905년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만주와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이주하는 한인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고향을 버리고 러시아에서 새로운 조국을 찾으려는 한인들의 이주는 더 광범위한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주의 주된 원인은 일본 자본가와 지주들의 토지 공탈과 일본 농민들의 대대적인 대한제국 이주와 관련된 경제적 요인이 컸습니다. 대한제국이 자주권을 상실한 때부터 이주는 뚜렷하게 정치적 성향을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주민 중에는 항일민족해방운동 참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일본 침략자들이 시행한 잔혹한 군사경찰 공포정치의 결과로 이들은 조국을 떠나 러시아 영토로 자신의 활동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운동의 규모는 광범위했습니다. 1907년 폐위된 대한제국 황제 고종 자신이 러시아로 도주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06~1910년 연해주 이주 한인 수만 해도 〈표 1〉에서 볼 수 있듯이 3만 4,399명에서 5만 96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인용된 자료의 수치는 공식등록된 한인만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7년 연흑룡 지방 총독의 지시로 남우수리 지방 한인 주민에 대한 인구조사를 실시한 A. M. 카자리노프 특무관의 통계를 보면 연해주의 미등록 한인 수는 등록 한인 수의 3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농업개혁 실시기간인 1906~1917년 극동으로의 러시아인 이주민은 총 25만 9,470명으로 그중 연해주로 16만 7,547명(64.57%), 아무르주로 9만 1,923명(35.43%)이 이주하였습니다. 이 시기 극동으로는 농민 외에도 비농민의 유입이 증가했습니다. 1906~1916년 도시, 금광, 철도 건설장으로 2만 3,008명이 이주했습니다. 그 결과 1917년 연해주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수는 이미 74만 8,300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한인 주민 수는 10만 명 정도였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러시아로의 한인 이주민 수는 다시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1911년 1월 1일~9월 1일에만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 노동자 2,253명이 도착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영구정착을 위해 연흑룡 지방에 찾아드는 한인 수도 증가했습니다.

 

3. 소비에트 러시아와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인들

1917년 러시아 내 한인 수는 10만에 달했습니다. 연해주에만 8만 1,825명(러시아 국적 보유자 3만 2,841명과 미보유자 4만 8,984명 포함)이 거주했으며, 이는 연해주 전체의 30%에 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내전 및 외국 열강 군대 간섭기 중 러시아 유럽지역에 7천여 명, 서부 시베리아에 5천여 명의 한인이 있었습니다. 한인 노동자들이 러시아의 유럽지역 내 18개 도시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내전과 외국 열강 군대 간섭기 중 한인들의 극동공화국 유입은 더욱 늘었습니다. 1923년도 농촌 및 도시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 지방 한인들의 총 숫자는 11만 280명이었고 연해주 한인 숫자는 10만 6,409명이었으며 그중 9만 4,082명이 마을과 촌에 살았습니다.

1923년 인구조사 결과는 결코 정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자료들은 실제 숫자와 25~30% 차이가 있거나, 한인들은 상호교류에 용이한 교통로가 없는 외곽지역에 산재하여 거주했기 때문에 정확히 집계되거나 등록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신뢰할 만한 자료가 있습니다. 극동혁명위원회의 한인문제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923년 연해주에는 12만 982명의 한인이 거주했고, 그중 10만 3,482명이 농촌에 그리고 1만 7,500명이 도시에 거주했습니다.

그 후 극동공화국 한인 수는 증가했습니다. ‘극동혁명위원회 1925년도 보고서’는 지역 한인 수를 13만 명으로, 그중 러시아 국적 한인은 6만~7만 명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1926년 한인 숫자는 이미 17만 명에 달했습니다.

1930년대 중반은 이미 그 숫자가 20만 명에 달했던 재소 한인들의 역사에 있어 경제개혁 분야에서 성과를 낸 기념될 만한 시기입니다. 한인 노동자들의 문화적 발전에도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1936년 지방 이민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초등학교 287개와 준중등학교 53개 및 중등학교 4개(총 344개)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총 1만 9,255명, 준중등학교 5,497명 그리고 중등학교 261명의 학생(총 2만 5,043명)이 있었습니다. 한인학교 비중은 극동공화국 전체 숫자의 12.5%였습니다. 극동지역 민족학교 가운데 한인학교가 인원수로는 1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극동공화국에는 세계 유일의 한인 사범대학이 있었고, 2개의 교육전문학교, 1개의 농업기술학교, 지방 한인 소비에트 당원 학교, 고등 공산주의 농업학교 조선어과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육기관은 당시 2천만 인구를 가진 일제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도 없었습니다.

 

4.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1937년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회의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극동 변경지역 한인들의 이주 결정에 따라 1937년 9월 연해주 러시아 연흑룡강 지방에 살고 있던 약 18만 명의 한인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되었습니다. 강제이주의 공식적 이유는 ‘극동지방에 일본 정보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침략적 정책으로 극동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소련은 연해주 안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연해주에서는 소련을 향한 일본의 첩보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한국말 이외에도 러시아말, 일본말, 그리고 중국말을 잘하는 연해주 한인들이 이러한 목적에 쉽게 이용될 수 있다는 게 소련의 판단이었습니다.

소련 인민위원회의와 전소련공산당 최고회의에 의해 1937년 ‘극동지방 국경지역으로부터의 한인 이주에 대한 결의안’ 제1428~326(1급 비밀)호가 채택되었고, 이 문건은 다음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소련 인민위원회의와 전소련공산당 최고회의’는 극동지방의 일본 스파이 활동 침투차단을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합니다.

 

1. 극동지방 전소련공산당과 극동지방 집행위원회, 극동지방 내무인민위원부에 다음의 극동지방 국경지역에서 모든 한인을 이주시킬 것을 권고.

대상지역:포시에트, 몰로토프, 한카이, 호홀리스크, 체르니고프, 스파스크, 슈마코프, 포스티쉬프, 비킨스크, 뱌젬스크, 하바로프스크, 수이푼, 키로프, 카리닌, 라조, 스바보드넨, 블라고베센스크, 탐보프스크, 미하일로프스크, 아르하린스크, 스탈린스크, 블류헤로프스크 지구에서 남부 카자흐스탄주의 아랄해 지역과 발하샤 지구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주시킬 것. 이주작업은 포시에트 지구와 그로데코보 지구 인근부터 개시할 것.

2. 이주작업은 즉각 개시하며 1938년 1월 1일까지 종료할 것.

3. 이주대상 한인들에게 이주 시 재산과 가재도구 그리고 가금류를 가져가도록 허락할 것.

4. 이주민들에 의해 남겨지는 동산, 부동산 그리고 농지에 대해 보상할 것.

5. 한인들이 출국을 희망할 경우 간소한 국경통과 절차를 적용하여 이주대상 한인들의 출국에 장애를 주지 말 것.

6.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이주와 관련, 발생 가능한 한인들의 난동 및 폭동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

7. 카자흐스탄소비에트공화국과 우즈베키스탄소비에트공화국의 인민위원회의에 조속히 이주지역 및 위치를 정하게 하고 이주민들에게 필요한 협조를 제공하여 새로운 지역에서의 이주민들의 농업활동을 보장해줄 수 있는 조치를 결정토록 할 것.

8. 인민교통위원부는 극동지방 집행위원회의 신청에 따라 이주 한인 및 그들의 재산을 극동지방에서 카자흐스탄공화국과 우즈베키스탄공화국으로 운송할 열차를 제때 보장할 것.

9. 전소련공산당 극동지방위원회와 극동지방 집행위원회에 3일 안에 이주대상 가구 및 인원수를 보고토록 할 것.

10. 이주 진행상황, 이주지역으로부터의 출발 숫자, 정착지역 도착 숫자, 해외로 출국이 허락된 인원수를 10일 단위로 전문보고할 것.

11. 한인 이주지역의 국경 경비 강화를 위해 국경수비대 수를 3천 명으로 증원할 것.

12. 소련 내무인민위원부의 한인들에 의해 비워지는 공간에 국경수비대원의 입주를 허락할 것.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 몰로토프

전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탈린

 

1937년 9월 10일 한인 이주민 초기그룹이 떠나갔습니다. 얼마 뒤 소련 내무부 장관인 예조프는 작전과정에 대해 보고하면서 1937년 9월 21일 극동공화국으로부터의 이주 현황을 “카자흐스탄공화국 2만 1,299명, 우즈베키스탄공화국 3만 3명, 총 5만 1,302명(1만 369가구) 이주”로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언급된 지역으로의 5,400가구(2만 4,000명)와 극동지방 국경지대에 남아 있던 한인 2만 5천~3만 명의 차후 후송계획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제이주를 주관한 기관들의 의견은 “스파이들의 첩보망 활성화를 차단하기 위해 남은 한인들을 모두 이주시킬 것”으로 같았습니다.

강제이주 대상이 된 한인들은 공산주의자, 콤소몰 조직원, 한인 교장을 포함한 소비에트 공립학교 교사, 보안기관 요원, 내전 시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참전한 빨치산 출신 인사, 대학생, 전문대 학생 등이었습니다.

1937년 10월 18일 사할린주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야 했습니다. 한인들에 대한 강제이주 결정은 전소련공산당 사할린주위원회와 사할린주 내무인민위원부에 의해 이미 1937년 9월 말 내려져 있었습니다. 사할린주로부터 뤼브노프 지구 239명, 서부 사할린 191명, 오힌스크 390명 등 총 1,196명의 한인이 이주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프, 키로프 그리고 동부 사할린 지구에서는 322명이 강제이주당했습니다.

한인 이주민들은 장기간의 철도여행으로 눈에 띄게 쇠약해졌습니다. 이주 중 사망자 숫자만 554명에 이르렀습니다. 한인들의 이주 여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수많은 한인들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식사는 부실하거나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식수 부족, 의료서비스 부재 등이 극동으로부터의 이주 여정의 환경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이들은 바로 한인 인텔리겐치아(교사, 출판사 종사자, 의료종사자, 사회복지분야 대표 등)였습니다.

1937년 10월 25일 극동으로부터의 한인 이주는 거의 종료되었습니다. 한인들은 우즈베키스탄공화국에 1만 9,453가구(7만 4,206명), 카자흐스탄공화국에 1만 8,461가구로 분산 이주되었습니다. 소련 내무부 장관인 예조프가 소련 이민위원회의 의장 몰로토프에게 “현지에 76개의 열차가 그리고 도중에 48개의 열차가 도착한 후 짐을 풀었다”고 보고했습니다.

공식적인 관점 외에 학계에서는 강제이주 동기에 대해 다양한 견해와 관점이 존재합니다. M. N. 박 러시아 역사학자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조짐이 보이자 이 전쟁에 맞설 준비가 안 된 소련은 대적인 독일, 일본과 가까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과 가까워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는 반일감정이 강한 한인들을 연해주에서 모조리 추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M. N. 박, 1997:31 재인용). 권희영은 강제이주는 한인들을 극동에서부터 제거하려는 오래된 러시아 쇼비니즘의 발로였다고 보고 있습니다(권희영, 1996:69 재인용).

고송무는 강제이주의 다음과 같은 부차적인 이유를 지적했습니다.

 

첫째, 연해주 한인들은 연해주 소비에트화에 많은 공헌을 했을지라도 소련당국은 한인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그리고 밀집해서 살고 있던 한인들이 언젠가는 자치구를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중앙아시아에 이주시킴으로써 한인들이 한곳에 모여 살지 않고 여러 곳에 퍼져 주위의 많은 다른 민족과 섞여 살게 하자는 목적도 있었다. 또 이주지역을 택할 때는 가능한 한 극동에서 멀리 떨어지고 사람이 적게 사는 지역을 염두에 두었다.

셋째, 한인들이 연해주에서 벼농사에 성공하자 이를 더 크게 활용하는 목적도 있었다.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킴으로써 이 지역의 인력부족 문제도 해결되고 넓은 땅도 개척하고, 쌀도 생산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최근 발간되는 여러 글에서는 강제이주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작가인 우대국은 자신의 소설 ‘약혼반지’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인들을 운송하는 모든 열차행렬은 화물열차였다. 열차 한 개 제대는 대략 50~60량의 화물칸으로 이루어졌다. 경찰과 내무부 호송인원들만 객차에 탔다. 화물칸에는 창문 하나 없었으며, 문만 있었을 뿐이다. 문이 닫히면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이 열차로 가축을 나르는지 사람을 나르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기차를 그냥 ‘검은 상자’라고 불렀다.”

(보리스 박, 러시아에서의 140년간, p. 314, 재인용)

 

황승결 씨는 강제이주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후 4시쯤 우리 집으로 국가정치연합국 무장군인 2명이 탑승한 차량 한 대가 도착했다. 우리 집에는 7명의 아이들과 2명의 어른이 있었다. 어렵게 짐을 싣고 길을 떠났다. 저녁 8시경 철도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말과 기타 대형 가축 운송용 화물열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차량은 사람을 나르기 위해 정비되어 있었다.”

(보리스 박, 러시아에서의 140년간, p. 314 재인용)

 

5.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생활여건 구축

1937년 9~10월 한인 이주민 그룹이 하나씩 뒤를 이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예정된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중앙정부에서 약속한 모든 명령이 정확한 일정표대로 집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이미 새로운 거주지에 도착한 한인들을 여기저기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라는 명령 같은 혼란이 원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 추바로에 의해 “한인 이주민 중 500가구의 어민들을 스탈린그라드주 아스트라한 지구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명령은 명령실행을 위한 예산이 책정되기 전 실행되었고, 이 예산은 당연히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전달되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한인들이 국가기관으로부터의 도움이나 동일목적을 위한 예산 없이 새로운 주거지에서, 거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현지 소련 인민위원회의,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토지인민위원부, 소련 재정인민위원부, 소련 ‘농업은행’ 등지로부터 모스크바로 발송한 보고서들은 전부 허위보고였습니다. 물론 극동에서 한인 이주민들이 남기고 온 기구 및 재산에 대해 약속한 금전적 보상 지급도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연해주에서 출발한 첫 열차가 9월 말 카자흐스탄, 10월 초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했습니다. 이주자 수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예상한 것보다 30~40배 많았습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1938년 12월 1일자로 카자흐스탄에 1만 8,461가구의 한인이 이주했다고 보고했습니다(Кан Г.В. Корейцы Казахстана. Алматы, 1994, с. 38~42). 〈표 2〉에서는 한인 이주민들의 정착지역 상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 보고에 의하면 한인 1만 9,453가구(약 7만 4,206명)가 도착하고 우즈베크 사람이 사는 농촌에 1만 946가구가 정착했습니다. 〈표 3〉에서는 한인 이주민들의 정착지역 상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Ким Г.Н . 1999). 그 외에 타슈켄트 시, 사마르칸트 시, 페르가나 시, 나만간 시, 안디잔 시, 코칸트 시, 부하라 시에 약 8,507가구 이상 배정되었습니다.

1938년 봄에는 고려인 집단농장이 형성되었습니다. 타슈켄트 주 치르치크 강 하류에 6개 농장, 치르치크 강 중류에 13개 농장, 치르치크 강 상류에 4개 농장, 사마르칸트 주에 9개 농장, 페르가나 주에 5개 농장, 호레즘 주에 3개 농장, 카라칼파크자치국에 5개 농장입니다. 그리고 고려인 5,145가구는 우즈베크인이 사는 농촌에 배정되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1938년 12월까지 고려인 집단농장이 형성되었습니다. 크질오르다 주 카잘린크 지역에 1개 농장, 카르막친스트 지역에 12개 농장, 테렌 우제크스크 지역에 2개 농장, 스르다린스크 지역에 7개 농장, 야느쿠르간스크 지역에 1개 농장, 칠리스크 지역에 3개 농장, 아랄스크 지역에 2개 농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알마아티 주에 19개 농장, 아크듀빈스크 주에 4개 농장, 부카자흐스탄 주에 5개 농장, 남카자흐스탄 주에 4개 농장, 카라간다 주에 5개 농장이 형성되었습니다.

고려인 강제이주사를 살펴보면서 제일 궁금했던 것은 강제이주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였습니다. 고송무1)에 의하면 연해주에 있을 때 고려인 인구는 20만 5,000명이었다고 합니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고려인은 18만 명입니다. 2만 5,000명의 차이를 볼 수 있는데 그중 만주로 넘어간 사람이 있고, 러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기차에서 사망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시 보고자료에 의하면 1937년 고려인 운송 도중 사고가 나서 기차에 탄 수백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주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이주 도중 많이 사망했습니다.

고려인 강제이주사를 살펴보면서 또 하나 궁금했던 문제는 강제이주 과정에서의 한인들의 정체성입니다. 고려인의 정체성은 한민족의 언어와 전통문화 문제일 것입니다. 박 보리스에 의하면 1930년대 중반까지 극동에 재소 한인들의 문화적 발전을 뒷받침할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즉, 극동지역에는 세계 최초의 한인사범학교, 한인극장, 한인학교가 운영되었고, 러시아어와 한글 신문이 발행되었습니다. 창작분야 종사자들의 예술적 경지가 높은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한인 교사진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한인 농학자 및 기타 주요 직업분야에 한인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강제이주라는 환경에서 가족을 위해 집을 마련하는 데 급급해 이전에 형성된 교육, 문화, 예술의 기초가 붕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련정부의 지원과 고려인들의 노력으로 한국어와 한인문화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교육부 고문서에 의하면 1938~1939학년도에 우즈베키스탄 전국에 96개의 한글학교가 있었습니다. 그중 초등학교 50개, 7년 과정 학교 32개,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은 14개였습니다. 총 학생 수는 2만 명이었습니다. 한국어가 필수과목이었고, 오늘날처럼 외국어로서 교육시키는 차원이 아니고 모국어로서 제1언어로 교육시켰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모든 교과목을 러시아어로 교육시키게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그로써 고려인에게 있어 모국어는 쇠퇴하기 시작되었고, 더 나아가 문화와 정체성 파괴도 시작됩니다. 일본의 지배로부터 한반도가 광복하기까지 그 과정은 악화되어 갔습니다.

한반도가 광복하면서 우즈베키스탄의 한글학교 회복에 대한 논의가 생겼습니다. 1947년 1월 16일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지도부 회의에서 고려인 초등학교에서 모국어인 한국어로 교육하도록 결정하고 규정을 공포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력한 이유로 그 규정은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필요한 교과서가 없었습니다. 둘째는 그 규정이 학부모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국어가 러시아어였고 자녀의 장래 때문에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데 더 많이 집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3학년부터 10학년까지 우즈베크어 대신 한국어로 가르쳤습니다. 일주일에 2시간씩 학생들이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한국어 교사를 도울 수 있도록 우즈베키스탄 교육부에서 특별부서를 마련했습니다.

전국의 대다수 지역에서 고려인은 한국어를 교육받았습니다. 타슈켄트 시, 타슈켄트 주뿐만 아니라 사마르칸트 시, 사마르칸트 주, 호레즘 시, 호레즘 주에서도 한국어를 교육했습니다. 한국어 교사들은 교육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1954년도에는 전국 한국어 교사를 위한 세미나를 실시했습니다. 그 세미나에 교사 29명이 참석했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교사 중에는 훌륭하고 열정적인 교사가 많았습니다. 1955년도에는 레닌 기치(Ленин Кичи) 신문사가 한국어 교수 관련 자료집을 발행했습니다. 자료집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3학년부터 10학년까지의 교과과정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장은 한국어 학습자에 대한 평가기준을 기록했습니다. 3장은 쓰기 연습과제 몇 종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4장은 사전을 통한 교육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할린에서 고려인을 위한 교과서가 편찬되었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의 학생들도 그 교과서로 교육할 수 있었습니다.

1965년도에는 3~11학년 학생들을 위한 교육과정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3~4학년을 위한 한국어 교과서가 편찬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어 정규화를 하는 데 있어 마지막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한국어 교육이 쇠퇴하였습니다. 한국어 교사들은 교과서와 보충자료 없이 가르쳤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어 교사들은 한국어 교육을 포기한 상황이었습니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한국 간에 국교가 수립되면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여러 곳에서 한국어를 다시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6. 결론을 대신하여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많이 사망했고, 중앙아시아에 도착해서도 주거시설이 준비되지 않은 환경에서 많은 고려인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민족의 따뜻한 손길 덕분에 피해를 많이 면할 수 있었습니다. 늘 들어온 것은 초기에 우즈베크 사람들의 도움으로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 한국학과 김 게르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카자흐인들과 우즈베크인들에게, 그들이 우리를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형제와 같은 도움의 손길을 주었으며 우리와 함께 마지막 빵 조각도 나누었다는 것에 감사했던 것은 케케묵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한인들의 정착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인과 우즈베크인들이 자신들도 어려웠던 그 시절에 한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어려운 시절에 카자흐인과 우즈베크인의 도움으로 1937년 고려인 18만 명이 도착했으나 지금까지 발전하여 구소련 고려인 수는 60만 명에 달합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 국민이었던 고려인들은 정체성 혼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즈베키스탄-한국 간 국교가 수립돼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실제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회복되어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고송무, 1990, “쏘련의 한인들 고려사람”, 이론과 실천.

김올가 (2001), “카자흐스탄 한인들의 민족정체성과 언어문제 연구―1990년대 중

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박 보리스 외(2004), “러시아에서의 140년간”, 시대정신.

심헌용(2004), “고련인의 신이주와 NGO의 역할―연해주와 볼고그라드”, 러시아

고려인 역사 140년.

오성환 외(2001), “시간의 시련”, 시대정신.

임영상(2003), “독립국가연합 고려인 사회 연구”, 다해.

한 세르게이(1999), 고려사람, 우리는 누구인가”.

Герман Ким(1999), История иммиграции корейцев. Книга первая. Вторая половинаXIXв. ~ 1945 г. Дайк~пресс, Алматы, 424 стр.

 

사 회:네, 남 빅토르 교수님의 강연 잘 들었습니다. 그럼 커피 한 잔 마시고 잠깐 쉬었다가 2부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부 토론에 들어가며

 

사 회:지금부터 2부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양해말씀을 드립니다. 무선 마이크가 없어서 질문하실 분은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앞으로 나오셔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남재희(전 노동부 장관, 전 조선일보 정치부장):주제발표 잘 들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에 추가해서 질문드리겠습니다. 북한정권에 참여했던 허가이라는 사람이 여기 고려인 출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고려인 이주민과 북한 지도자와의 관계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으면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인 출신 장교들 북한에서 많은 일 해

 

남 빅토르:저보다 이 지역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계시고 많이 공부하신 분들입니다. 실은 저도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잘 못 해서 정확하게 말씀을 못 드립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많은 한인 출신 장교들이 북한에 가서 많은 일을 했다는 정도입니다. 전에 오셨던 분들도 그런 질문을 하셨는데, 제가 미안하지만 잘 모릅니다. 제가 앞으로 공부해야 될 숙제를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그런 분들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 회:지금이나 과거의 이 지역 고려인들과 북한과의 관계를 얘기해줄 수 있습니까?

 

남 빅토르:1992년도까지 북한과 관계를 가졌습니다. 1992년도에 대한민국과 수교하면서 자동적으로 북한과의 교류가 대부분 끊겼다고 봐야 되고요, 92년도까지 북한에서 교수나 문화 쪽 관련 사람들이 많이 왔었습니다.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1993년도까지 우리 대학에서 북한에서 파견된 교수님들이 한국어, 그러니까 조선어를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많은 선배님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도 보고 왔답니다. 저는 북한에 못 갔다 왔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지금도 북한과 교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건 정치적인 교류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교류, 춤이나 전통예술 측면에서 교류하고 있습니다.

 

김창기(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이사, 조선뉴스프레스 사장):제가 몇 가지 질문드리겠습니다. 우선 소련공산당 당국이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배경, 그것에 관한 여러 가지 분석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구소련 공산당 문서 중에 예를 들면 6·25전쟁을 일으키기로 한 사전 논의과정까지 다 공개가 됐어요. 그런 것들이 문서로 남아 있고 공개되는 마당인데, 한두 사람도 아니고 20만 명이라는 인원을 갑자기 이주시키기로 한 과정에 대한 문서들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겠나 생각하고 그 분야에 대한 연구도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둘째도 관련된 질문입니다. 소련이 어떤 이유로든 고려인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여러 가지 목적으로 이주시켰다고 하는데, 그러면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던 생활거주지가 갑자기 공백이 됐을 거란 말입니다. 그 공백을 어떻게 활용하려고 계획했는지, 또 그 공백이 나중에 어떻게 변화되었나에 대한 기록이 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있어요. 그 부분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그다음에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인들의 국적취득 문제는 현재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독일·유대인들도 강제이주당했다

 

남 빅토르:3가지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고려인 연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도 고려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발표한 글도 고문 문서에서 연구된 글을 바탕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지금도 고문 속에서 발견하고 정리하고 연구하는 것이 진행되고 있고요, 한 2주 전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고문 문서를 같이 연구도 하고 내용도 알고 싶다는 연락이 서울에서 왔었습니다. 그런 작업들이 계속 이루어질 겁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건 일부분이고요, 끝까지 연구하려면 앞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전공은 사실 한국어 교육이거든요.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그 문제를 깊이 다룰 수 없는 위치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되면 그쪽 연구를 좀 해보고 싶고, 그런 연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연해주 고려인 거주지에 대해 말씀드리겠는데요, 여기 자료를 보시면 4장에 극동지방 국경지역으로부터 한인 이주에 대한 결의안 내용이 나와 있는데요, 그 결의안 12를 보시면 소련 내부 인민위원회에 한인들이 떠나며 비워지는 공간에 국경수비대원의 입주를 허락할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국경에 있는 마을이나 한인들이 살았던 집에는 군인들이 다 들어가게 되었고요,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나고 스탈린이 죽으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때 소련이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다시 연해주로 갈 수 있게 만들어 줬어요. 그래서 54년 이후에 많은 고려인들이 다시 연해주로 돌아가 자기 집을 찾아가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일부 오랫동안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고려인과 또 여기에서 태어난 고려인은 그냥 여기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인들만 강제이주한 게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강제이주를 당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인이 우크라이나나 유럽 쪽에서 연해주 쪽으로 왔고, 또 중부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했습니다. 지금 아시다시피 연해주에 유대인 자치주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면서 고려인들이 살던 집에서 아마 살게 되었을 거라고 추측해 보는데요, 그리고 소련정부가 연해주에 러시아 사람이 거의 안 살았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일부 노동자나 모스크바 쪽에서 좋은 조건으로 러시아 사람들을 연해주 쪽으로 많이 파견시켰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연해주로 가서 고려인이 살던 마을이나 도시에 살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국적취득 문제인데요, 소련이 붕괴되면서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으로 왔으면 우즈베키스탄 국적을 자동적으로 받았고, 카자흐스탄에 사는 사람은 카자흐스탄에서 자동적으로 국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91년도부터 97년도까지 저희는 소련 패스포트를 갖고 있었습니다. 97년도부터 우즈베키스탄 패스포트로 바꾸게 되는데요, 그 6년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살기를 원하면 러시아 가서 살 수 있었어요. 카자흐스탄에서 살기를 원하면 카자흐스탄에 가서 패스포트만 바꾸면 카자흐스탄 국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96년, 97년 이후는 국적 받기가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예를 들어 타지키스탄 같은 경우 거기에 고려인들이 살았는데 아시다시피 그쪽 내전 때문에 많은 고려인들이 이쪽 우즈베키스탄으로 오게 되는데 그런 사람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국적 취득을 못 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패스포트도 못 받고, 다른 나라 패스포트도 못 받고, 그렇게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러시아 가서 간편한 절차를 거쳐 러시아 국적도 받을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남재희:지금 유대인 말씀을 하셨는데, 아까 문창극 이사장도 유대인 얘기를 했어요. 2~3개월 전에 타임 잡지가 이슬람권에 대한 특집을 했는데, 거기에 보니까 사마르칸트에 유대인 거주지가 상당히 큰 게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우즈베키스탄까지도 많이 진출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지금 교수님 말씀 중에 유대인 타운 이야기가 있는데, 우즈베키스탄의 유대인 타운과 연해주에 있는 유대인 타운이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 빅토르:정확하게는 말씀 못 드리지만 연해주 쪽 유대인들은 스탈린 때 강제이주된 것으로 알고 있고요, 2천 년 전부터 아랍 쪽에서 이주하면서 우즈베키스탄까지 오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러니까 그 그룹하고 연해주에 있는 유대인들하고 약간 성격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거든요. 그래서 그것은 정확하게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김영수(전 MBC 사장, 전 국회의원):우선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강제이주해온 고려인들에 대한 태도가 어떠냐 하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얼마 전 책을 보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당신들은 소련 사람 아니냐. 그러니까 도로 연해주로 가든지 어디로든 돌아가라’고 해서 고려인들이 곤경에 빠졌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아까 오면서 버스에서 들어보니까 우즈베키스탄 인구만 해도 2천 몇백만 되는데 고려인들은 20만 정도밖에 안 되니까 수적으로 굉장히 열세가 되어 고려인들의 지위가 차차 불안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고려인들이 열심히 해서 잘살고 있으니까 잘사는 거에 대한 질투심으로 그러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첫째 질문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연해주는 지금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과 다른 나라에 있으니까 옛날에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당할 때 빼앗겼던 재산이라든가 여러 가지 권리를 회복하는 데 굉장한 지장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기 사는 고려인들 3세, 4세들이 내 조국은 코리아다, 고려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즈베키스탄 또는 카자흐스탄을 내 조국이라고 생각하는지 하는 질문입니다.

 

남 빅토르:몇 가지를 질문해 주셨는데요, 우즈베키스탄인들과 여기 고려인들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 같은데요, 제가 발표하면서 한 가지를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공산당이 아주 참혹한 계획을 짜서 이쪽으로 이주를 시켰지만 여기 현지인들은 그때 고려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거든요. 그들도 못살고 못 먹을 때 고려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빵도 나눠주고, 어떨 때는 집도 같이 쓰고 아주 잘해 줬다고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 얘기 들어보면. 그리고 어제 그제 이명박 대통령님께서 방문하셨는데 여기 카리모프 대통령께서는 이명박 대통령보고 친구라고 하셨거든요. 제가 카리모프 대통령 연설을 몇 번 들었는데 “고려인들하고 같이 자랐다. 고려인 중에 친구들이 있습니다”라고 몇 번 말씀하셨어요. 그만큼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고려인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고 우리를 친구처럼 대접해 줍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문제는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면서 국어가 바뀌었어요. 그 전까지는 국어가 러시아어였는데 92년부터 우즈베키스탄어가 국어가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려인들은 국어가 우즈베키스탄어지만 러시아어로 다 교육받고 대학에서도 러시아어로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국어에 대해 우리는 약합니다. 언어 때문에 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우리 고려인들이 러시아나 다른 데로 많이 갑니다. 제가 객관적으로 볼 때는 민족 간 갈등 때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러시아로 가는 것은 민족 간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나 앞으로 진로, 국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을 견제합니다. 왜냐하면 소련 때는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우즈베키스탄 나라지만 관리층, 고위층은 다 러시아 사람들이 차지했거든요. 그래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을 약간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고려인들을 볼 때는 전혀 그런 거 없어요. 오히려 같은 동양계이기 때문에 친하고 같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많은 고려인 한국을 조국으로 생각해

 

연해주 보상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탄압받았던 민족에 대한 보상에 대해 얘기한 바 있었습니다. 아마 고려인들이 가서 그런 신청을 하게 되면 러시아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3세, 4세 고려인들의 정체성과 한국을 조국으로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해 물으셨는데, 글쎄요, 저를 비롯해서 많은 고려인들이 지금도 한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패스포트를 보면 민족이 따로 있거든요. 국적하고 민족을 우리는 좀 구별합니다. 그래서 패스포트의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이지만 민족은 한국인이에요. 한국인, 코리아인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난 곳,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이지만 한국사람이라는 식으로 교육받아 왔습니다.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잘 모르지만 그런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결혼할 때도 부모님들이 고집하는 게 꼭 고려인하고 결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저희가 학교에서 가르칠 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요.

 

사 회:예, 다른 질문 해주시죠.

 

임종건(한남대 초빙교수,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2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까 주제발표할 때 고려인 일부가 일본의 앞잡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스탈린 시대에 고려인 강제이주를 했는데 이주한 사람이 20만 명 가까이 됐다고 했는데요, 그때 그 사람들 가운데 무슨 자치를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는지 하는 것이 첫째 질문입니다. 그리고 내년에 한국에서 총선과 대선이 있는데 국적은 아니지만 영주권를 갖고 있는 분들이 투표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즈베키스탄에 계신 영주권을 갖고 있는 분들이 한국의 선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박 실(전 국회의원, 전 한국일보 정치부 차장):관련된 질문 하나 드릴게요. 지금 여기에 남북의 문화가 들어오고 있는데 고려인 사회 내부에 친북, 친남 등 남북 갈등이 있는지, 그리고 남 교수가 북한도 가고 서울도 가보았을 텐데 북한의 대고려인 정책과 남한의 정책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만약 차이가 있다면 어느 쪽이 좀 더 적극적인 정책을 하고 있는지 얘기해 주시면 좋겠어요.

 

북한과 교류는 거의 없어

 

남 빅토르:저는 북한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저희 선배들이 다녀왔는데 프로그램이 끝나서 저는 북한을 못 가봤고요, 자치라든가 독립운동에 대해 사실 어떤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자료를 제가 보지는 못했고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학자마다 좀 견해가 다릅니다. 또 독립운동하면서 연해주 땅을 우리에게 달라는 그런 주장에 대해서는 들어봤지만 자료를 아직까지 못 봐서 제가 확실하게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만 정확하게 말씀을 못 드리고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영주권 받아도 투표권은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국적을 취득하면 그때 투표권이 주어질 것 같은데요, 그렇게 주어진다면 저도 투표하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투표하겠습니다.

남북한 대사관이 여기 있습니다. 구소련 중에 러시아하고 우즈베키스탄에만 북한대사관이 있습니다. 다른 데는 없고요. 92년도에 한국대사관을 우즈베키스탄에 개설하면서 고려인 사회에서 약간 갈등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였냐 하면 북한에서 크게 행사를 하면 남한 대사관에서 그것보다 더 크게 하려고 해요. 또 여러 가지 경쟁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그런 건 없습니다. 북한하고 거의 교류가 없어요. 저희는 주로 대한민국과 교류하고 있고, 우즈베키스탄 정책도 한국을 많이 닮아가고, 한국하고 많이 교류하다 보니까 북한과의 교류가 적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류의 성격을 보면 옛날에는 정치적인 성격이었다면 지금은 경제적인 성격이거든요. 양국이 서로 이익이 되면 교류하고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잘 교류를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북한대사관도 여기 고려인들하고 적극적으로 만나려고 하는 게 전혀 없거든요. 북한대사관은 있지만 북한 차량도 안 보이고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지금 몇 명이 와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정진석(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저는 구체적인 거 물어보겠습니다. 모국어를 지키기 위한 교육에서 출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중에 신문, 잡지가 있는데 그전에 여기에서 ‘레닌기치’라는 신문이 발행됐죠?

 

남 빅토르:예.

 

정진석:지금도 발행되고 있습니까?

 

남 빅토르:‘레닌기치’는 지금은 없고요, 주로 카자흐스탄에서 신문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 ‘고려사람’이라는 신문이 나옵니다.

 

정진석:전체가 잘 보관돼 있습니까? 영인본이 나왔다고 알고 있는데….

 

남 빅토르:보관에 대해서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진석:지금 대사관의 도움이라든지 정부의 도움이라든지 이런 건 별로 없습니까?

 

남 빅토르:지금 대사관하고 우리 정부, 재외동포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진석: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상당히 유명한 소설가가 한 명 있었죠?

 

남 빅토르:고려인요?

 

정진석:네.

 

남 빅토르:러시아 작가고요, 우즈베키스탄 작가가 아니고 지금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진석:문학 활동하는 분들이 조금 있죠?

 

남 빅토르:예.

 

정진석:문학단체도 있습니까?

 

남 빅토르:예.

 

문명호(전 문화일보 논설주간):남북관계 얘기 연장선상에서 궁금한 게 있어요. 첫째,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 났을 때 여기 고려인들의 반응은 전혀 무관심했는지, 또는 한국정부에서 조사결과를 발표했는데 한국정부 발표를 믿고 북한이 또 못된 행동을 했구나 하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북한이 그럴 리가 없다며 북한을 지지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둘째는 한국에서도 요새 분단 이후 3세대, 4세대 내려가면서 통일에 대해 관심이 엷어지고 있는데 여기 고려인들은 남북통일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면 빨리 통일이 돼서 같이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전혀 관심이 없는 건지, 또는 그냥 지금으로 좋다 그 정도인지…. 셋째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고 교류도 활발한데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다음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인데, 고려인들이 예를 들어 결혼할 때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려인끼리만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지, 아니면 다른 민족하고 결혼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거나 더 나아가 다른 민족하고 결혼하도록 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대해 기대하는 게 있는지, 있다면 어떤 것들인지 하는 질문입니다.

 

남북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남 빅토르:아주 재미난 질문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천안함 사건 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제가 민주평통위원이라서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물론 우리는 객관적으로 볼 때 북한이 잘못했다고 알고 있고 북한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남한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건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모국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고 당신은 북한을 지지하느냐, 남한을 지지하느냐 그런 질문도 많이 받아 봤습니다. 사실상 고려인들이 러시아로 강제이주될 때는 우리 조국이 북한하고 남한으로 갈라지기 전 얘기거든요. 고려인들은 통일조선에서 살다가 러시아로 이주하고 이쪽으로 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렇게 물어보면 헷갈립니다. 우리는 모국이라고 생각할 때는 통일된 모국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북한과 남한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우리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한민족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믿고 있고, 자녀들이 아직 어리지만 나중에 결혼할 때 우선순위는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꼭 고려인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급적 대학을 나왔으면 하고, 나머지는 옵션입니다. 고려인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장담을 못 하지만 교육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시킵니다. 우리가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에 기대하는 건 한국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한국이 계속 성장하면 우리도 우대를 받거든요. 대우를 받습니다. 한국이 많이 안정될수록 우리도 좋고요, 우리도 대우를 잘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 기대는 한국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걸 원하고, 한국의 위상이 많이많이 높아졌으면 합니다.

 

남재희:기독교 교회라고 했는데, 한인 기독교 교회입니까, 우즈베키스탄 기독교 교회입니까?

 

남 빅토르:교회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따로 민족을 구별하는 건 아닌데, 교회에는 고려인들이 많이 옵니다. 고려인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 나갑니다.

 

남재희:교회가 자생적으로 있는 거란 말씀이시죠?

 

남 빅토르:예.

 

송정숙(전 보건사회부 장관,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궁금한 걸 많이 말씀해 주셔서 많이 알겠는데, 2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는 집단농장인 콜호스를 고려인들이 만들어 살아왔지만 국영농장이라 개인이 가질 수 없었을 텐데 지금은 연고가 있던 사람들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말하자면 땅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 궁금하고요, 그리고 지금 여기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류열풍이 있는지, 또 고려인들 말고 우즈베키스탄 사람들도 한류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한류 덕분에 한국어 많이 배워

 

남 빅토르:농장이나 다른 재산에 관련한 땅은 국가 소유입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개인 땅 하나도 없고요, 그래서 모든 땅은 국가 땅이고 건물만 자기 소유로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농장의 경우 집은 개인 소유이지만 땅은 국가 소유이기 때문에 고려인들이 이사 갈 때 집을 팔고 갈 수는 있습니다만 땅을 팔 수는 없습니다. 농장을 방문하시겠지만 옛날에 거의 고려인들만 살았던 농장들이 지금은 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고, 고려인들은 사실 많이 이주했습니다. 수도권이나 다른 나라로. 타슈켄트 인구가 200만 명 정도 되는데 200만 명 중 6만 명 정도가 고려인입니다. 그만큼 타슈켄트에 고려인이 많이 진출했어요. 그리고 많은 고려인들이 수도권에 살고 있고, 먼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이 수도권 지역으로 많이 이사를 왔습니다.

한류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하고 한국사람들하고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전통도 그렇고요, 언어도 사실 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한국을 너무 사랑합니다. 국영방송을 보시면 한국 드라마 있거든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 매일 한국 드라마 봅니다. 제가 못 본 드라마도 많이 봐요. 우리 학생들도 드라마나 다른 것에 대해 저보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현재 가수 등 연예인들에 대해 우리 학생들이 저보다 많이 알고 있고 오히려 제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류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많이 배우고 있고요, 한국에 가고 싶어 하고, 또 실제로 갔다 온 사람도 많습니다. 그만큼 한류가 대단하다고 봐야겠죠.

 

사 회:고려인 말고 우즈베키스탄 사람들도 한류에 대해 관심이 많고 배운다고 하셨는데요….

 

남 빅토르:예, 지금 말씀드린 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 대한 것이고요, 우리 고려인들은 당연히 한국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한국 옷이나 한국 가방 등 한국 것들 다 좋아합니다. 한 번쯤 한국 다녀오고 싶은 마음을 다들 갖고 있습니다.

 

사 회:물어볼 게 많을 것 같은데 시간제한도 있고 해서 세미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아주 멀리까지 와서 흥미 있고 깊이 있는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 좋은 세미나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관훈토론회
  • 관훈저널
  • 관훈언론상
  • 저술,출판 지원
  • 소모임 활동
  • 언론계 선후배 대화